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너무 보자마자 잔소리만 한 것 같네.’
게다가 제가 살던 곳을 배경 삼아 서 있는 연태운이라니. 시현은 괜히 벅찬 마음에 시큰해지는 코끝을 손으로 쓱 문지르며 빠르게 대화 주제를 바꿨다.
“일단 그건 됐고, 뭐 다른 거 궁금한 건 없어?”
“여기가 스승님이 거처하는 곳입니까?”
사실 태운이에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나 막막했다.
그러나 갑자기 치고 들어온 예상치 못한 질문에 시현은 벙찐 채 한 박자를 놓치고 느릿하게 대답해야 했다.
“아니. 임시로. 아마 내일이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애초에 F급 게이트는 빠르면 하루, 길어 봤자 이삼 일이면 클리어할 수 있는 난이도였다. 그런데 거기에 일주일을 들어가 있었으니 게이트 공략 후 잠시 쉬라고 준 시간은 그대로 날아간 상태였다.
물론 시현에겐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내일이면 이 낯선 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테고 태운이를 오랫동안 숨기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그렇군요. 스승님이 지내기엔 너무 허름하여 조금 걱정됐습니다.”
“아….”
그, 원래 집도 딱히 대단히 휘황찬란하진 않은데….
시현은 순간 제가 나올 때 집을 치우고 나왔나 애써 기억을 더듬으며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늦어서 이불이랑 옷을 정리 안 하고 나온 것 같았는데.’
미간을 좁히며 고심하던 시현은 그 집 안을 제자에게 보여 준다고 생각하니 뭔가 벌써 민망해지려고 했다.
그때 빤히 시현을 바라보던 태운이 천천히 붉은 입술을 열고 나지막하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스승님.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묻진 않겠습니다. 스승님도 사정이 있으셨겠지요. 그렇지만 이제는 제발 그러지 말아 주세요. 피범벅이 된 스승님의 차가운 시체를 안고 며칠을 눈물로 지새웠습니다…. 저도 따라 죽고 싶었어요.”
마치 죄책감이라도 느끼라는 듯 적나라한 단어들의 나열에 시현은 당연하게도 큰 죄라도 진 사람처럼 어쩔 줄을 몰라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리고 마침표처럼 흘러내리는 투명한 눈물에 결국 세상 잃은 표정을 지으며 홀린 듯이 손을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 미친 시스템 새끼가 결국 일을 저질렀구나.’
시현도 사실 혹시나 하긴 했었다. 시스템은 어떻게든 태운이를 괴롭게 만들고 싶어 했으니 빨리 제 몸을 치워 달라고 해도 그 말을 귓등으로 듣지 않았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지만 설마 진짜로 그럴까, 그럴 리가 없다 무의식적으로 피해 왔던 문제였다.
“미, 미안하다. 미안해 태운아.”
도대체 오늘 하루에만 몇 번을 미안하다고 하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러나 정말 미안한 감정이 쉬지 않고 몰아쳤다.
시현이 크게 당황해서 허옇게 질린 채로 말까지 더듬자 태운이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눈물을 한 방울 도르르 흘렸다.
물론 태운은 그게 시현이 원해서 그런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제가 스승의 몸을 차가워질 때까지 방치하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않나.
그러나 저를 아끼는 자애로운 제 스승은 비슷한 일이 있으면 다음에도 또 이런 선택을 할 게 분명했다.
태운은 그가 다신 그런 선택을 할 수 없도록 몇 번이고 각인시켜 주고 싶었다.
당신이 없으면 어차피 나도 없을 거라고.
물론 또 그런다고 해도 멍청히 두고만 볼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다.
“안아 주세요.”
“어어? 이리로 와.”
시현은 얼떨떨하게 제게 안겨 오는 태운의 등을 둘러 안고 토닥였다. 아주 어렸을 때 이후로는 이렇게 안아 달라고 한 적이 없는 아이였는데 정말 크게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래, 나 같아도 태운이가 그랬다면 크게 충격받았을 거야.’
시현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힘겹게 삼키며 힘겨워하는 제 제자를 열심히 위로하려 애썼다.
***
그리고 다음 날 퇴소식.
늘 조용히 지나가던 행사였지만 오늘만큼은 시끄럽게 떠드는 목소리와 이리저리 오가는 시선에 정신없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원인은 어제 있었던 게이트 변화 사건. 바로 시현이 태운을 데리고 나왔던 그 게이트 때문이었다.
자세히 들어 보니 최초 목격자가 그냥도 아니고 처음 보는 색상으로 변했다고 계속 주장한다고 했다.
당연하게도 이리저리 언론이 시끄럽게 떠들어 댔고, 오늘 아침엔 시현이 헌터 테스트를 보고 있다는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된 하정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리고 왜 말도 없이 일을 벌이고 다니냐고 엄청나게 욕을 들어 처먹어야 했다.
“자! 헌터들은 개인의 역량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진 사람들입니다! 부디 그것을 잊지 말아 주세요!”
와글와글 시끄러운 강당 안으로 교육을 담당하던 이가 열심히 설교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이미 줄줄 이어진 하정의 잔소리에 기운이 쪽 빠져 있던 시현도 저 훈화가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끝나면 이제 규민에게 연락을 해서 돈도 받아야 했고 태운이에게 맛있는 것도 먹여야 했다. 순간 입꼬리가 또 주체를 못 하고 계속 움찔거렸다.
