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하여튼 정말 감사드려요. 정말 저희 형도 강하지만 한 방에 두 마리를 쓱싹 할 정도는 아닌데!”
‘쓱싹….’
마치 계속해서 제 궁금증에 대답이라도 하듯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규민의 말은 이제 막지 않으면 집안 얘기까지 꺼낼 것 같은 기세였기에 시현은 단호하게 손을 들어 올려 말을 끊었다.
“지금 빨리 나가야 합니다. 이만 따라오시죠.”
“아…. 넵, 알겠습니다! 아참, 저는 이규민입니다! 은인 형님의 성함을 알려 주시면 제가 꼭 보답하겠습니다!”
“됐습니다.”
그때 또 이상하게 말이 길어지려고 하는 징조가 보이자 보답이고 자시고 시현은 대충 단답하며 심드렁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에도 신나서 말을 이어 가는 이규민에 시현은 조금 미간을 찌푸리며 강제로 입을 막아야 하나 그의 얼굴과 목 사이에 있는 아혈을 흘깃 보며 고민했다.
그러나 잠시 후. 조금 강압적인 방법까지 떠올리던 시현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재빨리 이규민이라고 제 소개를 한 남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제가 비록 당장 가진 게 많지는 않지만, 보답으로 3억을….”
“됐다고 했습ㄴ… 네? 뭐라고요?”
“예, 예?”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시현은 얼굴을 진지하게 굳히고 다시 한번 되물었다.
3억? 3백만 원 정도를 잘못 말한 거겠지 싶었다. 갑자기 억 단위를 턱 내줄 수 있는 미친놈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 제가 비록 가진 게 없어서 더 드릴 순 없지만 일단 3억 정도를 보답으로…. 드릴까…. 하고…. 저, 괜찮으세요?”
순간 시현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고 입가가 파르르 떨려 왔다.
저 해맑게 반짝이고 있는 눈빛은 딱히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냥 내 돈 뚝 떼서 준다는데 뭐, 하고 말하는 듯한 지극히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만약 저 표정과 동공의 흔들림, 목소리의 고저까지 조절해서 제 감을 속인 자라면 당장 목을 쳐서 우환을 제거해야 할 정도였다.
“정시현입니다. 어디 다친 덴 없습니까?”
그러니까, 됐다. 라고 말하기엔 너무 큰돈이란 뜻이었다.
3억이면 하정에게 빚진 돈과 대출금을 한 방에 처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들 만큼.
시현은 뒤늦게나마 평소답지 않게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멋있어 보이는 미소를 빙긋 지어 보였다.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에 입가에 경련이 일어나는 것 같았지만 그 또한 가볍게 무시했다.
“허억. 네, 네!!”
“이규민 씨라고 하셨죠? 3억이면 증여로 처리를 해야 하나. 하.하.”
비록 세금이 뒤지게 까이겠지만 그래도 좋았다. 어디서 몇 억을 턱 받는단 말인가. 땅을 파봐라 어디 오백 원짜리라도 튀어나오나.
시현은 그럼에도 조금의 의심을 남겨 뒀지만, 혹시 또 모르지, 싶어 어떻게 3억을 받아야 잘 받았다고 소문날까 고민하며 중얼댔다.
그러자 조금 어색하게 하하 웃어 대던 규민은 머리를 긁적이다 이내 입을 열었다.
“헌터 라이센스 번호 알려 주시면 그쪽으로 바로 보내 드릴게요!”
“…헌터 라이센스 번호요? 그게 뭡니까?”
“네?”
그 순간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이규민의 눈빛이 다시 잘게 흔들리는 걸 알아챈 시현은 방금 자신이 무언가 잘못 말했다는 걸 빠르게 눈치챘다.
안 그래도 규민은 시현의 걱정대로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중이었다.
‘설마, 불법 미등록 헌터?’
불법 미등록 헌터는 흔히 말해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헌터 협회에 등급 테스트를 하지 않고 공식 정보를 남기지 않는 자들을 뜻했다.
어쩐지 저 은빛 라이칸 무리를 단번에 조진 걸 보면 엄청난 실력자인 것 같았는데 제가 얼굴을 모르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아마 저 잘생긴 얼굴도 상대방의 방심을 이끌어 내기 위해 만들어진 건 아닐까, 그렇게 슬슬 차오르는 두려움으로 규민의 몸이 떨리기 시작할 때. 조금 당황했던 시현이 빠르게 표정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런 게 얼마 되지 않아 정보 습득이 늦었습니다.”
“아.”
조금 민망한 얼굴로 작게 미소 짓는 시현을 보자 규민은 다시 생각해 보면 범죄자가 무슨 이득을 얻는다고 라이센스를 모른 척하며 대놓고 의심받을 짓을 할까 방금 들었던 생각에 회의감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희박했지만 지금 시현이 말한 것을 대입하자 어느 정도 일치할 만한 스토리가 떠올랐다.
만약 시현이 얼마 전에 각성했지만 드림워크를 통한 각성이었고 꽤 오랫동안 그곳을 겪은 자라면 이 모든 일이 이해가 갔다.
하다못해 당장 어제 각성을 했다고 해도 어떤 류의 꿈을 꾸었는가, 몇 년간 있었는가에 따라 능력과 능숙함이 천차만별이었기에 섣부른 추측은 금지였다.
이걸로 가장 유명한 게 빛 속성 기술을 쓰는 셰어 길드 신류하이지 않던가.
‘이규민, 이 못된 놈. 감히 목숨을 살려 주신 은인을 의심하다니!’
