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후와아악.
“후우…. 이제 진짜 끝난 건가.”
그제야 진짜 천마신교의 내부가 시현의 눈앞에 펼쳐졌다. 깊은 숲 가운데에 수십 개의 전각이 얼핏 보면 자유분방한 듯 늘어져 있었다.
물론 제가 현실로 돌아오기 전에 봤던 구조와는 조금 상이했지만 그래서 그 지겨운 진법에서 벗어났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천마신교.
익숙하다면 익숙한 곳이었다. 가뜩이나 얼마 전에 꿈으로도 보았던 곳이기에 더욱 기분이 이상했다.
“그런데 왜 아무도 없지?”
시현이 의아함을 담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댔다. 아무리 기감을 펼쳐 확인하고 안력을 돋워 살펴봐도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는 게 무척이나 위화감이 들었다.
사실 조금 전에도 흑살대가 겨우 5명밖에 나타나지 않은 것 역시 이상한 일이긴 했다. 그들은 십인조로 이루어진 분대였으니까.
대체 뭘까.
일단 사청린이 보스는 이곳에 있다고 했으니 이쪽으로 향하긴 했지만, 게이트 클리어는 처음이었기에 선뜻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시현은 한참을 처음 발을 디뎠던 곳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일단 보스부터 찾아야 할 텐데 조금 무리해서라도 사청린을 찾아 스마트폰 같은 걸 가져왔어야 했나 조금 후회가 됐다.
그러나 어차피 지나간 일이었고 이제 남은 방법은 정직하게 몸으로 뛰면서 하나하나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보스라…. 천마신교의 보스는….”
천마겠지.
순간 가슴 한쪽에 찌릿한 통증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 시현은 작게 미간을 찡그리고 잠시 이마를 느리게 문질렀다.
그리고 바닥이 마치 원수인 양 빤히 노려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괜히 긴장감이 쌓이며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조금 걷자 제가 봤던 천마신교와는 점점 다른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땐 분명 이쪽에 전각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없었고 이쪽에 있는 교육관의 입구는 서쪽이 아니라 북쪽을 향해 나 있어야만 했다. 이제 와 다시 보니까 뭔가 전각들도 듬성듬성한 게 약간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
“마치 맵 구현이 덜 된…. 아.”
진법 안에서는 너무 현실감이 넘쳐서 잠시 잊었는데 자신은 게이트 안에 있는 상태란 게 떠올랐다.
순간 현실감이 머릿속에 끼어들어 와 움직임마저 불편하게 만들던 긴장감을 조금 흐리게 만들었다.
“그렇지. 현실일 리가 없지.”
이게 현실이라면 자신은 절대 그 진법 안에서 살아 나오지 못했을 테니까.
***
저벅저벅.
텅 비어 있던 넓은 공간이 돌바닥을 지르밟는 소리로 얕게 채워지고 있었다.
시현은 주변을 꼼꼼하게 탐색하며 천천히 천마대전 안으로 진입하는 중이었다.
사실 한참을 이 건물 앞에 서서 망설이며 시간을 흘려보냈기에 마음이 급해져 있는 상태였고 저절로 발걸음이 빨라져 마음을 가라앉혀야만 했다.
아직 이 안에는 10명의 사람이 갇혀 있었고 다들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였다. 시현 본인이 빨리 해결하든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틸 환경을 조성하든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 넓은 곳을 언제 다 탐색하냐…. 하아.”
기둥마다 달린 횃불로 아스라이 밝혀진 실내는 사람을 한 명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 빼고는 그때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해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게이트 안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됐다. 어디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모르기에 계속 긴장감을 끌어 올려야만 했다.
“하아….”
시현이 작게 한숨을 쉬며 오른쪽에 보이는 복도에 발을 들이밀었다.
그 순간. 갑자기 검이라도 닿은 듯 서늘한 감각이 하얀 목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흠칫한 시현이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빠르게 등을 벽에 붙인 뒤 검을 들어 올리며 사방을 경계했다.
“뭐지?”
그러나 아무리 기감을 펼치고 시선을 옮겨 봐도 저보다 조금 더 높이 달린 횃불들이 타닥거리며 타들어 가는 소리 말고는 어떠한 기척도 감지해 낼 수 없었다.
게다가 횃불의 빛이 날름거리며 여러 개로 갈라진 그림자를 울렁이게 했고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시현은 자꾸만 목구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시현은 다시 한번 더 마른침을 삼키고는 눈에 익은 내부를 하나씩 확인하며 탐색을 재개했다.
“일단 전투가 가능할 만한 것들이 있는 곳부터….”
우선은 무인들이 자주 머물거나 쉬는 곳들이었다. 그러나 그곳들조차 의자나 집기들은 있었지만 마치 증발이라도 한 듯 생명체의 기운만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내부를 확인하고 다니던 시현은 입구 부근으로 다시 돌아오며 입술을 작게 짓물렀다.
결국 초입부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게이트가 게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 경험상 자잘한 놈들이 없으면 모든 능력치를 보스한테 몰아서 구성을 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제 능력으로는 이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시현은 사라진 제 능력을 조금 아쉬워하며 점점 떨어지려고 하는 자신감을 끌어 올리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아니야, 설마 아닐 거야. 그리고 내공 아니더라도 방법은 많으니까.’
그러나 저절로 깊은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솔직히 현재의 세상을 너무 만만히 봤다. 다시 연공 하기 시작한 천마신공은 정말 말 그대로 절세의 신공이었고 맘만 먹으면 금방 일정 경지에 들어갈 수 있기에 방심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이런 위기가 찾아오리란 걸 알았다면 절대 연공을 이렇게 느긋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시현은 밖에 나가기만 하면 다시 열심히 수련하겠다 다짐하며 조금 더 대전의 깊은 곳으로 발을 옮겼다.
