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진짜…. 다른 세상이네.”
현실이라면 공존할 수 없는 푸르른 잔디들과 추운 날씨로 인해 흩날리는 눈. 그 모든 게 이곳이 다른 세계라는 걸 알려 주는 것만 같았다.
물론 이 또한 인터넷을 통해 어느 정도 읽어 본 내용이었는데도 실제로 보는 것은 느낌이 정말 달랐다.
게다가 브레이크가 터지면 몬스터들이 튀어나온다길래 들어가자마자 뭐라도 있을 거라 여겼지만 너무나 평화롭게 펼쳐진 눈 쌓인 초원에 조금 김이 빠졌다.
그래도 부탁받은 게 있으니 시현은 천천히 앞으로 보이는 탁 트인 공간으로 기감을 넓게 펼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걸음 옮겼을 때.
“이건가?”
제가 위치한 곳에서 꽤 떨어진 곳에 몇 개의 기운이 몰려 있는 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남자에 작게 미간을 찌푸린 시현이 제자리에서 두어 번 통통 뛰다가 고개를 툭툭 꺾어 풀어내고는 기묘한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후웅-
순간 공기가 휘도는 소음과 함께 시현의 인영이 허공을 흩날리는 눈발을 남기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바위들이 여러 개 쌓여 있는 공터 초입.
게이트에서 처음 빠져나왔을 땐 작긴 했지만 그래도 군데군데 나무들이라도 박혀 있었는데 이곳에는 그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시현은 다시 바닥을 박차고 기척이 몰려 있는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그때, 달리고 있던 시현의 귓가로 사나운 울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그리고 곧 커다란 돌이 유난히 모여 있는 곳 사이사이로 은빛 털을 두르고 있는 거대한 늑대 몇 마리가 약이 오른 듯 거칠게 하울링 하며 좁은 틈새로 입질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저 안에 뭔가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법한 상황에 시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가까이 다가갔다.
“으아!! 살려 주세요!! 흐어어…. 냄새나!! 악!”
시끄럽게 겹치는 갯과 동물의 그르렁거리는 소리 사이로 한참 작아 가냘프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가 비집고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그 ‘오빠’라는 사람의 목소리인 것 같았는데 끊임없이 이어지며 호들갑을 떨고 있는 걸로 보아 딱히 큰 피해를 받은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상황에 조금 급하게 달려오느라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린 시현이 순간 다리에 내력을 돌리며 뛰어오르려고 하다 멈칫하곤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돌과 흙바닥, 그리고 눈. 어딜 봐도 무기로 쓸 만한 게 없는 휑한 주변에 곤란한 듯 머리를 작게 긁적였다.
‘아, 주먹 쓰면 더러워져서 싫은데.’
시현은 아주 잠깐 투덜거렸지만 빠르게 전신으로 내공을 돌리며 얼어붙은 땅을 박찼다.
후드를 뒤집어쓴 인영이 한 마리의 매처럼 허공을 가르고 수직으로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는 어느 지점에 멈추어 서는 것 같더니 곧 운석처럼 중력을 등에 업고 추락하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목표는 제일 앞에 있는 늑대의 정수리. 순간 쏘아지는 살기를 느꼈는지 침을 질질 흘리며 입질해 대던 늑대들이 흠칫하며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늦었어.”
아래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시현의 표정은 변화라곤 한 치도 없이 단단히 굳어 있었다.
그러나 그 주변으로 옅게 피어오른 붉은 기운은 눈과 만나 수증기를 피워 내며 이리저리 요동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별똥별의 꼬리 같았다. 이내 주먹으로 뭉쳐 들고 있는 요요한 붉은빛의 내공이 떨어져 내리는 속도와 결합해 길게 늘어졌다.
[수라천멸권.]
시현의 몸이 괴이한 방향으로 꺾여 들다가 다시 탄력적으로 펴졌다. 그리고 그 추진력이 담긴, 이제는 완전히 붉어진 주먹이 어깨를 축으로 삼아 직선으로 내질러졌다.
투콰콰쾅!
그것은 아파트 2층 정도는 될 법한 덩치의 네 다리가 단단한 지면으로 박혀 들 정도의 무게감이었다. 피륙을 강타한 것이라곤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쌓여 있던 눈과 흙 쪼가리들이 허공을 수놓고 사방으로 쏟아져 내리며 크레이터가 생긴 듯 얕게 표면이 깎여 난도질된 표면을 드러냈다.
그 가운데에 있는 늑대는 크게 비명조차 내뱉지 못하고 절명한 듯했다. 머릿속은 내공으로 휘저어져 녹아내렸고 피부를 뚫고 몇몇 뼛조각이 튀어나와 박살 난 두개골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늑대가 뾰족한 이빨이 여러 겹으로 박혀 있는 아가리를 벌리고 크게 흥분한 채 시현에게 덤벼들어 왔다.
파파파팍!
시현은 다시 한번 바닥을 박차고 튀어 올라 고개를 숙인 채 기울어져 있는 늑대의 사체를 타고 앞으로 쏘아지듯 달려 나갔다.
[천마광염무.]
푸확!
그리고는 재빨리 몸을 띄워 올려 달려드는 늑대의 뒤에 나타나 다리를 앞으로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무언가 단단한 게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앞으로 갑작스럽게 화염이 치솟았다.
정강이로 느껴지는 묵직함에 시현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쿠웅.
