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그러나 시현은 진짜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얼굴을 한 채 손을 들어 올려 휘휘 내저었다.
“너 헛소리하지 말고 걍 가라.”
“야, 이 누님 그런 데에 편견 없다, 시현아.”
“아오, 꺼져!!!”
“안 그래도 가려고 그랬거든? 쑥스러워하긴.”
그러나 하정은 시현의 불같은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약간의 장난기를 담으며 능글맞게 대답을 해 왔다.
똑똑.
그때, 방을 나누고 있던 문에서 작게 노크 소리가 들려오더니 소리 없이 열리기 시작했다.
계속 투덕거리던 시현과 하정은 소리와 함께 딱 입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문가를 바라봤다.
“저, 스승님…?”
“어, 왜??”
스승님? 하정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다시 시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그새 조금 풀어져서 환해진 얼굴을 보며 작게 혀를 차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니긴 개뿔.
“안 나오셔서요.”
태운은 문을 열긴 했지만 들어오진 않고 문가에 서서 머리만 슬쩍 내민 채 빙긋 웃고 있었다. 그러자 기울어진 어깨를 타고 결 좋은 까만 머리가 사르륵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자 저절로 표정이 풀리고 웃음이 나왔다. 예의 있게 문가에 서서 허락 없이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 제자가 무척 기특했다.
‘그래, 일단 밥부터.’
“와 정시현. 어우, 소름 돋아.”
“야…. 애 앞에서 말조심해라….”
그러나 시현은 옆에서 터져 나온 하정의 말에 다시 미간을 찡그리고 고개를 휘돌려서 아주 작게 경고의 말을 날려야 했다.
사실 아무리 음성을 줄여도 태운의 귀에는 다 들어가겠지만, 시현은 정말 진지하게 하정을 닦달해 대고 있었다.
‘애는 무슨. 저렇게 집채만 한 애가 어딨냐.’
나름 어려 보이긴 했으나 누가 봐도 절대 애로는 안 보이는 시커멓게 큰 남자를 애 취급 하는 정시현의 태도가 하정은 어이없었다.
그러나 그런 취급이 당연하다는 듯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그 ‘애’라는 남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아까와는 달리 이상하게 호의적인 빛을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흘깃 보고 소름 돋은 팔을 슥 쓸어내렸다.
“야, 하여튼. 나 갈 거니까 뭐 궁금한 거 있으면 연락해라.”
“아, 어, 고맙다. 아, 너 시간 되면 밥이라도 먹고 갈래?”
내가? 이 둘 사이에서? 하정은 시현의 말을 한 귀로 듣고 재빨리 한 귀로 흘려보냈다.
“됐다. 간다.”
그리고 무슨 얼굴이라도 갈아 끼우는 것처럼 휙휙 바뀌는 시현의 태도에 짜게 식은 얼굴을 하며 가져온 서류를 내던지듯 소파 위에 내려놓고 빠르게 호텔 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시현은 그런 하정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태운에게로 다가갔다.
“배고프지?”
“조금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저는 스승님이랑 함께면 다 괜찮아요.”
뭐부터 먹여야 할까.
시현은 순종적인 제자의 대답에 조금 들떠서 흐뭇하게 웃으며 태운의 손을 덥석 잡고 밖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잠시 후 시현은 제 실책을 인정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하정의 반응이 대단치 않아서 잠시 잊었는데 우리 애 얼굴이 조금 심각하게 잘생겼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은 참이었다.
로비에 내려오자마자 무서울 정도로 사방에서 꽂혀 오는 시선과 수군거림에 시현은 등 뒤로 식은땀을 한 줄기 흘리며 모자와 후드를 다시 한번 고쳐 썼다.
그러나 이 부담스러운 상황에도 속에서 작게 피어오르는 뿌듯함에 시현은 조금 가슴을 펴고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그래. 이런데 무슨. 이하정은 괜히 헛소리만 하고 말이야.’
