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포도를 앞에 둔 여우처럼 시현은 일부러 안 좋은 시나리오만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러나 저절로 치솟아 오르는 무력감은 다리에 힘을 빼앗아 갔다.
대체 왜 이 꼴일까. 대체 난 뭘 원하길래 계속 등신같이 구는 걸까. 왜 나는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나.
결국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은 시현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고 머리를 감싸 쥐며 자책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이럴 거였으면 차라리 퀘스트의 존재와 비밀을 밝히고 함께 헤쳐 갔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자꾸만 과거의 일들이 떠오르고 제가 내린 선택에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잠시 후. 게이트를 처리하려고 했던 의지마저 꺾이려고 할 때 갑자기 새로운 기억이 떠올랐다.
“맞아. 천마가 있을 곳은 한 곳 더 있었지….”
이 천마 대전의 바로 뒤. 아담하지만 한눈에 봐도 휘황찬란하게 만들어진 전각이 하나 있었다.
원래라면 천마 본인이 사용해야 했을 내실이었으나 그동안 시현 본인이 사용했던지라 금방 떠올리지 못했다.
그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은 단 하나였다. 천마 대전에서도 가장 안쪽 은밀한 곳에 있는 문뿐이었다.
길은 하나고 목표도 하나였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지금 떠오른 곳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이 게이트를 해결한다고 해도 끝까지 마음에 걸릴 게 분명했다.
“후우…. 그래. 확인만 하는 거야….”
시현은 아까와는 달리 얕게 심호흡하며 자신이 직접 목을 베어 내며 퀘스트를 끝냈던 곳으로 느리게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익숙했다. 검은색의 반들반들한 나무 울타리부터 죄다 소나무로만 빼곡히 박혀 있는 정원까지. 시현은 점점 차오르는 긴장감을 애써 억누르며 날아가려는 정신을 꼭 붙잡았다.
익숙한 길 때문인지 도착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시현은 만년한철로 된 문을 새삼스럽게 훑어보다 천천히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사실 미친 듯이 심장이 뛰고 식은땀이 나고 있었기에 시현은 몇 번이나 심호흡하며 기대하지 말라고 자기 자신을 타일러야만 했다.
‘근데, 내가 이 애를 찾을 자격이 될까? 만약, 정말 만분의 일의 확률로 만난다고 하더라도 뭐라고 해야 하지?’
이유가 어찌 됐든 상처를 준 건 사실이었다. 시현은 기대감 위로 갑자기 차오르는 두려움에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아귀 안으로 축축한 습기가 들어차 자꾸만 손이 미끄러졌다.
“정시현 정신 차려. 그냥 탐색만 하는 거야 탐색만.”
그럼에도 자신은 이 문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없을 수도, 이 안에 있는 게 그저 몬스터일 수도 있었지만, 그저 다시 한번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다.
스윽.
문은 여전히 기름칠이라도 된 듯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차마 바로 안을 바라볼 수 없어 바닥만 노려보고 있던 시현은 피부로 느껴지는 고요함에 자조 어린 웃음을 작게 내뱉었다.
결국 마음은 통제가 되지 않고 멋대로 기대한 모양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넓은 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빛과 폭신해 보이는 침상, 그리고 주변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단아한 물건들이 너무도 눈에 익숙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하….”
그냥 웃음이 나왔다. 이 상황과 저 자신 무엇 하나 웃기지 않은 게 없었다.
시현은 그렇게 들어설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내부를 보다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스승님…?”
우뚝.
그때 시현은 절대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러나 너무나 듣고 싶었던 익숙한 목소리에 땅에 못 박힌 듯 멈추어 섰다.
환청인가?
“스승님.”
무엇에라도 칭칭 감긴 듯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몸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시현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천천히 몸을 돌려 다시 한번 텅 비어 있던 내부를 바라봤다.
아니, 이젠 텅 비어 있지 않았다. 여전히 아름다운 남자는 태피스트리처럼 겹겹이 늘어져 있던 천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연태운의 얼굴은 조금 수척해 보였지만 그마저도 그를 더욱 초연해 보이게 만드는 장식에 지나지 않았다.
입꼬리가 잘게 떨려 왔다.
평소에는 잘만 나오던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시현은 멍하니 루비 같은 눈동자를 바라보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태운아…?”
순간 버튼이라도 눌린 듯 시현의 눈가에 투명한 물방울이 작게 맺혀 갔다.
아, 나 이 아이가 무척 보고 싶었구나.
그동안 아무렇지 않은 척해 왔던 게 무색할 정도로 마음의 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온갖 생각들로 복잡하게 채워져 있던 머리가 하얗게 비워지는 것 같았다.
시현은 망설임 없이 내부로 발을 디디며 태운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멍하니 서 있는 그 아이를 껴안고 떨리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태운은 생각지도 못한 시현의 반응에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반쯤 접으며 느른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내려와 있던 손을 들어 단단한 몸을 마주 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드디어, 드디어 잡았다.
“태운아! 진짜 너 맞지…?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아니, 여기에 보스가 있을 텐데!”
시현은 정신이 없는지 잠시간 우왕좌왕하며 태운의 양어깨를 잡고 이랬다저랬다 말을 마구잡이로 꺼내 놓고 있었다.
“스승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혼자 남아 있었습니다….”
