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시현 씨!”
시현은 게이트를 빠져나오자마자 들려오는 다급한 사청린의 목소리에 번쩍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사청린에게 주의를 돌리기도 전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는 다른 상황을 파악하곤 작게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 또 뭐야.
저 멀리서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는 사람들은 누구 하나를 둘러싸고 취조하듯 언성을 높이고 있었는데 게이트에서 누군가 나오는 것 같아 보이자 동시에 시선을 돌려 득달같이 다가오려 했다.
시현은 빨리 태운이가 따라 나왔는지 확인하고 싶은 조급한 마음을 내리누르며 쓰고 있던 모자를 더 푹 눌러썼다.
“무슨 일인가요?”
“시현 씨! 저희가 안으로 들어간 사이에 게이트 색이 바뀌었었답니다. 버스 기사님이 대기하다가 보고 신고하셨다는데 혹시 시현 씨는 안에서 무슨 일 없으셨나요?”
사청린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잦아들더니 특이점에 관해 물어볼 땐 거의 속삭이듯 말을 하고 있었다.
이해는 갔다.
애초에 진법에 들어가고서 계속 기절해 있었으니 남들이 물어보는 것에 제대로 답을 하기가 곤란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른다고 하기엔 시현이 애써 덮어 준 치부가 드러나는 걸 테니 마음이 급했겠지.
“진짜 별일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하아. 일단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팀원들은 다 깨어나서 버스에 탔으니 시현 씨도 가서 대기 부탁드릴게요.”
“네.”
시현은 조금 급해 보이는 사청린을 보내고 생각에 잠겨 들었다. 게이트 안에서 이상했던 점이라면 사실 너무나도 많았다.
F급에는 맞지 않는 난이도의 진법이라든가, 제 기억에만 있던 마교 배경, 그리고 이상하게 수준 낮은 토인들까지.
하지만 시현은 끝까지 태운의 존재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을 모른 척하며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태운아.}
마음이 급했다.
시현은 빠르게 생각을 털어 내고 저를 따라 나왔을 태운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러나 몇 번에 부름에도 대답은 없었고 혹시 게이트를 통과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튀어나와 시현을 자꾸 조급하게 만들었다.
{태운아?!}
괜찮은 척하던 시현은 아무리 불러도 선뜻 들려오지 않는 태운의 목소리에 사방을 휘휘 돌아보며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연태운!”
“저 뒤에 있습니다.”
그제야 시현의 손 위로 따듯한 촉감이 닿아 왔다. 맞닿는 체온에 불안정하게 뛰던 심장이 빠르게 안정되어 갔다.
시현은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그전까지 한 톨도 느껴지지 않았던 태운의 기척에 집에 가자마자 폐관수련이라도 해야겠다고 진지하게 시기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제발 빨리 대답해 줘. 나 진짜 놀랐어.”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야. 다시 안 그러면 되지. 이제 조심해서 따라와.”
“예, 스승님.”
시현은 고분고분한 태운의 말에 작게 미소를 지으며 저 멀리 대기하는 버스로 발을 옮겼다.
이제는 조용히 숙소에 가서 쉬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시현을 귀찮게 하는 장애물은 아직 하나가 더 남아 있었다.
“진짜 혼자 튀고 싶어 안달이 났나 봐.”
멈칫. 시현이 버스로 오르는 계단에 발을 디뎠을 때, 기다렸단 듯이 배배 꼬인 말들이 들려왔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살면서 만만해 보이게 생겼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없었는데 그렇게 처맞고도 어쩜 한결같이 시비를 걸어 대는지 이제는 조금 신기할 정도였다.
“지금 나한테 말하는 건가?”
“그래, 너 말이야. 팀이라는 건 다 같이 행동해야 하는 거야. 혼자 싸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아무래도 게이트 내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데다가 평가자인 사청린과 따로 대화하는 시현을 보니 배알이 꼴린 것 같았는데 너무 뻔하고 유치한 행동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시현은 그 말을 그대로 장명한에게 돌려주고 싶었지만 좋은 일도 있었고 이런 거에 화를 내면서 기분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진 않아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냈다.
“팀플 끝났다. 조용히 좀 가자. 아니면 너 나 좋아하냐? 왜 이렇게 말을 붙이고 싶어서 안달이 났냐?”
“뭐, 뭐???”
“아, 귓구멍 터지겠네.”
어디선가 잠시 킥킥대는 웃음소리들이 작게 들려오더니 곧 버스 안이 장명훈의 괴성으로 가득 찼다.
시현의 말이 꽤 억울했는지 벌떡 일어나서 쿵쿵대는데 한 마리의 고릴라를 보는 것만 같았다.
시현은 지친다는 듯 작게 한숨을 푹 내쉬고 올 때 앉았던 맨 앞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어린애들이랑 있다고 자신도 애가 되는 기분이었다.
{스승님. 저자를 죽일까요?}
그때 머릿속으로 허스키한 음성이 들려왔다. 시현은 벌써 스산하게 느껴지는 말투에 순간 몸을 흠칫 굳히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그러면 안 돼. 조금만 참아.}
{으음…. 알겠습니다.}
그러자 늘 바로바로 대답하곤 하던 태운이 미묘한 간격을 두고 전음을 해 왔다.
시현은 탐탁지 않아 하는 듯한 태운의 말투에 다시 한번 죽이면 안 된다고 다그치려 했으나 말을 뱉기도 전에 제 손 위로 닿아 오는 감촉에 어깨를 움찔댔다.
비록 두 달 동안 보지 못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게 아주 긴 기간은 아니었다.