그때 생각에 잠겨 있던 시현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가깝게 울려 왔다.
“스승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으억!”
시현이 기겁해서 고개를 돌렸다가 또 한 뼘 거리에 가까이 위치한 희멀건 얼굴에 다시 한번 배로 기겁하며 펄쩍 뛰며 뒤로 물러서야 했다.
“아니, 그냥 뭐 먹을까 고민했지.”
태운은 제 시선을 은근히 피하며 얼버무리는 시현을 보며 순간 얼굴을 굳혔다가 재빠르게 표정을 고치고 시현의 옷자락을 작게 잡았다.
“저 손잡아 주세요. 불안해요….”
“아…. 미안, 내가 생각을 못 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죄송해요.”
제 후드 끝자락을 조심스럽게 잡아 오는 손길에 시현은 입술을 작게 깨물며 태운의 손을 잡고 어깨를 토닥였다.
결국 자신 때문이었다. 시현은 점점 침울해지려고 하는 태운의 얼굴에 잠시 생각을 하다가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 제가 쓰고 있던 검은색 모자를 벗어서 태운에게 씌웠다.
“이거라도 쓰면 좀 괜찮을 거야.”
제가 알기로는 시야를 조금 제한하면 안정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던 것 같았다.
시현은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도 생각 안 나는 고리짝 기억을 꺼내서 열심히 연태운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스승님은요?”
“어? 나야 괜찮지!”
순간 태운의 표정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자꾸 저를 두고서 딴생각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거지 얼굴을 드러내길 바란 게 아니었다.
스승에 대해 수군거리거나 은근히 시선을 던지는 것들이 벌써 제 감각에 걸려들었다.
태운은 저 불온한 것들의 눈알을 뽑고 싶었다.
연태운은 충동적으로 내기를 손으로 모으려다가 걱정 어린 얼굴로 괜찮냐고 물어 오는 시현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아….’
절로 한숨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결국 태운은 주변을 둘러보며 하나하나 살기를 쏘아 눈길을 돌리게 하는 걸로 마무리했다.
물론 제 살기를 뒤집어쓴 자들이 게거품을 물고 쓰러지든 속이 뒤집혀 게워 내든 알 바 아니었다. 눈을 뽑지 않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할 테니.
태운은 은근히 주변 소음을 옅게 차단하며 흐트러진 시현의 갈색빛 머리를 슬쩍 만지고 후드를 잡아 푹 뒤집어씌웠다.
“하하, 뭐야.”
그러자 시현은 조금 놀란 듯 눈꺼풀을 잠시 치켜떴지만 결국 씩 웃어 보이며 제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시원하게 호선을 그리는 저 미소는 봐도 봐도 눈이 부셨다. 그러나 태운은 빤히 시현의 입술을 보다가 얌전히 시선을 돌렸다.
***
치이이익.
시현은 하얀색의 지방과 분홍색의 살코기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삼겹살을 들어서 불판 위로 올리는 중이었다.
태운이에게 뭘 먹고 싶냐고 물어보긴 했지만, 이곳의 음식 문화를 모르는 아이가 선뜻 대답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사실 약간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었다.
자신에게 게임에서 10년간 지내는 동안 가장 먹고 싶은 게 뭐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이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곳에서도 돼지고기를 구워 먹을 순 있었다. 하지만 쌈장과 구워 먹는 김치, 김치찌개의 조합은 절대 맛볼 수 없는 것이었다.
‘태운이도 맛있어했으면 좋겠다.’
시현의 설명으로 한국 음식과 비슷한 음식들을 해 먹어 보긴 했지만 어쨌든 진짜 음식은 처음이지 않나.
시현은 조금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잘 구워진 고기를 하나 집은 뒤 쌈장을 찍어 앞접시 위에 살포시 올려놨다.
“빨리 먹어 봐.”
태운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빤히 바라보는 시현을 슬쩍 곁눈질한 뒤 천천히 입 안으로 고기 조각을 집어넣었다.