동시에 단말마조차 내뱉지 못한 늑대의 몸뚱이가 머리부터 천천히 바닥으로 꼬꾸라졌고 곧 혀를 날름대듯 빠르게 커진 화마가 이미 죽은 늑대를 단숨에 삼키고 사라졌다.
그로 인해 새까만 잿가루가 허공을 채우며 흩날렸지만 그새 몇 걸음 떨어져 적당한 바위 쪽에 발을 붙이고 있던 시현의 주변은 아무 일도 없었단 듯 깨끗했다.
“다 좋은데 재까지 싹 태우면 어디 덧나나. 기술이 만들어지다 말았어.”
시현은 무림인들이 들으면 기함할 만한 말을 하며 허공을 수놓는 잿가루를 보다가 몸에 둘렀던 얇은 기막을 천천히 풀어냈다.
그때 사람이었다면 혼이 빠져나간 듯한 표정을 지었을 게 분명한 살아남은 늑대들이 멍하니 침을 줄줄 흘리다가 벌벌 떨면서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가라.”
그리고 시현의 말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주춤대던 늑대들은 곧 몸을 돌려 정신없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살생을 즐기는 스타일도 아니었기에 시현은 그 꼴을 무심하게 바라보다가 천천히 바위 쪽으로 발을 옮겼다.
이제 그 달갑지 않은 부탁을 마무리할 때였다.
“나오세요.”
시현은 마지막 목표가 있는 쪽으로 바짝 다가가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그러자 잠시 후 복슬복슬한 파마머리를 한 조금 어수룩해 보이는 남자가 바위 뒤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누, 누구세요…?”
“도와 달라면서요. 도우러 왔으니까 빨리 갑시다.”
시현이 귀찮다는 듯 대충 말을 던지자 남자는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댔다.
그리고 바닥에 쌓인 눈을 흥건하게 적시는 붉은빛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시현의 뒤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 어! 으아아아아악!!!”
남자는 그제야 거대한 짐승의 시체를 본 것인지 제자리에서 펄쩍 뛰고는 기겁하며 크게 비명을 질러 댔다.
시현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빠르게 귀를 내공으로 막으며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고 있는 남자를 허공섭물로 끌어당겨 입을 가차 없이 틀어막았다.
“소리 지르지 마세요. 안 그러면 억지로 입 막습니다.”
늑대들을 쫓아냈다곤 해도 아직은 적진이었다. 어떤 게 더 숨어 있을지도 몰랐고 잘못했다가 하정의 일을 방해할 수도 있었기에 이렇게 어그로를 끌어 봤자 좋을 일은 단 하나도 없었다.
시현이 냉담하게 말하자 입이 막혀 있던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금세 진정이 됐는지 사정없이 흔들리던 눈동자가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았고 심장 박동도 줄어들었다. 시현은 그의 눈을 한번 확인하고서 얼굴에서 손을 천천히 떨어트렸다.
“형님!”
시현은 갑자기 튀어나온 지칭에 순간 힘이 빠져 삐끗할 뻔한 다리를 급하게 힘주어 폈다.
“예?”
“절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이라고 부를 수 있게 허락해 주십쇼!! 정말 출중하신 외모만큼이나 마음도 아주 최고십니다!!”
어벙해 보이던 남자는 줄줄 말을 이어 나가며 양손을 꼭 부여잡고 시현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신없어 보이는 듯했는데 점점 눈빛이 급변하더니 이제는 반짝이다 못해 광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방금까지 기겁하던 사람은 어디 갔는지 이제는 해맑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자 머리가 아파져 왔다.
대체 이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이야?
그러나 하나하나 지적하며 시간을 끄는 것도 귀찮았고 어차피 나가면 볼일도 없을 테니 시현은 마지못해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뭐. 예 그러세요….”
“감사합니다!!! 정말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사실 하정 헌터님의 도움이 되고 싶어서 쫓아왔던 건데…. 그렇지만 이렇게 근처에 가지도 못할 줄 몰랐습니다. 제가 너무 경솔했어요….”
말을 하기도 전에 자신의 tmi를 길게 늘어놓은 남자에 잠시 지긋지긋한 표정을 지은 시현은 하정의 도움이 되려고 했다는 말에 다시 남자를 바라보곤 성안을 발동시켰다.
이규민 [□□□□ (B)]
칭호 [단순한 돌진]
체력-□□
근력-□□
민첩-□□
지력-□□
마력-□□
운-□□
‘이규민. B급 헌터라…. 휘말리긴 개뿔. 그래도 자신감이 있을 만하긴 했네. 근데 왜 이렇게 등신처럼 숨어 있었던 거지?’
“제가 얼마 전에 헌터 등급 테스트를 받았는데 무척 높게 나왔었거든요…. 마침 또 바로 지척에 게이트가 생기는 바람에 운명인가 싶어서….”
“하아….”
그때 시현의 생각에 대답이라도 하듯 이 사태의 원인이 이규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이가 없었다.
이 게이트가 아무리 C급이래도 결국은 폭발 게이트였다. 몬스터들의 난이도가 낮아도 게임으로 치면 타임어택하듯 최단기간에 클리어해서 빨리 닫아야 하는 게이트란 뜻이었다.
그걸 저렇게 겁이 많은 자가 단번에 처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조금 한심한 얼굴로 규민을 흘깃 보던 시현은 여전히 또랑하게 저를 쳐다보고 있는 눈을 보고 다시 슬금슬금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부담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