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아까 전, 하정이 자신의 앞에 자리한 의자에 앉는 순간, 갑자기 눈앞으로 반투명한 상태창이 떠올랐다.
[스킬 습득.]
성안(lv. 1)
지정한 것의 정보 창을 확인할 수 있다. 스킬의 등급이 성장할수록 볼 수 있는 항목이 늘어난다.
물론 시현은 늘 하듯 능숙하게 상태창을 모른 척했고 대화하는 도중 틈을 봐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자 파란색이 아닌 연한 붉은색의 창 위로 일부나마 이하정의 정보가 적혀져 나오는 걸 확인했다.
“근데 홍염의 마녀라니. 하정이랑 잘 어울리네.”
파악은 빨랐다. 아무래도 하정은 마법 쪽을 사용하는 것 같았는데 예전에 함께 게임을 할 때도 늘 마법사나 원거리 딜러만 하던 하정이었기에 꽤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 느껴졌다.
“진짜 세상이 뒤지게 바뀌긴 했네…. 실제로 보니까 실감 난다.”
귀환하고 첫날 멀리서 이루어진 전투를 보긴 했지만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그것도 친한 지인이 능력자가 된 걸 보니 더욱더 이곳의 변화가 가깝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주 느리게 부팅되고 있는 컴퓨터를 턱을 괴고 빤히 보던 시현은 조금 복잡한 얼굴로 하나씩 채워지고 있는 화면을 기다렸다가 인터넷을 켜 게이트 사고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2-상세
현재 게이트는 F급부터 A급까지 존재하고 태초에 생긴 게이트 9개는 등급 없음. 통칭 신의 광산이라고 부른다.
알다시피 보통은 게이트가 생겨나면 헌터들이 내부를 토벌해 없애는 절차를 따르지만, 저 9개는 내부의 각 층(또는 구역)을 클리어하면 다시 몬스터와 퀘스트가 리젠되지 않는다. (각 게이트 공략상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링크)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마정석이 계속해서 토출된다는 점인데 비록 한 달에 정해진 양이 있어서 무한 공급은 불가능.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인간이 사용하기엔 충분하단 연구 결과가 나왔다. (문제는 9개 중 5개를 거대 기업과 길드에서 독점하고 있는 것이 문제)
“마정석? 이건 또 뭐야. 설마 내가 아는 그거 말하는 건가?”
마정석이라 함은 판타지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마법적 산물이었다.
마력적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는 돌로 마법을 쓰거나 마도구를 만들 때 사용되는 거로 나오는데 조금 더 찾아보니 실제로도 그 목적과 부합하는 것 같았다.
“그냥 대부분 소설이나 만화 같은 곳에서 나온 단어들로 이름을 붙였나. 너무 성의 없는데….”
시현은 생각보다 알아야 하는 정보가 많아지자 다시 한번 미간을 꾹꾹 누르며 다시 글씨로 빼곡하게 차 있는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게이트가 나타나면 그 에너지 점을 중심으로 주변이 게이트 내부의 환경으로 침식되기 시작한다.
그러다 헌터가 게이트 처리에 실패하거나 기간을 넘기게 되면 침식된 공간과 내부의 농도가 같아지며 브레이크가 일어난다.
(일반인 같은 경우 마력에 휘말려 몸조차 찾지 못하니 극도로 주의할 것)
-가끔 처음부터 폭발하기 직전의 게이트가 나타날 수도 있는데 그건 주변에 A급 헌터라도 없는 한 답 없다. 그냥 폭발 게이트가 네 주변에 안 나타나길 기도해라.
시현은 생각보다 심각한 사항에 머리를 부여잡고 작게 앓는 소릴 내뱉었다.
‘그러니까 친구들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는 거지.’
그제야 하정의 눈빛이 왜 그리 아팠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시현은 그 와중에도 크게 슬퍼하지 못하는 저 자신이 지겨웠다.