비록 그렇다고 해도 라이센스에 대해 모를 리는 없었지만, 규민은 저 혼자 기승전결을 만들어 머릿속으로 희망적인 소설을 써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조금 초조하게 서 있던 시현은 지금 이렇게 제가 구해 주기까지 한 사람에게 방긋대며 살살대야 하는 상황에 조금 서글퍼졌다.
“얼마 전에 각성하셨다면 모를 수도 있죠! 걱정하지 마세요. 형님!! 헌터 라이센스는 협회에서 정식으로 테스트받으면 발급되는 신분증 같은 겁니다! 헌터들은 보통 라이센스 번호로 거래하기 때문에 말씀드린 거예요!”
“그렇군요.”
시현은 수긍하듯 미소를 지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규민은 조금 더 신이 나서 자세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게이트 자원들이 세상에 풀리면서 물가는 미친 듯이 요동을 쳤고, 물론 지금도 어지럽긴 하지만 처음 1년간은 정말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시기였다고 했다.
그래도 뒤늦게나마 각 나라에서 온갖 법을 만들고 규칙을 만들어 뒤죽박죽인 상황을 잡아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휙휙 바뀌어 가는 상황에서 나온 라이센스 계좌는 그 와중에도 헌터들이 쓰는 금액이 상상을 초월했기에 따로 협정을 맺은 방법이었다.
“헌터들이 쓰는 계좌들을 따로 만들어 관리하게 됐는데 사실 초반에는 어떻게든 이득을 취해 보려는 집단들로 인해 잘 자리를 잡지 못했어요. 그런데 기존 법대로라면 아이템이나 게이트 부산물을 거래하면서 거의 수억 수십 억씩, 크게는 수백 억씩도 세금을 떼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누가 가만히 있겠어요.”
당연히 아주 폭발적인 불만이 터져 나왔고 그것을 용인하지 않고 억지로 세금을 왕창 떼 가던 나라에서 헌터들이 우후죽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이야 세금으로 인한 이득이 커 보였지만 그 커다란 부담은 결국 그 나라의 지하 경제만 활성화시켰고 동시에 치안은 엉망이 됐다.
게다가 이제 막 떠오르는 미래를 이끌어 갈 주요 그룹인 헌터들이 빠져나가자마자 각 나라의 평가가 요동치며 뚝 떨어지는데 누가 헌터들의 이익을 보장하지 않으려고 할까.
결국 이 시스템은 헌터들의 빠른 결단으로 순식간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3억을 제대로 받고 편하게 쓰려면 헌터 라이센스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이곳을 나가면 헌터 협회를 들러야겠군요.”
시현은 그래도 이런 정보를 친절하게 말해 주는 규민을 슬쩍 보며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러자 순간 규민의 얼굴이 활짝 펴지며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필요한 정보가 있다면 말씀해 주십쇼! 제가 비록 지금 가진 건 없지만 성심성의껏 형님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진짜 아니, 분명 쾅쾅 소리 두 번 정도 난 게 다인데 이런 무위라니! 정말 존경합니다. 형님!!”
시현은 여전히 친절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큰 목소리의 수다를 잘라 냈다.
‘으으…. 골 울려. 근데 가진 게 없다, 해 놓고 3억이라니….’
사실 3억 정도면 조금 괜찮은 능력치가 붙은 상의를 살 정도의 금액일 뿐이었다.
최근 아이템 제조 스킬을 가진 헌터들이 능력을 꽤 펼치고 있다곤 하나 아직 대부분의 장비는 거의 게이트에서 공략 후에나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애초에 구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수량은 많지 않았고 당연히 가격은 수직 상승을 했다.
겨우 지름 30cm의 원 모양 방패가 생기는 빛의 실드 반지 하나가 7천만 원을 웃도는 것만 봐도 극악의 시세를 알 수 있었다.
물론 시현은 아직 알 수 없는 내용이었기에 이규민을 조금 철없다고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처음 보는 사람한테도 이렇게 호의를 베풀고….’
제가 목숨을 구해 줬다고 하나 하정이 게이트를 처리할 때까지 잘만 버티고 있었으면 살 수 있었을 테니 살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시현은 조금 의심의 눈초리로 이규민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러자 해맑게 웃으며 눈을 빛내는 얼굴에 결국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얼굴 가죽과 기운마저 다 바꿔 가며 계략을 꾸며 내는 무림이 아니었다. 애초에 성안까지 있었기에 사람들이 더욱 쉽게 파악되지 않나.
-칭호: 단순한 돌진
아까 이규민의 상태창에서 확인했던 칭호가 떠올랐다.
시현은 앞에 서서 연신 조잘대는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미소 짓다가 슬슬 멍하니 풀어져 있는 이규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조금 멀미 날 테니 속 안 좋으면 눈 감고 있어요. 토할 것 같아도 꾹 참고요.”
“네?
시현의 한쪽 손이 규민의 목덜미를 단단히 감아 잡았다. 그리고 나머지 손이 오금 쪽으로 내려오더니 저와 비슷한 덩치의 커다란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으억!”
“눈 감아요.”
순간 듣기 좋은 적당히 낮은 목소리가 단호하게 내뱉어졌다.
그러나 눈을 감으라고 했음에도 공주님처럼 들려진 채 멍하니 저를 올려다보는 이규민에 시현은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힘겹게 갈무리했다.
‘내 옷에다가만 토하지 말아라 제발.’
그리고는 아까와는 달리 당장이라도 터질 듯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허공의 기운을 가늠한 뒤 다리로 내공을 모아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