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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자 10년 만에 돌아왔더니 헌터란다-22화 (22/146)

#22

“스승님. 아무래도 저희들의 적 같습니다.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군요.”

그때 근처에 몸을 숨기고 있던 태운이 시현의 단단한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귓가에 가까이 입술을 붙이고 작게 속삭였다.

낮게 내려앉은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자 시현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발검했다.

태운의 말이 맞았다. 그러나 전에 만났던 흑살대와는 다르게 생기가 없는 몸짓들이 마치 혈강시라도 눈앞에 두고 있는 것만 같아 조금 걱정이 됐다.

저것들이 정말 혈강시의 일종이라면 검기가 둘리지 않은 검으로는 웬만하면 베이지 않았기에 지금 시현의 남은 내공으로는 상대하기 까다로울 것 같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짜내야지. 어쩌겠나.

“뭔지 모르겠지만 빨리 처리해야겠다.”

“저도 돕겠습니다.”

평소 듣던 허스키한 미성이 아닌 조금 거칠어진 목소리가 느릿하게 귓속을 파고들자 시현은 그제야 제가 태운과 굉장히 가까이 닿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시현은 순간 저 앞에 있는 것들을 잊고 급하게 옆으로 한 발 떨어졌다.

뭐였지…?

시현은 간지러운 귓가를 벅벅 문지르고 검을 들어 올린 채 말없이 앞으로 뛰어나갔다.

“….”

그리고 순식간에 혼자 남은 태운이 가라앉은 눈으로 저릿한 손아귀를 빤히 바라보다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표정을 수 초 만에 빠르게 풀어낸 태운은 허리에 매여 있는 흑색의 검을 빠르게 뽑아 들고 시현의 뒤를 따랐다.

스걱-

평범한 철검이 쉬지 않고 수직으로 또는 대각선으로 휘둘러지며 흑의를 입은 저 이상한 것들을 차례차례 베어 냈다.

처음 긴장했던 것과는 다르게 검기를 뽑아내지 않아도 이것들은 쉽게 베어 쓰러졌고, 감각조차 피륙이 아닌 진흙으로 만든 인형을 베는 듯한 느낌뿐이었다.

시현은 생각보다 확 낮아진 난이도에 조금 불안해졌지만, 일단은 눈앞의 것부터 처리하자 마음먹으며 바쁘게 움직였다.

사악.

그때 근처에서 뭉툭했던 제 검결과는 다른 아주 예리한 날에 종이가 베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시현은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시선을 돌렸고 태운이 수십의 진흙 인형을 손쉽게 베어 넘기는 걸 확인했다.

‘와, 능력치고 뭐고 여전하네.’

사실 아직도 태운이와 만났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분명 저는 게임을 하다가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이상한 퀘스트까지 받아 가며 그것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 게임의 주인공이 게이트에서 나타나다니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비록 처음엔 보자마자 기뻐서 눈물을 흘리긴 했지만 뒤늦게 떠오르는 현실적인 부분에 자꾸만 의문이 쌓이고 있었다.

“으아, 시발 뭐래냐.”

시현은 퍼뜩 든 생각에 저 혼자 놀라 욕설을 읊조리고는 더욱 빠르게 검을 놀리기 시작했다.

맘 같아선 당장이라도 저 착한 애를 상대로 의심을 한 제 머리통을 퍽퍽 때리고 싶었다.

“스승님. 이들은 다 쓰러진 것 같습니다만….”

그때 시현이 한 개의 진흙 인형을 화풀이하듯 난도질하고 있을 때, 등 뒤에서 태운이 조금 곤란하단 목소리를 말을 건네 왔다.

“어어??!”

아, 젠장.

너무 민망했다. 이상한 생각을 한 거로도 모자라서 전투하는 도중 딴짓이나 하고 있다니. 시현은 제 이상한 행동을 숨기듯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갑자기 강력한 에너지가 공중을 휩쓸다가 한 점으로 모여드는 게 느껴졌다.

태운의 긴 머리카락이 휘몰아치는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휘날리며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시현은 저도 모르게 향하던 시선을 억지로 반대로 돌리며 주변을 확인했다. 토막 난 진흙 인형들이 조금씩 사라져 가고 있었다.

‘아, 이게 게이트 클리어구나.’

주변의 상황과 기의 움직임을 확인하자 이 현상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가 있었다.

“태운아 잠시만 기다려 줄래? 여기 내 일행들이 있어서 데리고 와야 할 것 같거든.”

“…일행들, 말입니까?”

“어.”

태운은 잠시 머뭇거리는 것 같더니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햇살 같은 얼굴에 절로 시현의 얼굴이 헤 풀어졌다.

‘아유 이뻐라….’

아, 정신 차리자.

시현이 급격하게 말랑해지려 하는 정신을 빠르게 붙들고 남은 내공을 아낌없이 사용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주워 왔다.

다행히도 다들 몇 명씩 모여 있어 열 번이나 왕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시현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게이트가 사라지면 밖으로 뱉어질 테지만 다들 정신을 잃었기에 혹시 몰라 취한 조치였다.

“통솔자님!! 사청린 헌터님!! 정신 차리세요!”

시현은 우선 통솔자로 붙었던 남자를 조금 세게 때려서 정신을 일깨웠다.

그러자 공격받아 쓰러진 건 아니었는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일….”

