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쿠헥!! 흐억 하아, 흐아.”
잠시 후, 이규민은 역시나 걱정했던 것과 한 치도 다름없이 저 앞에 엎어져서 속을 게워 내는 중이었다.
시현은 조금 미안해져서 힘겹게 캑캑대고 있는 규민의 등을 천천히 두드렸다.
“미안해요. 조금 급하게 나오느라 속도를 조절하지 못했네요….”
“흐아… 아, 아니에요! 아주 신기한 경험이었, 습니다. 큭. 세상이 무슨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게 우웩. 너무….”
“하아…. 말은 이제 그만해요….”
제발 좀.
시현이 이 와중에도 길게 떠벌리고 있는 이규민의 등을 조금 더 힘주어 두드리며 한숨을 얕게 내뱉었다.
이렇게 해맑고 말 많은 타입은 처음이라 이런 반응이 도통 익숙해지지 않았다.
“후아. 이제 좀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형님! 근데 저 나름 어쌔신 계열이라 속도로는 괜찮은 편인데 형님은 진짜 대단하시네요!! 역시 제 생명의 은인!”
“어쌔신이라고요….”
저렇게 말 많은 남자가 암살자 계열이라니. 아니면 저 수다로 사람을 암살하는 걸까….
아까 성안을 써서 확인했을 때 보이지 않던 클래스 부분이 공개되자 세상에서 제일 안 어울리는 것 같은 조합에 시현은 결국 허 하고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이규민은 시현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마냥 풀어져 헤헤 웃어 보였다.
“하여튼 다음부턴 그러지 마세요. 그리고 여동생분 부탁이었던 거니까 가서 좀 챙겨 주고요.”
“아!! 세상에. 저 이규민 무척 감동했습니다! 그럼 제 동생도 구해 주신 겁니까?!”
시현은 이제 이 만남을 마무리하려고 꺼냈던 인사말이 다시 대화의 시작이 될 조짐이 보이자 이마를 턱 잡고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등 뒤로 휘몰아치던 마력이 사그라들며 게이트가 닫히기 시작했다.
시현은 급속도로 사라져가는 눈보라 사이로 시뻘겋게 불타고 있는 머리카락을 확인하곤 티 나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하정에 대한 걱정 때문에 이쪽으로 온 것이었고 상태를 확인한 뒤엔 그마저도 사라졌기에 이제 여기에 남아서 할 일은 없었다.
“형님! 연락처 좀 알려 주십시오!!! 아 참, 그리고 이거 제 명함입니다!”
시현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있는 침식 지형과 게이트를 한참 바라보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밝은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헌터증 때문에 협회 가신다고 하셨죠?! 만약 테스트받아야 하시는 거면 내일 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내일요?”
“네! 마침 날짜가 맞네요!”
시현은 퀘스트처럼 갑작스레 주어진 내용에 의아하단 듯 고개를 기울이며 반문했다. 그러나 이어진 규민의 말에 연신 머리를 끄덕이며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알고 보니 헌터 협회의 테스트는 매일 아무 때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테스트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치러졌기에 이 사실을 몰랐으면 허탕을 치고 한 달을 더 기다려야 했을 뻔했다.
방금까진 이규민에 대해 조금 어벙한 남자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편견이 되기 전에 금방 흐려졌다.
“알려 줘서 감사합니다. 그럼 전 갑니다.”
“어어! 잠시!”
그러나 그 이후로 더 이어질 것 같은 수다는 인식이 바뀌었대도 조금 힘겨웠기에 시현은 빠르게 인사를 남기고 건물 아래 인적 드문 곳으로 뛰어내렸다.
그러자 골목 밖에서는 사라지고 있는 게이트를 후처리하기 위해 헌터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는 게 느껴졌다.
“어어!!! 여기! 여기에 30여 명이 기절해 있습니다!!! 빨리 지원 좀 해 주세요! 약국 옆이요!”
그때 그 소란스러움 사이로 누군가가 사람들을 발견했다고 떠드는 소리가 작게 섞여 들려왔다.