그때 누군가 슬금슬금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시현은 곧바로 고개를 돌렸고 흰머리 사이로 동그랗게 떠진 눈과 시선을 마주쳤다.
“어, 유준아.”
“와. 조심히 왔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시현은 아이의 순진한 궁금증에 장난기를 담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냥.”
“아…. 그, 그렇구나….”
그러자 유준이 양손을 마주 잡고 꼬물거리며 머뭇대기 시작했다. 아직은 장난을 쉽게 받아들일 만큼 편해진 건 아닌 것 같았다.
“장난이야. 근데 왜 왔어?”
“아, 저 그거 들었어요. 들어간 게이트에서 문제가 있으셨다면서요.”
“아아 그거. 뭐 나는 진짜 별문제 없었어.”
“사실 너무 걱정했어요….”
유준이 시무룩해져선 작게 속삭이듯 말하자 시현은 피식 웃으며 습관적으로 손을 들어 올려 하얗고 포실한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씨발.”
흠칫.
그때 시끌벅적한 강당에서 아주 작게 들려오는 욕설에 시현은 미간을 좁히고 주변을 돌아봤다.
예민한 시현의 청력으로나마 겨우 들린 목소리였다.
사방은 이미 서로에게 장난스럽게 건네는 비속어와 은어들로 가득했지만 흐릿하게 박혀 왔던 아까 그 욕설은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뭐지?’
그렇게 시현이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이고 있을 때 연태운은 제 눈앞에서 펼쳐진 상황에 치솟는 살심을 억누르며 눈앞의 인간을 빤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이곳 시간으로 고작 두 달 정도였다. 그사이에 또 옆에 이상한 걸 끼고 있는 스승의 모습에 피가 차갑게 식어 내리는 것 같았다.
시현은 과거에도 늘 그랬다.
입으로는 귀찮다고 그러면서 작게는 토끼에서 크게는 북해빙궁의 망나니 새끼까지 쓸데없는 것들을 많이도 주워 왔다.
죽일까.
저 꼬맹이 새끼한테 더 마음을 주기 전에 제거하는 게 아무래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왔다. 시현이 알면 싫어할 것 같다는 예감이었다.
‘… 그래도 내가 마음을 먹고 움직이면 약해진 스승님은 모르겠지.’
검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태운의 몸을 타고 올라왔다.
그때, 마치 태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채기라도 하듯 시현의 무덤덤한 목소리가 어둡게 내리깔린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지루하지? 이따가 맛있는 거 먹자. 오랜만에 내가 실력 발휘한다.}
태운은 점점 무겁게 잠겨 가던 눈을 몇 번 깜빡깜빡하고는 작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스승님이 만든 건 맛없어서 안 돼요. 제가 하겠습니다.}
{윽…. 알겠어.}
그리고 이어진 조금 시무룩한 듯한 목소리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그래, 누구에게도 내보이고 싶지 않을 만큼.
태운은 빨리 앞에서 떠드는 놈의 머리를 날리고 어서 그 집이라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이제 뭐 할 거야?”
“음 모르겠어요. 사실 능력도 그렇고…. 게이트는 들어갈 수나 있을지….”
그러나 유준은 태운의 생각을 알 수 없었기에 망설임 없이 시현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시현은 이 작달막한 아이가 세상 시름 다 안은 채로 한숨을 내쉬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하지만 제 코가 석 자인 시현의 입장에서도 딱히 뾰족한 방법은 없어 그저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방법은 있겠죠…?”
“그래,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더라. 힘들면 형한테 연락해.”
“형은, 꼭 아빠 같아요… 고마워요. 형….”
시현은 순간 멈칫했다가 조금 눈썹 끝을 기울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유준은 안 보이는 곳에서 제 목숨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지도 모르고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단상에서 길게 훈화하던 이가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퇴소식의 끝을 선언했다. 시현은 조금 피곤한 눈을 비비며 벌떡 일어나 밝게 인사하는 유준을 배웅한 뒤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움직이기 위해 잠시 대기했다.
‘이게 헌터증.’
시현은 드디어 제 손에 들어온 헌터증을 복잡하게 바라봤다.
‘겨우 이 플라스틱 쪼가리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한 거라니.’
그래도 그 덕에 태운이를 만났고 들어올 돈도 있으니 오히려 이득이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게다가 성적도 꽤 좋게 나온 듯싶었는데 시현은 제가 조작한 C등급 옆에 쓰인 숫자 1을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대체 뭘 했다고 교육 평가가 1등급이 나왔나 싶었지만, 마지막에 사청린의 입김이 꽤 들어갔을 것 같아 얼핏 이해가 가긴 했다.
‘그래도 이걸로 퉁칠 순 없지.’
시현은 잠시 어떤 걸 얻어 내야 하나 생각하다 헌터증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자 옆에서 기척이 느껴졌고 고개를 돌려도 보이지 않는 인영에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왜, 뭔지 궁금해?}
{예.}
{집에 가서 보여 줄게.}
궁금하면 궁금하다고 올곧게 말해 오는 태운이 너무 귀여웠다. 시현은 괜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입가를 가리며 몰래 미소를 지었다.
“대협!!!”
그때 혼자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시현은 앞으로 들을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고전적인 지칭에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게다가 그건 아주 최근에 들었던 익숙한 목소리였다. 시현은 작게 올라오는 소름에 재빨리 발을 옮기려 몸을 홱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