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시현은 집에서 나온 뒤 만난 헌터부 직원과 간단히 신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뒤 옮겨 온 호텔 침대에 널브러져 조용히 하정에게 통화를 거는 중이었다.
무림이 아니더라도 어디나 정보를 다루는 곳은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단순한 인터넷 검색 따위로는 당연하게도 자세히 알아볼 수 없었고, 있더라도 지금 제 수준에선 접선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 자신에게 이러한 정보를 알아볼 수 있을 만한 루트는 두 가지였다. 헌터 협회에서 일하는 이하정, LK그룹 차남 이규민.
그러나 범죄 쪽이라면 아무래도 직접 출동까지 한 협회 쪽이 더 잘 알겠지 싶어 하정에게 연락을 한 것이었다.
“여보세요.”
-어, 미안하다. 바빠서 먼저 연락한다는 걸 까먹었네.
“아니야. 너 바쁜 거 아는데 뭐. 근데 우리 집 누가 박살 냈는지 아는 거 없어?”
게다가 이미 관련해서 문자가 하나 와 있기도 했었고. 역시나 자초지종을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대화가 수월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하아…. 이게 말하자면 긴데…. 너 지금 어디냐.
“나 지금 호텔이야.”
-… 네가 호텔?
“왜.”
-우리 집에 얹혀 지내겠다고 할 줄 알았더니…. 뭐, 어쨌든 이번 일은 전화로 짧게 말하고 끝낼 게 아니야. 일단 지금 갈게. 어차피 나 외근 나와 있어서 곧 시간 날 것 같다. 톡으로 장소 찍어 보내라.
“그래.”
시현은 무던하게 대답하며 전화를 끄고 한참을 화면을 바라본 채 생각에 빠져들었다.
하정의 말을 들어 보니 뭔가 간단한 일 같진 않아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최근 들어 자신이 원한을 쌓은 상대라곤 그 장명한뿐이었는데 그것도 집을 박살 낼 정도의 원한이라기엔 너무나 빈약했다.
대체 뭔데.
“스승님.”
“어. 왜?”
“그냥요. 좋아서요.”
그때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태운이 몸을 돌려 마주 보고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높게 솟은 빌딩들과 빛을 받아 반짝이는 한강이 연태운의 배경이 되어 마치 그림 같은 광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괜히 기분 이상하네.’
시현이 태운을 게이트에서 데리고 나와서 보여 준 거라곤 유치하게 시비 거는 또라이들과 다 터져 박살 난 집뿐이었기에 조금 무리하더라도 처음엔 제대로 된 곳에서 지내게 해 주고 싶었다.
비록 통장은 급속도로 가벼워지고 있었지만 들어 보니 헌터가 되면 돈도 꽤 많이 벌 수 있다고 하는 것 같았고 어떻게든 솟아날 구멍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안 되면 진짜 길드라도 들어가서 죽어라 일하면 되지 뭐.’
시현은 얼마 전까지도 절대 길드 같은 귀찮은 건 할 생각 없다 했던 다짐을 깔끔하게 지워 버리고 아직도 이 세상에 멀쩡하게 서 있는 태운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의욕을 불태웠다.
“피곤하실 텐데 안마라도 해 드릴까요?”
그리고 때마침 태운이 예전처럼 다정하게 말을 걸어왔다.
시현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운이 해 주는 안마는 거의 추궁과혈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효과가 무척이나 좋았기에 시현이 가끔 힘든 하루를 끝마치고 나면 해 달라고 하던 것이었다.
그곳을 떠나오고 나선 다신 받을 일 없다고 여겼는데 익숙하게 물어 오는 질문이 새삼스러웠다.
“음…. 그런데 스승님 몸이 약해지셔서 힘을 조금 빼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맞아. 참, 내가 말해 준다고 하고 얘길 안 해 줬구나.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시현은 그동안의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 입을 뗐다가 이걸 뭐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엄두가 안 나 조금 머뭇댔다.
너는 게임 캐릭터였다?
아니 저 애가 애초에 게임이란걸 알까도 문제였다.
생각은 하면 할수록 복잡하게 꼬여 갔다. 시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10년간의 사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오해 없이 이해시킬 수 있을까 고민했다.
“일단 나는 여기서 그쪽으로 넘어간 거고…. 그러다 보니 나이가 어떻게 좀 바뀐 건데….”
그러나 태운은 딱히 궁금하지 않은지 자연스럽게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골똘히 고민하고 있던 시현을 부드럽게 밀어 눕히면서 빙긋 미소 지었다.
“자세한 건 나중에 알려 주세요.”
“어어…. 그럴까?”
시현은 마치 어려운 과제의 제출 일자가 미뤄진 것처럼 화색이 도는 얼굴로 냉큼 대답하곤 돌아누웠다.
사실 뭘 어떻게 돌려 말해도 그 모든 게 남이 시킨 거고, 자신 또한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는 팩트는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것을 곧이곧대로 말하기엔 분명 오해를 할 것 같았기에 이 말을 하고 나서 돌아올 아이의 반응이 두렵기도 했다.
그때 시현의 잡생각을 날려 버리듯 하얗고 큰 손이 시현의 등위에 내려앉았다.
태운의 손은 검을 쓰는 자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끈하고 곧게 뻗어 있었다. 물론 내공 위주의 무공을 쓰는 무림인들은 원래도 우락부락하지 않은 게 보편적이었지만 태운은 그중 더욱 하얗고 반질반질한 조약돌 같았다.