조금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이제는 약속 장소였던 카페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
타닥.
잠시 후 시현의 발끝이 카페가 있는 건물의 옥상에 닿았다.
‘아 맞다. 그 건물 옥상 문 잠겨 있던데. 뭐, 알아서 갔겠지.’
그리고 시현은 카페에 다 왔을 때쯤에서야 이규민을 옥상에 두고 왔다는 걸 떠올렸다.
어디선가 이규민의 원망 어린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시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잊지 않고 주문한 커피를 받아 든 채 원래 앉아 있던 자리로 찾아가 털썩 주저앉았다.
시현은 곧바로 내부를 조심스럽게 둘러보며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기 시작했다. 아직 부산스러웠지만 이런 일들이 아주 낯선 건 아닌지 직원의 정리하에 빠르게 잠잠해지는 중이었다.
“헉. 이하정 헌터님이다!”
“미친. 불의 여왕님!”
“꺄악. 어떡해 개멋있어!”
그러나 직원의 노력이 무색하게 카페 안이 다시 한번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드를 깊이 쓴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시현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탄성 소리에 어깨를 움찔 떨고는 급하게 손을 들어 올려 입을 틀어막아야만 했다.
“미친놈아. 웃음 참는 거 다 보이거든?”
그때 이하정이 시현의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으며 낮은 목소리로 거칠게 읊조렸다.
“큭. 여왕. 님”
“하아…. 이 배은망덕한 새끼. 넌 그냥 오늘부로 집에서 내쫓아야겠다. 알지? 그 집 일단 내가 유지하고 있는 거?”
“아, 미안. 쏘리. 잘못했습니다.”
시현이 그제야 자꾸 비져 나오는 웃음을 힘겹게 멈추며 몇 번 헛기침하고 고개를 들어 하정과 시선을 마주쳤다. 하정의 상태는 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귀걸이와 열 손가락 전체에 반지를 끼고 있는 것만 빼면 전투하고 온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없이 멀끔한 모습이었다.
“여기는 별 피해 없었냐?”
“어. 별문제 없었어.”
물론 진짜로 별문제가 없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위기로 보아 그런 것 같아 시현은 조금 어색하게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나 딱히 엄청나게 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니었는지 별말 없이 테이블을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던 하정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 일단 집 말이야.”
“아, 그거 유예 기간 언제까지래?”
“어?”
“집주인이 말도 안 되게 전세 올려 부른 거잖아. 그러니까 네가 이렇게 말 꺼낸 거겠지.”
하정은 도움을 주고서 생색을 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계속 집 얘기를 하는 걸 보면 진짜로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겠지.
게다가 저 자존심에 자신도 감당하기 힘들다는 식의 얘기까지. 결국 집주인이 전세금을 무리하게 올려 부른 게 확실해졌다.
불과 3~4년 전. 게이트 따위 없는 평범했던 시절엔 이런 식의 막무가내 방식으로 억지를 부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뭐가 어찌 됐는지 알아볼 만한 기운도 생기지 않았다. 물론 방금 있었던 기연의 영향도 있었긴 했다. 그래 그건 기연이었다.
“하아…. 미안하다.”
“네가 왜 미안하냐. 솔직히 내가 무릎 꿇고 감사하다고 빌어도 모자랄 정도니까 미안하다고 하지 마. 집이야 옮기면 되지 뭘.”
“그렇긴 한데…. 아예 서울 뜨려고?”
시현은 별다른 대답 없이 빙긋 미소 짓고는 피 같은 돈으로 시킨 커피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이규민을 아직 백 프로 신뢰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나쁘지 않았고 시현은 제 감을 믿었다. 물론 저를 농락한 거라면 복수해 줄 만한 힘도 있었고.
‘그래도 LK그룹 차남이라니. 뭐 아깝다고 돈 떼먹진 않겠지.’
시현은 오자마자 검색해 봤던 이규민의 신상을 떠올렸다.
