#34
“우리가 이제 막 모험을 마치고 와서 동전이 없군. 이걸로 값을 치러 주게. 그리고 편한 옷도 한 벌 필요할 것 같으니 남성용으로 구해다 주고. 나머지는 팁이네.”
순간 시현이 당황해 식은땀이 나려 할 때쯤. 앞쪽에 앉아 있던 이규민이 품 안에서 새끼손톱만 한 푸른색 보석을 하나 꺼내더니 익숙하게 아이에게 건넸다.
“아앗!! 감사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금방 구해다 드릴게요!!”
규민이 내민 보석은 가치가 꽤 나가긴 하는 것인지 아이의 동공이 확대되더니 대답하는 목소리 또한 한 옥타브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몇 번이나 인사를 한 뒤 잔뜩 신이 난 얼굴을 한 채 자리를 떠났다.
시현이 고개를 휙 돌려서 아무렇지 않게 눈을 껌뻑이고 있는 이규민을 빤히 바라봤다.
갑자기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익숙하게 점소이 소년에게 심부름까지 시키는 걸 보자 저절로 입이 적게 벌어졌다.
“뭐, 뭐예요?”
“예? 하하. 아, 이거요. 아까 말씀드렸었잖아요? 최근에 몇 군데 들어갔던 경험이 있다고. 그때 제일 중요한 게 화폐더라고요. 그리고 대부분 보석은 좋게 먹혔고요. 물론 다 게이트에서 구한 겁니다!”
시현은 그제야 왜 이규민이 낡아 보이는 작은 가방 이외에 다른 물건들을 챙겨 오지 않았는지 이해했다.
그렇게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제 손을 잡아 오는 온기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작게 헛기침했다.
‘생각해 보니 배경만 달라졌지 무림에 있을 때랑 별반 다를 것도 없네 뭐, 흠흠!’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뭔가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시현은 금방 나와 따스한 김을 뿜어내고 있는 고기 스튜에 함께 나온 빵을 찍으며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할까 마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짧게 세웠던 계획이 무산될 정도로 중요한 정보가 옆에서 너무나 허무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자네 그거 들었나? 크루센트 계곡으로 갈 기사단이 곧 출발한다고 하더군.”
“허. 그래?”
“이따가 같이 가서 구경이나 하지 않겠나? 손녀가 너무 졸라서 가야 할 것 같거든.”
정보 길드 따위를 수소문하거나 지도를 몰래 파는 이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퀘스트라는 것에 얽매여 너무 어렵게 생각했던 건지 오히려 방법은 쉽게도 나타났다.
시현은 열심히 입으로 옮기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들려오는 대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게 된 것은 세 가지. 첫 번째는 왕이 왕자를 구하기 위해 기사단을 파견했다는 이야기였고 두 번째는 가는 길에 있을 자잘한 몬스터를 상대할 용병들을 모집한다는 것, 세 번째는 그 크루센트 계곡이 동남쪽에 있다는 것이었다.
시현은 그 결론들에서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지금 주어진 퀘스트가 가라는 곳도 동남쪽, 길드원들의 흔적도 동남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 의심에 쐐기라도 박듯 주변에서 쏟아지는 힌트들까지.
‘뭐지?’
과한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이상하게도 모든 상황이 자신들을 그쪽으로 유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굳이 따지자면 방향 말고는 공통점이 없었고 목표 지점이 다를 수는 있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이 수많은 길에서 방향이 겹친다는 건 아주 큰 단서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현의 감이 이 일에 대해 이상함을 연신 알려 왔다.
“원래 따로 들어와도 퀘스트가 이어지기도 합니까?”
“음…. 그건 잘 모르겠어요. 사실 이런 불확실성 때문에 쉽게 구조하지 못하는 것도 있거든요.”
시현은 테이블을 따각거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금방 복잡한 머리를 털어 냈다. 어차피 자신은 퀘스트에서 크게 벗어나서도 안 됐고 원래의 목표인 구조도 해내야 했다.
그런데 시간은 촉박했으니, 지도를 대신한 길잡이로 기사단은 안성맞춤이었다. 뭐가 됐든 주어진 걸 이용하고 위기가 나타난다면 다 치워 버리면 그만이었다.
“우린 기사단의 뒤에 붙어서 이동하죠.”
시현이 다시 한번 계획을 세우며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이제는 생각보다 행동으로 옮길 시간이었다.
***
같은 날 자정. 도시는 마정석으로 인해 게이트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보다 더욱 밝게 빛났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불이 많이 켜져 있는 것 같은 건물의 상층, 평소보다 더욱 어둡게 내려앉은 방 안에 남자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도련님께서 게이트에 입장하신 것 같습니다.”
“규민이가?”
“예.”
남자는 불투명한 유리 조각을 들여다보다 앞에서 들려오는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쯧. 어쩔 수 없나. 그럼 규민이도 진행하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솔직히 예상은 했지만, 규민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해서 들어간 건지 소식을 늦게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겐 이것 말고도 신경 써야 할 게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그사이에 보고를 하던 이가 밖으로 조용히 빠져나갔지만 남자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 여러 보고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흐음, 그런데 정시현? 낯익은 이름인데…. 뭐, 어차피 같이 들어갔으니 됐나.”