‘그때 환골탈태 같은 이상한 현상 때문인가?’
정확히 말하면 제가 소설로 봐 왔던 뼈가 막 뒤틀리며 새로 자리를 잡고 하는 전형적인 환골탈태의 현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원래도 허옇고 말랑한 애가 언제 한번 며칠간 심하게 앓고 나더니 그나마 얼마 있지도 않던 노폐물을 다 쏟아 내고 며칠간 기절했다가 깨어났던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정말 태운의 피부는 마치 빛이라도 나는 것처럼 변화했다.
그렇게 멍하니 예전 일을 떠올리다가 한참을 등 위에 올려져만 있던 태운의 손이 느릿하게 날개뼈를 훑고 내려가자 시현이 머릿속에 수십 개의 물음표를 띄우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이게 뭔가 생각을 하기 전에 마치 시현이 어디가 결리고 뻐근하다는 걸 안다는 듯 뭉친 근육을 쏙쏙 뽑아 누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온몸이 노곤노곤 흐물하게 풀렸다.
‘아…. 극락이다. 이거 돈 받고 해 주면 금방 재벌 될 수도….’
시현은 덧없는 상상을 하며 속으로 조금 큭큭댔다. 태운이 마사지사가 되어 누군가를 열심히 마사지해 주는 게 떠올라 자꾸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갑자기 꾹꾹 누르던 손이 뭔가 슬슬 풀어지더니 또 평소와는 다르게 등짝을 느릿느릿 훑기 시작했다.
“응?”
뭔가 좀….
“왜요? 스승님 잠시 허리 좀 들어 보세요.”
“어어?”
순간 태운의 커다란 손이 아랫배로 쑥 들어와 감싸더니 슬쩍 힘주어 누르고는 시현이 말을 잇기도 전에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말려 올라간 티셔츠 때문에 드러난 맨 허리 위에 손끝을 올리고 지그시 눌러 내렸다.
그 순간 찌릿한 감각과 함께 시현의 몸이 저절로 움찔대며 튀어 올랐다.
시현은 순간 기겁하곤 벌떡 일어나서 잔뜩 당황한 얼굴로 재빨리 침대 밑으로 내려섰다.
“잠, 잠깐만.”
씨발. 진짜 이상한데?!
“…몇 달 떨어져 있었다고 이젠 이런 것도 잘하지 못하는가 봅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아니! 아니야! 그게 아니라!”
시현은 그새 무릎을 꿇고 어깨를 축 내린 채 우물쭈물하는 태운을 보며 속으로 저 자신을 욕하고 자책했다.
“아니면요?”
그리고 조금 민망한 얼굴을 채 숨기지도 못하던 시현이 턱을 긁적이며 머뭇거리자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꽂고 있던 태운이 고개를 휙 들어 올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말갛게 웃어 보였다.
“그…. 아니, 그게.”
여전히 무릎을 꿇고 저를 빤히 올려다보는 태운에 시현은 더듬더듬 홀린 듯 입을 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이 애매한 분위기를 깨트리는 전화 진동 소리가 객실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시현은 꿈에서 깨어나듯 득달같이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들고 빠르게 방을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태운이와의 실력 차가 커져서 몸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 같았다.
“아, 안마는 이쯤 하면 되겠다. 고마워, 태운아!”
태운은 거의 도망치듯 사라지는 제 스승의 뒷모습을 끝까지 보다가 기척마저 멀어졌을 때야 손을 들어 올려 손아귀를 빤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단하면서 부드러운 몸과 피부의 촉감을 세세하게 떠올렸다. 적당히 건조한 질감과 여전히 탄력 있는 근육, 그리고 척추를 타고 내려와 움푹 팬 허리 부근쯤.
“아아….”
낮은 한숨이 모양 좋은 입가를 비집고 흘러나오며 허연 목덜미가 순간 붉게 물들었다.
태운은 손을 모아 쥐며 주체 없이 흔들리는 입가를 가리고 몸을 숙였다.
***
시현은 빠르게 호텔 방문을 닫고 조용한 복도로 나와 계속해서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지금 이게 누가 됐든 곤란한 상황에서 구해 준 은혜를 갚겠다고 생각하며 화면을 확인했다.
[쩡]
“어! 하정아!”
-뭐야, 왜 이래? 나, 거의 다 왔어. 호실 알려 줘.
“어? 안까지 들어오게?”
-밖은 사람들 너무 많아서 안 돼.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조금 높인 시현은 하정의 대답을 들으며 조금 곤란하단 얼굴로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이해는 갔다. 그때 카페에 잠시 앉아만 있는데도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핸드폰 기종이 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사진을 찍혔으니까.
그러나 방에 있을 태운을 또 뭐라고 소개해야 하나 머리가 조금 복잡했다.
워낙 제 인간관계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애라 무슨 말을 해도 먹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아, 어디냐고!!
“… 2103호….”
-끊는다.
시현은 제가 대답할 새도 없이 뚝 끊어져 신호음을 내는 핸드폰을 천천히 내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단은 우리 집을 그 꼴로 만든 그 개새끼들 정보가 급했고 하정이 꼬치꼬치 캐묻는 성격도 아니니 대강 넘어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한 채 복도에서 서성거리던 시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오는 작은 발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저 앞으로 보이는 코너에서 호리호리한 인영이 걸어 들어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