LK그룹. 산하의 헌터 길드를 두 군데나 두고 있고 강원도에 있는 신의 광산에서 토출된 마정석과 아이템을 독점하는 기업 중 하나였다.
이규민의 그 티 없는 성격과 헤픈 돈 씀씀이가 단번에 이해가 되는 배경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어차피 돈만 받으면 이곳을 떠서 시골로 내려가 살 생각이었기에 시현은 하정의 말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빚들 다 갚고 전세금과 남은 돈을 합치면 시골에 아담한 집 하나 정돈 장만할 수 있겠지.’
시현은 결국 처음의 목적과는 조금 달라진 만남을 빠르게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머리카락 안쪽에 엉겨 붙은 먼지와 재를 툭툭 털며 무섭도록 조용한 집 안을 한번 둘러봤다.
어째 일이 잘 풀려 가는 것만 같았는데도 기분은 썩 유쾌하지 못했다. 시현은 어질러진 물건들을 가지런히 나열해 정리하며 욕실로 향했다.
“일단 집부터 구하면 돼. 그러면 괜찮아.”
요란하게 떨어지는 물줄기 사이로 작은 말소리가 섞여 들었다. 시현은 멍하니 있다가 양 뺨을 찹찹 치고는 조금 뻐근한 몸을 빠르게 닦아 냈다.
새삼 오랜만에 힘 좀 썼다고 푹 퍼진 몸이 낯설었다.
샤워 후 느릿하게 욕실을 빠져나온 시현은 늘 하듯 내공을 돌려 몸에 남은 물을 순식간에 증발시켰다.
그리고 옷을 입지 않는다고 늘 무섭게 잔소리하던 허스키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피식 웃고 오랜만에 침대 위로 풀썩 쓰러져 꿈틀꿈틀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일단 알림부터 확인해 볼까.”
몇 시간 전.
시현이 게이트를 마주할 때부터 눈앞에 반투명한 알림창이 미친 듯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연히 눈앞을 어지럽게 만드는 알림창은 바로 닫았고 그 뒤로는 뭐가 어떻게 됐는지 까먹고 있던 참이었다.
[체력이 3 올라갑니다.]
[천경명왕보 A급 을(를) 익혔습니다.]
[천둔형 B급 을(를) 익혔습니다.]
[민첩이 2 올라갑니다]
[수라천멸권 S급 을(를) 익혔습니다.]
[천마광염무 S급 을(를) 익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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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된 무공들이 천마신공 SS급으로 융합됩니다.]
“와…. 이거 좀 편한데.”
이전에는 스킬을 등록하려면 퀘스트 보상으로 받거나 따로 비급을 구하든가 해서 내용을 읽어야 하는 귀찮은 절차를 거쳐야만 했었다.
물론 그 덕에 진짜 무림 고수가 된 양 여러 지식들을 머릿속에 채울 수 있긴 했지만 귀찮은 건 귀찮은 거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 그렇게 머릿속에 무공들을 담아 둔 덕인지 딱히 특별한 절차 없이 펼친 초식에도 단번에 스킬로 등록이 됐고 그것은 과거의 고생을 조금 보답받는 듯한 기분이라 나쁘지 않았다.
“나중에 시간 내서 더 스킬창을 채워야겠네.”
시현이 자주 쓰던 스킬이 나란히 쓰여 있는 창을 다시 한번 훑어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 당시에 연태운도 시스템 같은 걸 쓰는 게 아닌가 의심했던 일이 떠올라 작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곳에서 산 지 대략 2년 정도쯤. 아직은 평범했던 자신이 무공을 쓴다는 사실에 살짝 어깨가 으쓱해져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 자만심은 어린 태운이에게 무공에 대해 알려 주며 아는 척을 했다가 일주일 만에 밑천이 다 털린 뒤 조용히 사라졌다.
그때는 그게 꽤 황당했는지 깊게 좌절하며 어린애까지 의심했었지만 물론 태운이는 그저 능력이 너무나 출중했을 뿐이었다.
“사실 내가 그렇게 대단한 놈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을 텐데 안 도망가고 붙어 있던 게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