타닥!
마치 날다람쥐처럼 사방을 들쑤시고 다니던 시현은 점점 제 예상과 비슷해지는 듯한 상황에 조금 체념한 상태였다.
“이거 진짜 보스 몰빵 맵이잖아. 아니면 이럴 수가 없다…. 와, 어떡하지.”
하다못해 지금 몸 상태도 최상이 아니었고 내공도 이제는 삼분지 이가 날아가 있었기에 그나마 남아 있던 의욕마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착실하게 내부를 체크하던 시현은 대전의 중간쯤. 역대 천마의 동상들이 웅장하게 세워져 있는 커다란 공동에 발을 내딛고 있었다.
“근데 안쪽은 어떻게 이렇게 똑같이 구현해 놨지? 신기하네.”
시현은 천장까지 넓게 만들어진 동공을 슥 둘러보며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추억 하나를 기억해 냈다.
-여기 벽에다가 내 이름 써도 돼?
-스승님이 하고 싶으면 하셔야지요.
-이제 네 집이잖아. 그래서 집주인한테 허락받는 거야.
-예? 하하, 허락할게요. 마음껏 하십시오. 대신 제 이름도 써 주셔야 합니다.
시현은 마치 당장이라도 제 귓가에 들려올 것 같은 그리운 목소리에 조금 쓸쓸한 듯 웃으며 굳어 버린 목덜미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물론 백 프로 지킨 건 아니었지만 시현은 그곳에 있는 동안 최대한 제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노력을 해 왔었다. 자신은 결국 떠나야 할 사람이었다. 흔적을 남겨 봤자 여러 사람만 괴롭게 만들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마지막 퀘스트를 깬 직후. 그때는 현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불안해져 있던 상태였고 이대로 아예 잊힌다면 또 조금 슬프지 않을까 싶어서 부린 유치한 변덕이었다.
새삼 그때의 일을 떠올렸더니 그 나이 먹고 자기 책상에 이름 써 놓는 애처럼 군 게 이제 와서 조금 부끄러워졌다.
시현은 조금 얼굴을 붉히면서 발을 옮기다 문득 그때 제가 낙서해 놨던 초대 천마라고 알려 준 동상 뒤로 시선을 돌렸다.
★정시현 살다 감★ +태운이도
칼로 세밀하게 새긴 낯익은 낙서가 눈 안으로 깊게 틀어박혔다. 순간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뭐, 뭐야? 여기에 낙서가 왜 있지…?”
저절로 입가가 떨려 오고 피가 식어 내렸다. 마지막에 웃으면서 쓰느라 끝이 흐지부지 삐뚤어졌었는데 그런 세밀한 부분까지 표현되어 있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제가 새긴 게 맞았다.
순간 멀미하는 것처럼 속이 크게 울렁이다 뜨겁게 치솟은 무언가가 목구멍을 콱 틀어막는 것 같았다.
멍하니 서서 칼로 파낸 그 낙서를 바라보던 시현이 저도 모르게 가빠지는 숨을 내뱉으며 저 깊은 곳에서 자꾸만 튀어나오려는 ‘혹시나’ 하는 마음을 내리눌렀다.
“아니야…. 그냥 내 머릿속에 있는 걸 반영한 거겠지. 그런 게이트일 수도 있잖아.”
그러나 마음이라는 게 제 뜻대로 통제가 되는 게 아니지 않던가. 동시에 제가 알 수 없던 부분이 생겨 있던 밖을 떠올리며 내뱉은 말과 반대되던 상황을 억지로 끄집어냈다.
도대체 무엇 하나 확신할 수도, 이해도 되지 않았지만, 시현은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다 급하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방금까지도 조심스럽게 주변을 탐색하던 걸 잊은 채 빠르게 안쪽으로 뛰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음이 이리저리 뛰는 만큼 내공의 조절이 들쭉날쭉해서 그런지 시현의 발이 닿을 때마다 바닥이 불규칙하게 파이고 돌조각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진짜? 설마 후우…. 진짜로?”
두 개의 발이 딱 봐도 무척 두꺼워 보이는 문 앞에 멈추어 섰다.
무턱대고 달려오긴 했지만, 시현은 아직 어떤 것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잠시 망설이며 숨을 고르던 시현이 고개를 들어 휘황찬란하게 쓰여 있는 현판을 확인했다.
[만마종주천마대좌]
그래. 천마가 있을 곳이라면 이곳뿐이었다.
시현은 덜덜 떨리는 손을 다시 한번 꾹 말아쥐고 나서 몇 번 심호흡을 한 뒤 망설임 없이 문을 확 밀어젖혔다.
그그긍-
“하아…. 하아. 하…. 정시현 등신아.”
있을 리가 없잖아.
몇 미터는 될 것 같은 충고와 단순하지만 웅장한 모습의 내부는 지금까지와 별반 다르지 않게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뻥 뚫려 있다 보니 뭐 사람 하나 숨어 있을 자리도 없었기에 기대를 하기도 전에 모든 가능성을 차단해 버리는 그런 단순한 구조였다.
그래, 그럴 리가 없었다.
게임 캐릭터였던 연태운이 이곳에 있으리라 생각하다니 제가 미친 것 같았다.
낙서는 어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아마 아까 생각했던 것처럼 제 기억을 가져가 조합한 걸 수도 있었기에 어떠한 지표도 될 수가 없었다.
“그래…. 그렇다면 있다고 해도 내가 아는 그 애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