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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자 10년 만에 돌아왔더니 헌터란다-32화 (32/146)

#32

화악.

시현은 자신을 훑고 지나가는 것 같은 빛을 가르며 몇 걸음 옮기자 순간 느껴지는 신선한 공기와 풀 내음에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눈앞에 떠오른 익숙한 창을 지긋지긋하단 얼굴로 빤히 쳐다봤다.

[system: 퀘스트 발생! 당신은 루키용병단의 전사가 되었습니다! 팔리아센트 왕국의 왕자님을 구출해 주세요! hint- 정보를 수집하자! (제한 15일)]

“…이건 생각하지 못했던 건데.”

쓰여있는 내용이 어떤 경험과 무척이나 비슷했다. 10년간 겪어왔기에 착각일 수는 없었다.

‘이상한데.’

시현은 고개를 내려 처음 입고 왔던 회색빛의 후드가 아닌 다른 옷으로 감싸진 제 몸과 검 말고는 텅 비어 버린 양손을 몇 번 둘러봤다.

“형님!”

그때 뒤쪽 수풀에서 낯선 기운이 뭉치는 것 같더니 곧 커다랗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규민이었다.

다행히도 멀리 떨어지지 않고 바로 옆으로 도착을 한 것 같았다.

“퀘스트 확인하셨어요?! 하아, 조금 재수 없게 걸렸네요. 만약 15일 안에 찾지 못하면 다시 나갔다 들어와야 할 수도 있겠어요.”

시현은 마치 사냥꾼 같은 의상을 둘러 입고 등 뒤에 허접한 궁을 멘 이규민을 보더니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말이 15일이었지, 상태가 어떨지도 모르는 길드원들을 데리고 돌아가려면 최소 5일은 필요할 텐데….’

돌아가려면 아예 맨 처음 1구역의 입구까지 가야 했기에 실상 주어진 건 10일이라는 애매한 시간뿐이었다.

시현은 일을 한 번에 끝내지 못할 가능성에 무게를 높였다.

그때 옆에 있는 공터로 다시 한번 기운이 응집되는 게 느껴졌다.

이규민이 나타날 때와 똑같은 현상이었기에 시현은 반갑게 고개를 돌렸다가 들고 있던 검을 힘없이 떨어트려야 했다.

떨그렁-

“스승님.”

“아…. 어….”

포니테일로 높이 묶인 머리와 푸른 리본, 그리고 191cm의 몸을 휘감고 있는 치마와 스태프.

태운은 전형적인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 속 여 마법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

노출도에 따라 능력치가 변경된다는 우스갯소리에 따르면 딱히 좋은 의상이라 볼 순 없겠지만 물론 그런 게 아니더라도 제겐 너무 파격적인 광경이었다.

“이게, 이게 무슨….”

“음…. 일단 제 눈앞에 보이는 걸 보니 저는 마법사? 라고 하는군요.”

결국 시현은 태운의 태평한 말소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입을 크게 벌린 채 멍하니 그를 바라만 보아야 했다.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시현의 시선이 연태운의 얼굴 위에 머물다가 점점 내려갔다.

그리고 허벅지까지 트여 있는 치마에 닿았을 때는 결국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리고 말았다.

‘씨발. 게이트 새끼! 이이…. 미친놈! 이거 의지 있는 거 아니야?’

아무래도 너무 수상했다. 결국 고개를 휙 돌려서 얼굴을 반쯤 가린 시현은 속으로 연신 욕설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어후… 태운 님 얼굴에 그래도 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조금 힘드네요.”

곧바로 규민의 말이 이어졌지만, 시현은 제가 떨군 검을 주섬주섬 주운 다음 멍하니 눈앞에 있는 나무를 바라볼 뿐이었다.

‘뭐, 뭐라고 해야…. 괜찮다? 예쁘다?’

태운은 반쯤 고장 난 것처럼 구는 시현의 붉어진 뒷덜미를 유심히 보다가 입꼬리를 말아 올려 미소를 짓고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맞잡고 지긋이 내려다봤다.

“저 조금 창피한데….”

“어어??”

“별로예요?”

“아니! 전혀!”

평소 시끄러운 걸 그렇게 싫어한다고 하던 시현이 최근 들어 가장 큰 목소리로 극구 부인했다.

오히려 조금 위축된 듯한 몸짓과 조금 울상인 얼굴까지 너무 예뻐서 문제였….

‘아니. 이게 아니라. 정시현 미친놈아.’

시현은 반쯤 영혼이 나간 것처럼 입을 어물대다가 급발진하며 주먹으로 머리를 냅다 내리쳤다.

‘아윽. 너무 세게 때렸나.’

그래도 나름 제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에 다시 한번 손을 움직이려던 시현은 곧바로 태운의 손에 휘감겨 얌전히 서 있어야만 했다.

씨발, 나도 모르겠다.

헌터들을 구하고 자시고 머릿속을 강타한 충격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시현은 어색하게 내려앉은 정적도 알아채지 못하고 그새 틈 없이 제 몸을 휘감고 있는 태운의 등을 기계처럼 쓸어내려야만 했다.

후웅-

그때 뒤늦게서야 또 다른 기운의 응집이 느껴졌다. 시현은 멍하니 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태운을 밀어 냈다.

“아, 다른 사람들도 왔나 보다. 가자, 태운아.”

“…예.”