“헌터님! 저희가 들어온 결계가 환각 결계였던 모양입니다. 다행히 제게 환각을 튕길 수 있는 스킬이 있어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으음…. 그렇군요…. 하아. 미안합니다. 명색에 보호자랍시고 참여한 건데 못 볼 꼴을 보였어요.”

“아닙니다, 아마 F급이라 방심하신 것일 테죠. 일단 먼저 말씀을 드린 거니 다른 사람들은 모를 겁니다.”

아직도 머리가 띵한지 태양혈이 있는 부분을 지긋이 문지르던 사청린은 이어지는 시현의 말에 고개를 들어 감동 어린 눈빛을 보내 왔다.

“정말…. 고맙습니다.”

시현은 방금 너의 치부를 덮어 주겠다고 말한 것이었고, 사청린 역시 그 뜻을 이해했는지 보이는 반응이 시현의 예상에 딱 부합하고 있었다.

아마 나중에 작은 부탁 하나쯤은 뜯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청린 헌터님이라고 하셨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무, 물론이죠.”

시현이 최대한 친절해 보이도록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여전히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남자가 멍하니 시현을 바라보다 더듬대며 손을 맞잡고 작게 흔들었다.

{스승님}

그때 시현의 머릿속으로 낮게 내려앉은 태운의 목소리가 파고들어 왔다. 전음이었다.

“아, 이제 갈까요?”

시현은 저도 모르게 잡고 있던 손을 털어 내듯 내려놓고 널브러진 팀원들을 하나씩 들쳐 올려 게이트 밖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물론 시현은 아무 생각 없이 귀찮아서 한 일이었지만 대부분의 헌터들은 기절하거나 상태 이상에 걸린 팀원들을 이렇게 밖으로 내던지곤 했다.

애초에 각성자들은 이 정도로 생채기 하나 생길 위인들이 아니었기에 꽤 보편적인 방법이었다.

멍하니 있던 사청린도 급하게 일어나 누워 있는 인물들의 상태를 흘긋 보고는 게이트 밖으로 하나하나 던지기 시작했다. 시현은 마지막 남은 꼴뚜기 대장도 조금 감정을 실어 내던지고 손을 탁탁 턴 뒤 작게 숨을 몰아쉬고 허리를 폈다.

“먼저 나가세요.”

“아니! 아닙니다! 시현 님이 먼저!”

“아니요. 통솔자님께서 나가서 빨리 일행들을 추슬러 주셔야죠.”

“아…. 그렇죠.”

사청린은 잠시 머뭇대는 것 같았지만 조금 아쉽다는 얼굴로 게이트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시현의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태운이 등에 바짝 달라붙어 앞으로 손을 두르며 꽉 끌어안았다.

“스승님. 자꾸 혼자 남겨진 것만 같아 무섭습니다.”

“어?”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생각지 못한 투정에 시현이 놀라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으나 몸을 세게 옥죄는 연태운의 팔에 얌전히 앞을 바라봐야만 했다.

“미안해. 내가 너무 오래 놔뒀지.”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저 제 문제일 뿐이지요….”

시현은 티 나지 않게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삼키며 쓰게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조금 수척해진 얼굴과 저 불안에 잠긴 목소리 모두 다 제가 만든 것들이었다. 시현은 손을 들어 올려 제 어깨 옆으로 얼핏 보이는 까맣고 결 좋은 머리를 위로하듯 살살 쓰다듬었다.

그러자 여전히 고운 얼굴을 조금 일그러트리고 있던 태운의 표정이 슬슬 풀려 가기 시작했다. 제 두피를 슬슬 스치는 손끝이 좋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 잡아채고 어디도 가지 못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태운은 제가 하는 생각이 스승에게 해서는 안 되는 몰상식한 짓이란 걸 알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그딴 건 그가 제게 죽음을 보이고 떠났을 때부터 의미를 잃었다.

“이번만 참아. 여기서 나가면 그땐 남들에게 절대 숨기는 일 없을 거야. 오히려 이렇게 잘난 네가 내 제자라고 자랑하고 싶은걸.”

“하하. 기뻐요.”

시현은 괜히 뭉글뭉글 풀어지는 마음에 작게 웃으며 태운의 머리를 몇 번 더 쓸고 저를 옥죄고 있던 팔을 툭툭 쳤다.

그러자 단단히 굳어 있던 팔이 스르륵 풀리더니 동시에 태운의 기척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시현은 그 상황에 괜히 입맛이 씁쓸해졌다. 예전에는 태운이가 은신한다고 해서 이렇게 아무것도 안 느껴질 정돈 아니었는데 새삼 제 실력이 뚝 떨어진 게 실감이 났다.

‘나가면 진짜 빨리 수련 좀 해야겠다.’

“태운아, 바로 따라 나와. 알았지?”

“예.”

시현은 잠시 다른 생각으로 이어지려던 머리를 톡톡 치고 태운에게 단단히 이른 뒤 요동치는 게이트 안으로 발을 옮겼다.

“스승님. 이제 진짜로 어디 가지 마세요.”

그때 시현이 게이트를 통과하고 텅 비어 있는 공간. 조금 거칠어진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태운은 깊이 내려앉아 무기질적으로 빛나는 눈으로 점점 무너져 내리는 주변을 한번 훑어봤다. 제가 평생 살아온 곳이었지만 시현이 없다면 조금의 미련도 없는 곳이었다.

“연결 차단.”

[차단을 시작합니다.]

태운은 무심한 얼굴로 한마디를 남기곤 망설임 없이 제 스승의 뒤를 따라 게이트를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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