누군가가 죽은 걸 슬퍼하기엔 자신은 죽어 가는 것들을 너무 많이 봐 왔다. 아무리 게임 속이었대도 죽어 가며 고통스러워하는 건 그들도 똑같았다.
“돌겠네.”
사실 언젠가는 혹시나 태운이를 데리고 자신의 세상으로 떠날 수 있지 않을까 아주 긍정적인 망상을 해 봤던 때도 있었다. 현실 인간인 저도 게임 속으로 들어갔는데 게임 캐릭터도 현실로 나오지 못할 게 뭐가 있냐는 사고였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제는 그 애가 이곳에 오지 못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이트 폭발은 정말 말 그대로 천재지변이었고 이제 이곳은 자신도 모르는 일들이 수없이 터져 나와 조금도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그러니 분명 제대로 태운이를 케어해 줄 수 없었을 게 뻔했다.
“그게 당장 닥쳐올지는 모르는 거지만…. 어쨌든 각지에 죽음의 위협이 있다는 얘기잖아.”
그것도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시현은 아직 더 길게 글이 이어져 있는 창을 닫고는 컴퓨터를 끄고 다시 가부좌를 틀었다.
마음이 바뀌었다. 딱히 무언가를 해 보려는 건 아니었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제 몸을 지킬 수단 정도는 빨리 갖춰야 할 것 같았다.
‘하정이도 아무리 헌터가 됐다지만 혹시 모르니까….’
시현은 이내 잡다하게 머리를 채우던 생각들을 휘휘 내저어 없앴다. 그리고는 천천히 눈을 내리감고 가늘고 길게 숨을 내쉬며 빠르게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었다.
***
인간의 몸에는 365개의 혈맥이 있고 나이를 먹으면 그곳엔 저절로 탁기가 쌓여 기의 순환을 방해했다.
그 말은 아무리 좋은 심법을 통해 대자연의 기운을 흡수하고 열심히 연공을 하더라도 효율이 뚝 떨어진단 뜻이었다. 그렇기에 어린 나이가 아니라면 상승의 경지는 바라지도 말아야 했다.
그래, 보통이라면 그랬겠지만, 어찌 된 게 시현의 혈맥은 이전과는 달리 텅 빈 8차선 고속도로처럼 뻥 뚫려 있었다.
원인은 ‘초기화’.
제가 게임 안에서 10년간 영약들과 영초들을 입에 달고 살았다지만 자신은 23살에 그곳에 떨어졌고 당연히 몸을 완전히 깨끗이 만든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현대로 오자마자 능력치를 모조리 뺏어 가는 대신에 예상치 못한 이득을 얻었다.
“아, 개운하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시현이 탄력 있게 몸을 튕겨 단번에 일어섰다.
배꼽 아래 있는 단전에는 비록 양은 적었으나 과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안정적인 기운이 촘촘하게 뭉쳐 있었다.
잠시 사지를 돌리며 스트레칭을 한 시현은 느긋하게 창가로 걸어가 밖을 바라봤다.
여전히 자리하고 있는 시야를 막는 높은 빌딩과 전각들, 그리고 가끔은 하늘을 가르고 날아다니는 사람까지.
새삼 며칠 만에 이런 것들에 익숙해진 제 모습이 어이가 없었다.
“아니지. 며칠이 아닌가.”
시현이 핸드폰을 들어 올려 날짜를 확인했다. 정확히 30일. 현실로 귀환한 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었고 당연히 혼자 지낸 지도 그만큼 됐다는 뜻이었다.
갑자기 흐려지는 기분에 시현은 애써 제 마음을 모른 척하며 억지로 오늘 있을 약속을 상기시켰다.
어젯밤. 꽤 늦게 하정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그리고 시현은 그제야 현재 자기 집 상태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동네에 새로 생긴 건물들 봤지. 그거 백화 길드랑 예일 길드 건물이거든. 하아…. 그거 때문에 너희 집 전셋값이 많이 올라갔어. 사실 내가 임시로 해결해 두긴 했는데, 조만간 집을 빼든 해결을 해야 할 것 같아.