달칵.
옆에 있던 서랍장이 열리고 알아볼 수 없는 표가 빽빽하게 담긴 보고서가 가장 위에 올라갔다.
그리고 신의 광산 입장에 관한 내용 한 장만이 테이블 위에 남았다.
“규민아, 세상은 이미 바뀌고 있다. 너희들은 당분간 생각 없이 놀게 해 주고 싶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빨리 받아들여야 해.”
그게 진리야.
규환의 표정은 마치 어떠한 숙명을 짊어진 사람 같았다.
잠시간 나지막하게 무언가를 중얼거린 그는 단호한 표정을 한 채 구겨진 셔츠를 탁탁 털어 만지고선 천천히 일어섰다.
시현의 얼굴이 가장 위에 자리한 보고서를 세단기에 넣은 다음, 재킷을 집어 들곤 등을 돌려 미련 없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돼.’
시현은 내공을 주입해 안력을 올리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서 기사단의 행렬을 쫓는 중이었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길게 늘어진 행렬 인원 중에서 기사단이라고 했던, 정확히는 플레이트 메일을 걸치고 있는 이들은 고작 3명뿐이었다. 게다가 그들을 보조하는 이들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근데 그 뒤를 따르는 용병들은 거의 백오십 명이 넘는다고?’
그리고 그중 가장 의심스러운 점은 기사단이라고 했던 세 명 중 한 명을 빼고는 몸 안에 기운 같은 게 한 줌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데다가 발걸음에서도 전투를 익힌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니.
기사라는 건 거짓말처럼 보였다.
‘왜 이렇게까지 해 가면서 용병들을 끌어모은 거지…?’
그러나 시현은 진작 성안을 써서 확인했던 저들의 정보를 떠올리며 제대로 들어맞지 않는 상황들에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팔리아센트 왕국 기사 데이브(-)]
[팔리아센트 왕국 기사 드헨(-)]
[팔리아센트 왕국 기사 브리헬(-)]
‘진짜 기사는 맞는 것 같긴 한데….’
아직은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시현은 방향만 겹칠 뿐 자신과 관련이 없는 이들에게 기울어지는 신경을 냉정하게 잘라 냈다.
제 목표는 길드원을 구하는 거지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게 아니었으니까.
“스승님. 힘들지 않으십니까. 제가 안고 움직일까요?”
그때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이고 있던 시현의 스텝이 살짝 꼬여 멈칫하곤 다시 보폭을 넓혔다.
“아니야. 이 정도 가지고 뭘.”
시현은 제 옆에서 한 템포도 놓치지 않고 바짝 붙어 오는 제자의 얼굴을 슬쩍 보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태운은 이동하는 동안 자신 말고는 어느 사람과도 말을 섞지 않았다.
그곳에 있을 때는 사방이 다 적이었기에 신경 쓰지 못했지만 여기서는 그래도 다른 사람들과 교류도 좀 하며 사회성이 길러지길 바랐건만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
‘하긴 본보기를 보여야 할 나부터도 이러는데 어쩔 수 없나….’
그리고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다른 일행들은 태운을 조금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대체 왜 다들 태운이를 무서워하지? 이해가 안 가네.’
솔직히 규민이 먼저 말을 걸면서 친하게 대해 주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던 시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슬슬 야영 준비를 하는 저 앞의 행렬에 맞춰 똑같이 멈추어 섰다.
“우리도 오늘은 여기서 노숙을 하는 게 좋겠다. 유준아, 나침반은 여전해?”
“네, 방향은 변화 없고요. 그리고 점점 표시가 진해져요.”
“흐음….”
자신들의 목표가 길드원의 구출이 아니라 게이트의 공략이었다면 원래는 저 행렬 안에 자신들도 있었을 것이다.
퀘스트는 그걸 바라고 있었으니까.
만약 길드원들도 그런 비슷한 퀘스트를 받았다면?
최대한 다양한 방향으로 여러 가능성을 고려해 보고 싶었지만 제 생각은 자꾸 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스승님. 무엇을 걱정하는지 저는 모르겠지만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앞길을 막으면 그냥 다 치워 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단번에 복잡한 고민을 끝내 버리는 태운의 말에 시현은 작게 웃음을 흘리며 새카만 머리를 슥슥 쓸어내렸다.
그래, 맞다. 정 어찌할 방법이 없다면 다 밀어 버리면 된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걱정 따위 하지도 않았을 텐데 현실로 돌아오고 능력을 잃으면서 잔걱정이 많아진 것 같았다.
그 정체불명의 게이트에서 나온 이후로 시현은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꽤 빠르게 경지를 회복해 가는 중이었다.
“그러네. 뭐, 내가 못 하면 우리 제자가 나 대신에 열심히 해 주겠지.”
“그럼요. 어떠한 것도 남기지 않을 겁니다.”
둘만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당연히 세 명의 일행들은 남겨 놓고 말이다.
물론 목소리만 나긋하다고 다 좋은 말은 아니었다. 자신들이 듣기엔 둘이 나누는 대화가 너무 살벌했다.
‘무섭습니다…. 형님….’
‘시현이 형….’
‘절대 까불지 말아야지.’
그렇게 시현에겐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서로의 심적 거리가 조금 더 멀어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