제가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스승의 그림자도 밟으면 안 된다고 아주 있는 예의 없는 예의 다 차리더니 급격하게 바뀐 태운의 태도는 시현을 조금 어색하게 만들었다.
‘얘가 아까부터 갑자기 왜 이러지.’
태운이가 15살쯤.
눈만 깜빡하면 아기 죽순처럼 쑥쑥 자라던 때가 있었다. 아마 그때쯤부터였을 거다. 태운이는 갑자기 스승님이라 부르겠다며 괜찮다는 저를 앞에 앉히고 억지로 아홉 번의 절을 하더니 과하게 예를 차리기 시작했다.
물론 쓰다듬는 것 정도의 접촉조차도 당연히 싹 다 금지였고 근처에도 잘 오질 않으니 시현은 이게 사춘기 아이를 둔 부모 마음인가 하며 홀로 서운함을 삼켜야만 했다.
그래도 나중에 가선 그 빡빡하던 규칙도 조금 풀어져서 처음에 무슨 조교인냥 굴던건 많이 없어졌고, 시현도 그것에 금방 익숙해진 참이었다.
그래. 그랬는데, 마치 처음 구해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처럼 돌아간 듯 옆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태운에, 뒤늦게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없는 동안 좀 고생을 많이 했나….’
시현은 제 손등 위에 살포시 올려져 있는 손을 슬쩍 마주 잡고 커튼에 가려져 그림자가 진 옆 좌석을 흘긋 바라봤다.
손이 닿아 있어서 그런지 어렴풋하게 태운의 형체가 보이는 것 같았다.
시현은 창을 보는 척 태운이 위치한 곳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반대로 돌리며 팔걸이에 기대 턱을 괴고 입을 가렸다.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마냥 행복하게만 지내지 못한 것 같아 보이는 태운을 보며 슬퍼야 하는데 조금 기쁜 듯한 제 본심을 깨닫자 곧 옅은 자괴감이 차올랐다.
‘그래도 내가 가자마자 쌩 잊은 건 아닌가 보네. 앞으로 더 잘해 주지 뭐.’
그래도 결국 일은 벌어졌고 시현은 우연히 찾아온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
“자, 다들 아시다시피 여러 문제들 때문에 길게 피드백해 줄 시간은 모자랄 것 같습니다. 모두 수고 많았고 교육 종료까지 푹 쉬시길 바랍니다.”
사청린은 평소처럼 밝게 웃으며 은근슬쩍 자신이 기절해 있느라 모르는 부분을 휙 넘기고 학생들을 들여보냈다.
시현은 그의 심정을 뻔히 알기에 작게 웃으며 모른 척 정해진 숙소로 발을 옮겼고 방의 문을 닫고 나서야 긴장된 마음을 완전히 풀 수 있었다.
“하아….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을….”
시현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쉬자 늘 혼자였던 공간에 다른 이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그것이 착각이 아니란 듯 뒤에서 하얀 팔이 튀어나와 시현을 휘감고 끌어당겼다.
“태운아.”
“예.”
“…좀 놔줄래?”
“싫어요.”
“그래 고맙…. 어?”
“싫습니다.”
시현은 밥 더 먹기 싫다고 투정 부렸던 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 듣는,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태운의 단호한 거절에 멍하게 앞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 아이가 조금 변한 것 같다 확신했다.
‘뭔가 손안에 있던 자식이 막 출가하고 나서는 어른이 됐다고 반항하는 걸 볼 때 이런 기분일까?’
물론 정확히 정의 내릴 순 없었지만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휴…. 뭐 아무렴 어떠냐. 옆에 두고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시현은 괜히 헛기침하며 제 몸통을 꽉 두르고 있는 손을 작게 토닥였다.
“참 태운아, 그런데 이곳에서는 사람을 그렇게 쉽게 죽이면 안 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능력이 없는 자는 어차피 일찍 죽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아까 그자와 같은 자는 민간인도 아닌 데다가 특히나 스승님을 욕보였습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옅은 분노가 깔려 있는 게 태운이 꽤 화가 난 것 같았다. 시현은 작게 안 된다는 듯 머리를 내저으며 고개를 돌려 위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던 붉은 눈이 진정 궁금하다는 듯 거리낌 없이 시선을 마주쳐 왔다.
“그게…. 일단 여기선 안 돼.”
그러니까 육아라곤 전혀 알지도 못하고 그저 사이다패스 소설과 먼치킨 게임에 빠져 있던 과거의 정시현은 윤리와 사회성을 배워야 하는 시기였던 태운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고 말았던 거다.
시현은 제가 잘못된 사고방식을 만들어 준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하아….”
“죄송합니다.”
그 와중에도 시현이 내뱉은 작은 한숨에 잘못이라도 지은 강아지처럼 축 처진 태운은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잘못을 빌었다.
그러자 오히려 시현의 양심이 미친 듯이 찔려 오기 시작했다.
“그게…. 네 잘못은 아니고…. 그럼 일단 죽이기 전에 말부터 좀 들어 볼까? 여기는, 그러니까 사람들을 쉽게 죽이지 못하는 그런 곳이거든.”
“… 그렇습니까.”
물론 그러기엔 서로 죽이려던 놈들을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보긴 했지만, 그것들은 기억 속에서 재빨리 지우고는 방긋 웃어 보였다.
교육을 위해선 가끔 거짓말도 필요한 법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시현은 조금 곤란해졌다.
저를 두르고 있는 손에 힘이 빠져 행동은 자유로워졌지만, 여전히 울상을 짓고 손을 꿈질거리는 커다란 제자의 모습에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