“뭐?”
조금 창피했는지 축축해진 눈가를 벅벅 닦아 내던 시현이 생각지도 못한 태운의 대답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옅게 눈그늘이 올라와 충혈된 눈가를 천천히 문지르며 울상을 지었다.
그럼 대체 얼마나 혼자 있었던 거야.
“스승님.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스승님. 절… 버리지 마세요.”
그때 작게 잦아든 쉰 목소리가 시현의 심장에 또렷하게 박혀 왔다.
마치 난도질이라도 당한 듯 심장이 저릿하고 쓰라렸다. 시현은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나 시퍼레진 얼굴로 우물쭈물하던 순간 태운의 앞섶에 떨어진 물방울에 놀라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연태운은 큰 표정 변화는 없었으나 눈 안 가득 알 수 없는 진득하고 어두운 감정과 고통을 가득 담고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고 있었다.
“아니! 울지마 태운아. 난! 내가 원해서 그런 게 아니었어! 하아….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 그럼 이제 제 옆을 떠나지 않으실 거죠?”
“당연하지!”
물론 그때도 절대 떠나지 않겠다 약속하고 혼자 멀리 떠나 버렸었지만, 지금은 퀘스트 같은 것도 없었고 정말로 진심이었다.
시현은 밀려 들어오는 죄책감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며 끝까지 저 애를 지켜 주겠다. 단단히 다짐하고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그런데…. 스승님. 젊어지셨군요…?”
“어? 음…. 그렇게 됐어.”
“그렇군요.”
그리고 약해졌어.
태운이 아직 촉촉하게 젖어 있는 시현의 양 뺨을 살포시 감싸 쥐고 살짝 힘을 줘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신을 가감 없이 바라보는 젖은 눈, 가늘게 떨리는 손과 저를 향한 생생한 반응이 만족스러웠다.
순간 손아귀 안으로 굳어 가던 살결이 스쳐 지났지만, 환상이라는 듯 금방 뜨끈한 체온이 들어찼다.
태운은 시현이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움찔대자 뺨을 잡고 있던 손으로 젖은 피부를 느릿하게 문지르며 쓸어내렸다.
그리고 가늘진 않았지만 제 손안에 딱 맞는 손목을 살짝 움켜쥐었다.
“일단 여기를 빠져나가야 하는데. 태운이 너 다른 사람 본 적 없어?”
“예. 없었습니다.”
“하…. 일단 지금 많이 혼란스러울 텐데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해 줄게. 일단 나를 따라올래?”
태운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늘 그래 왔듯 시현의 뒤에 다가와 섰다.
그러자 새삼 토 다는 것 없이 고분고분한 이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요즘 맨날 밑도 끝도 없이 지랄해 대는 놈들만 보다가 태운이를 보니 눈도 마음도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기척 잘 숨기고 따라와.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아.”
“뭐야. 설마 너도 능력치가 깎였어?”
“능력치…? 어 뭐, 그런 것 같습니다.”
시현은 속으로 작게 혀를 차며 성안을 발동시켰다.
‘성안’
[에러. 산정 중입니다.]
‘엥?’
그리고 예상 못 한 상황에 조금 당황해야만 했다. 그러나 태운이 앞에서 그런 걸 티 낼 순 없었고 이놈의 시스템이란 것도 불가사의투성이었기에 무엇 하나 확산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어차피 산정 중이라는 건 어쨌든 결과가 나온다는 뜻일 테니 자세한 건 뒤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여기 인간들 수준에선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알아서 잘 따라가겠습니다.”
“어, 그럴래? 일단…. 음. 내가 전음 할 테니까 그때까지 좀 숨어서 와. 알았지?”
“예, 스승님.”
시현은 슬금슬금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지 못했다. 비록 방금까지 눈물을 흘려 대서 온통 얼굴이 엉망일 테지만 지금은 기쁜 마음이 훨씬 커서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시현은 습관처럼 길게 풀어져 있는 태운의 머리를 한번 슥 흐트러트리고는 얼굴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조금 잡아 귀 뒤로 꽂았다.
어느 순간부턴 태운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하지 못했었지만 오랜만에 만난 스승이 손 좀 대겠다는데 뭐 어쩔 건가 싶었다.
그러나 시현의 걱정과는 다르게 태운은 조금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다시 가느스름하게 눈꼬리를 접고는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아, 귀여운 것.’
시현은 다시 한번 흐뭇하게 미소를 짓고는 등을 돌려 문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시현은 조금 들뜬 마음을 힘겹게 가라앉히면서 앞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빠르게 움직였다.
태운이는 모습을 감추고 따라오고 있었지만, 기척은 그대로 내보이고 있어 마치 예전처럼 나란히 걷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 와중에도 자꾸만 둥실대는 기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주책이다 진짜.’
그때 알 수 없는 묵직한 기운이 빠르게 시현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언가 달라진 건 없었지만 뭔가 공기의 밀도가 빼곡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빠르게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일단 태운이를 만난 그것까진 좋은데 아직 보스라고 하는 것도 만나지 못했고 10명을 찾아서 수습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도 장담할 수 없었기에 다시 조급해지고 있었다.
“이게 뭐야!”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대전 앞을 바글바글하게 가득 채우고 있는 마교 인들에 시현은 입을 벌리고 멍하니 멈춰 서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