“뭐…? 대체 얼마…. 아, 아니야 잠시 말하지 말아 줘…. 일단 진짜 미안하다.”
“하아….”
그러니까, 제 발목을 잡은 건 또 돈 문제였다.
실제로 몬스터들과 능력자들이 판을 치는 지금 세상에선 그 무엇보다 유명한 길드 근처의 땅이 제일가는 노다지였다.
흔히 권력자들이라는 것들도 앞다투어 그 근처 땅을 사수하려 노력했고 직접 살기 위해 이사까지 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길드 두 개라니. 전세금이 대체 얼마나 올랐냐고 물어보는 것조차 무서웠다.
게다가 임시로 해결했다는 건 하정이 돈을 썼다는 것일 테다. 그러나 어떻게 했는지 궁금증이 들기도 전에 어차피 그것도 갚아야 할 빚이라는 생각에 저절로 목이 턱 막혀 왔다.
“어쩐지 주변에 공사가 끊임없이 이어지더라니….”
시현은 암담한 상황에 한숨을 푹 내쉬다가 더듬더듬 은행 어플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3년 만에 뭐가 이렇게 바뀌었는지 설치하란 것도 많고 용어도 어려워 결국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쥐고 있던 핸드폰을 내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폭-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금속 덩어리가 아주 안정적인 포물선을 그리며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갔다.
결국 한참을 집 안에서 꾸무럭대던 시현은 나가기 싫어 죽겠는 몸을 이끌고 힘겹게 은행을 방문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개 같은 현실을 맞닥뜨려야 했다.
“죄송합니다. 정시현 씨께선 현재 추가 대출은 어렵습니다.”
“예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군데 은행을 다니며 문의를 해 봤지만 당연하게도 백수인 자신에게 돈을 빌려주는 곳은 없었다.
게다가 그 와중에도 꾸준히 나간 대출 이자는 통장을 무척이나 가볍게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당장 부정적인 결과가 눈앞에 닥치자 괜히 서러워졌다.
그래도 근 10년간은 퀘스트 보상으로 쥐어지는 돈으로 모자람 없이 살았었는데 현실로 되돌아오자마자 이리저리 치이니 무공이고 나발이고 점점 뭘 하고 싶은 의욕이 사라져 갔다.
“씨발…. 살기 싫다.”
그러니까 하정과의 약속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지 다른 대단한 목적을 가지고 정한 게 아니었단 말이었다.
시현은 대충 검은 모자와 검은 옷으로 둘러싸고 집 밖을 나섰다. 그리고 약속 시간보다 조금 먼저 도착해 근처 카페에 들어갔고 곧 메뉴판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세상은 뒤집혔는데 왜 핫이랑 아이스는 아직도 가격을 다르게 받는 걸까.’
순간 가벼워진 제 통장을 떠올린 시현은 잘 먹지도 못하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창가 쪽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주변은 더 이상 둘러보고 싶지 않았다. 저 둥둥 떠다니는 조명부터 무슨 게임에서나 볼 법한 조형물들과 건물들까지.
이전과 확연하게 달라진 주변 모습에 계속 괴리감을 느꼈고 동시에 세상과 동떨어지는 기분만 들었기 때문이었다.
십몇 년간 현대인으로 살았던 시간이 지금은 조금도 도움이 안 됐다.
제게 남은 건 무인으로 살았던 삶이 대부분이었기에 시현의 입가로 작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야, 야!! 저 앞에 게이트 생겼나 봐! 구경하러 갈래?”
“미쳤냐?”
“아 왜애. 혹시라도 신류하 님 오실 수도 있잖아”
그때 잠시 핸드폰만 들여다보며 옛날 게임들은 어떻게 됐는지 둘러보는 도중 갑자기 들려오는 게이트라는 단어에 시현은 제 뒤에 있던 두 명의 대화에 슬쩍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더 대화가 진행되기도 전에 여유롭던 카페 안이 잠시 술렁이더니 작은 비명을 시작으로 손님 직원 할 것 없이 미친 듯이 밖으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