대답은 조금의 간격을 두고 흘러나왔다. 그러나 시현은 저 앞에서 걸어오는 유준과 일행의 모습에 집중하느라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

시현은 유준과 함께 온 글로리 길드원인 차정훈까지 나란히 앉혀 놓고 상황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유준이는 음유 시인, 규민 씨는 사냥꾼, 태운이는 마법사, 정훈 씨는 대장장이라는 말씀이시죠….”

이게 대체 무슨 좆같은 조합일까.

시현은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바닥을 뚫어질 듯 노려보며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어디 한번 엿이나 먹어 보라는 행패에 지나지 않다는 결론뿐이었다.

“형님! 그래도 스킬이랑 능력치는 그대로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 그래요?”

그러나 곧 들려온 규민의 말에 시현은 잔뜩 구겨진 미간을 조금이나마 펼 수가 있었다.

그의 말대로 퀘스트창에 뜬 건 게이트 안에서 명목상으로 부여된 역할인 것 같았고 기존의 클래스나 기술은 딱히 달라지진 않은 것 같았다.

그것에 겨우 한시름 놓은 시현은 그 외에도 여전히 불친절한 퀘스트 내용을 훑으며 다시 한번 한숨을 내뱉었다.

“일단 유준아. 그럼 나침반 좀 확인해 볼래?”

“네! [analyse]”

유준은 시현의 말에 제 손에 쥐어진 바늘이 없는 나침반을 집중해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일명 ‘욕심쟁이 나침반’.

탐색이나 분석에 관련된 스킬이 있는 자들만 확인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기존에 등록해 놓은 아이템의 기운을 향해 방향을 알리는 기능이 붙어 있는 물건이었다.

당연히 나침반에는 라이프 워치가 등록되어 있었고 이 또한 헌터들이 자주 쓰는 방법 중 하나였다.

물론 언론에 나오진 않았어도, 그동안 몇 번이나 구조대가 실종돼 효과는 미미해보였지만 말이다.

“방향은 동남쪽이에요. 그런데 희미해요….”

그리고 잠시 후 미간을 좁히며 집중하던 유준이 작게 식은땀을 흘리며 나침반이 가리킨 방향으로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희미하다…?’

그건 꽤나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다는 얘기였다.

그나마 10개가 다 멀쩡하다는 것에 한시름 놓은 시현은 작게 혀를 차고는 입을 열었다.

“일단, 방향은 정해졌고 뭐 따로 더 필요한 게 있을까요?”

시현은 고생했다며 유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는 규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규민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보급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일단 이곳에서 먹을 음식과 기본적인 야영 물품을 구해야 합니다. 외부 물건은 가지고 들어오는 게 무척 까다로워서요.”

“그래서 내 짐이 죄다 사라진 거였군요….”

“아? 말씀을 안 드렸군요. 그래도 게이트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거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시현은 규민의 말에 자잘하게 챙겨 왔던 물건들을 떠올렸다.

작은 주머니 안에는 태운에게 먹일 영양제와 유난히 잘 먹었던 초콜릿 과자, 립밤, 로션 등등이 들어 있었다.

나름 전날부터 고심해서 챙겨 온 것이라 조금 아쉬웠지만, 빙긋 웃으며 저를 바라보는 태운이를 보고 금방 미련을 버릴 수 있었다.

물론 얼굴 아래로는 절대 보지 않았다. 사실 빵실한 리본이 조금 위기긴 했지만 시현은 금방 이겨 내고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안력을 돋워서 주변을 슥 훑었다.

‘저건 도시가 있다는 흔적이군.’

아스팔트 같은 건 아니었지만 꽤나 단단하게 다져진 아주 넓은 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한두 개씩 마차가 지나다니는 게 아무래도 저 길을 따라가면 도시가 나올 것 같았다.

“저 앞에 도시가 있겠군요.”

“예? 어디요?”

“아….”

그러나 태운 말고는 시현의 말을 다들 한 번에 알아듣질 못했다. 그제야 시현은 보통 인간의 시력을 떠올리고 작게 침음을 냈다.

그동안 늘 옆에 태운이를 데리고 다녔더니 이 정도의 시야 공유는 당연했던지라 일반인에 가까운 이들의 입장을 생각하지 못했다.

시현은 작게 혀를 차며 무리의 앞에 섰다.

태운은 절대로 제 옆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고 다른 이들은 저 도시가 보이지 않았으니 결국 제일 앞은 시현의 차지였다.

“일단 갑시다.”

“예! 저곳에서 단단히 준비해 가면 되겠군요!”

총 5명의 인원이 천천히 작게 난 오솔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시현은 아직은 평화로운 주변을 한번 훑어 확인하고 생각에 잠겨 들었다.

‘내가 그래도 나름 판타지 소설 여럿 읽은 짬밥이 있으니까.’

우리가 용병단이라면 어찌 됐듯 이곳에 용병 길드도 있다는 뜻일 테고 그렇다면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에 대한 지역 정보도 쉽게 접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자세한 계획은 세우지 못했지만 그래도 자신은 있었다. 그만큼 저와 태운의 능력에 확신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딴 상황은 전혀 생각 못 했지… 하아….’

그러나 잠시 후 시현은 폭 고개를 숙이고 세상 침울한 모습으로 한껏 어깨를 움츠리고 있는 태운을 도닥이며 더러운 뒷골목에 멍하니 선 채로 한숨을 푹푹 내쉬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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