“맛있다.”
“맛있어?! 진짜?”
“예. 맛있습니다.”
연신 입술을 오물대며 고기를 씹는 데 집중한 태운을 보던 시현은 기다렸다는 듯 열심히 쌈을 싸서 제 입으로 단번에 집어넣었다.
입 안을 어지럽히는 감칠맛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 이 맛이지. 술 당긴다. 하.’
“그건 뭔가요?”
“어?! 뭐? 쌈?”
그때 한창 삼겹살의 맛을 만끽하며 술을 시킬까 말까 고민하던 시현에게 태운은 궁금하다는 듯 물어 왔다. 그러자 시현은 신나서 다시 쌈을 싸기 시작했다. 빨리 태운이에게도 이 맛을 보여 주고 싶었다.
“이거 쌈이라는 건데 한입에 먹어야 해. 자, 아 해 봐.”
그러자 태운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얌전하게 입을 벌리고 시현이 먹여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 더 애가 된 것 같았지만 어렸을 때 기억도 나고 괜히 기분이 뭉글뭉글 풀어졌다.
‘하긴 20살이면 아직 애기지 뭐.’
시태운은 눈을 조금 동그랗게 뜨고 열심히 입을 움직였다. 시현은 그런 태운의 모습을 보며 고기를 먹을 생각도 못 하고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턱을 괴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어? 그냥 잘 먹어서.”
태운은 잠시 시현을 빤히 바라보더니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게 접고는 빙긋 웃으며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시현의 손을 잡았다.
“제가 예뻐요?”
“어, 예쁘지.”
시현은 말로 꺼내지도 않았는데 다 안다는 듯 당연하게 물어 오는 태운에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하고 슬쩍 시선을 피했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때 시선을 피한다고 돌린 방향에 있던 텔레비전에서 급보라면서 무언가 복잡하게 이뤄지고 있는 담화가 흘러나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번 신의 광산 4번째 구역에 진입했던 글로리 길드 A팀 연락이 두절됐다는 소식입니다. 이번에 벌써 세 번째인데요. 결국 4번째 구역은 정복할 수 없는 건지 게이트 전문가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흐음…. 글로리 길드? 어디서 많이 들어 보던 이름인데.’
잠시 화면을 보던 시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휘휘 내젓고 저를 바라보고 있는 태운에게 다시 집중했다. 지금 제일 우선은 태운이었다.
그러나 시현이 태운을 챙기겠다고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입가로 어설프게 만든 쌈이 닿아 왔다.
“음?”
“드세요.”
시현이 잠시 멈칫했다가 작게 웃으며 입술을 천천히 벌려 크게 싼 쌈을 힘겹게 입 안으로 욱여넣었다.
자신에겐 조금 버겁긴 했지만, 제자가 만들어 준 건데 너무 크다고 거절할 순 없었다. 그러나 태운은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애쓰고 있는 시현을 웃지도 않고 빤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입이 작네.
태운은 잠시간 시현을 빤히 바라보다가 곧 작게 흥얼거리며 새로운 쌈을 싸기 시작했다.
“태운아, 네가 많이 먹어야지.”
“네. 스승님. 아 하세요.”
그러나 시현의 말은 덧없이 공중으로 흩어지고 새로운 쌈이 다시 한번 입에 닿아 왔다.
시현은 갑자기 뭔가 조금 신이 나 보이는 제자를 보며 웃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이곳에 와서 처음 보는 들뜬 모습이라 시현은 조금 흐뭇하게 웃으며 얌전히 태운이 입에 넣어 주는 대로 받아 삼켰다.
지이이잉-
그때 조용하게 잠들어 있던 핸드폰이 요란하게 소리를 내며 진동음을 냈다.
-이규민
‘아 맞아. 이규민 씨가 말했던 길드 이름이었어. 글로리 길드.’
갑자기 이상한 불안감이 마음속에 얕게 차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