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유자 10년 만에 돌아왔더니 헌터란다-1화 (1/146)

#1

“으악!!! 부, 불이야!!”

“지금 안쪽 창고에 불이 났단 말입니다!!! 빨리 단주님께 보고해야 합니다!”

물동이를 지고 뛰어다니는 사람들과 어쩔 줄 모르고 소리만 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이곳은 곧 있을 비밀스러운 경매가 치러질 장소 중 하나였다.

시현은 마치 저도 거기에 속하기라도 한 양 잔뜩 불안한 얼굴을 한 채 이리저리 뛰어다니면 물을 길어 나르는 중이었다.

‘기름을 그렇게 부었는데 쉽게 꺼질 리가 없지.’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제는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며 일렁이던 불길이 옆에 있는 전각에도 옮겨붙자 시현은 은근슬쩍 기척을 죽여 반대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제가 불을 낸 전각은 오늘 있을 경매의 가장 뒤쪽에 나올 물건들을 정리해 둔 곳이었다. 그러니까 아주아주 귀하고 비싼 것들이 가득 찬 곳이란 뜻이었다.

“아, 빨리 해결하고 현실로 돌아가고 싶다.”

물론 경매품에는 관심도 없는 시현은 곧 만나게 될 이 세상의 주인공을 떠올리며 작게 푸념을 내뱉고 있을 뿐이었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시작된 연계 퀘스트의 마지막 단계가 바로 코앞이었다.

그래도 몇 달에 걸쳐 이어졌던 기다란 퀘스트의 클리어가 곧이라는 생각에 발걸음이 점차 경쾌해졌다.

그러나 조금 신이 나던 기분은 눈앞에 큰 궤짝이 보이자마자 뚝 떨어지며 허탈감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분명 미니맵에 표시된 위치는 여기가 맞았다. 그러나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방치된 곳은 쇠사슬로 감겨 덩그러니 놓인 궤짝 말고는 잡다하게 쌓인 부서진 상자들뿐, 도저히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상상할 수가 없는 환경이었다.

“뭐야. 미니맵 이거 고장 났나?”

그때 그 궤짝 안에서 일반인이라면 못 듣고 지나칠 정도로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시현은 처음 겪는 상황에 곤란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 나무 궤짝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하하.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기다가 가둬 놨겠어….”

순간 불길한 침묵이 난잡한 주변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젠장.”

시현은 급하게 숨겨 둔 단검을 뽑아, 내기를 불어 넣고는 동여매어 있는 사슬을 빠르게 잘라 냈다. 그리고 틈 없이 맞물려 있는 무거운 뚜껑을 단번에 열어젖혔다.

“미친 새끼들.”

정말 앙상한 아이였다. 산발이 된 검은 머리와 넝마라고 해도 믿을 천 쪼가리를 둘러 입고 있는 상처투성이 아이는 휴지 조각처럼 궤짝 안에 구겨져 가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아무리 주인공에게 시련이 필요하다고 해도 이런 처참한 상황까지 상상했던 건 아니었다.

자신도 꽤 불우한 인생을 살아왔다 생각했지만, 이 상황은 그것에 비할 바가 되지 않았다. 저절로 안쓰러운 맘이 들어 반듯한 눈썹이 주욱 처졌다.

“저기. 괜찮아? 구해 주러 왔어.”

안에 있던 아이는 그제야 문이 열렸다는 걸 느꼈는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소년은 세상을 감옥 같다고 생각했다. 온통 캄캄하고 아무것도 없었으며 벗어날 여지조차 조금도 주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의미도 모른 채 막연히 존재만 하던 제 앞에 조금 어두운 갈색빛을 한 형체가 비쳐 들어왔다.

그것을 인식하자 물감이 번져 나가듯 주변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조금 어지러웠으나 곧 푸른빛이 몰려와 파편처럼 흐드러졌다.

그리고 마지막은 따뜻한 목소리였다.

“구해 주세요.”

피딱지가 앉아 꺼끌꺼끌하게 말라붙은 입 밖으로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그러자 아름다운 갈색빛의 눈동자가 일그러지는 눈꺼풀에 조금 가려졌다.

아쉽다. 무의식적으로 초조한 감정이 드는 것 같았다.

“늦게 와서 미안해.”

푸른빛의 경장을 입은 그가 그 좁은 곳에 몸을 숙여 제 몸을 가볍게 안아 들었다.

그 순간 무언가가 깊게 틀어박힌 듯 찌릿하면서 가슴팍 안으로 날카로운 통증이 꽂혀 들어왔다. 태운은 그게 뭔지 아직 잘 알 수 없었지만, 꽤 기껍다고 느꼈다.

***

[system: 12장. 마교를 장악하십시오.]

“후우….”

시현이 제 눈앞에 둥둥 떠 있는 푸른빛 반투명 창을 흘깃 보고는 한 걸음 옆에 있는 너럭바위 위에 힘없이 걸터앉았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야.’

수많은 전투로 가득했던 10년간의 고생스러운 여정이 곧 끝날 거라는 생각에 벌써 긴장이 풀어지려고 했다.

그러나 그 기대감의 안쪽에 자리한 본심은 사실 이 퀘스트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이젠 돌아가고 싶지 않은데….’

시현은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검면을 옆에 있던 넓은 잎을 뜯어 대충 닦으며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그때 허스키한 미성의 목소리가 머리를 숙이고 있던 시현의 정수리로 꽂혀 들었다. 시현이 조금 우울해지려 했던 마음을 빠르게 정리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씩 웃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하얗고 갸름한 얼굴에 오목조목하게 들어찬 이목구비, 그와 상반된 한없이 어둡게만 보이는 흑단 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미인과 눈이 마주쳤다.

조금 뾰족하게 올라간 눈과 붉은 입술을 한 남자는 작게 울상을 지으며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착하긴.”

시현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연태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이 상황의 발단은 9년 전.

시현은 오랜만에 주어진 긴 휴가를 앞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보다 게임을 좋아했던 만큼, 당연히 휴가 첫날부터 집에 박혀 장바구니에 넣어 놨던 게임 리스트를 훑어봤을 뿐이었다.

“어? 무협 게임이네. 내가 언제 이런 걸 장바구니에 넣어 놨지. 블랙소울 같은 건가?”

순간 화려하고 세밀한 그래픽의 썸네일이 단번에 눈 안으로 틀어박혀 왔다. 당연하게도 평소 판타지와 무협을 좋아하던 시현은 제 눈을 사로잡는 그 게임의 이름을 클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와 그래픽 미쳤네.”

게다가 상세 페이지로 넘어가자마자 메인에 걸려 있는 트레일러 영상이 시현의 말초 신경을 강하게 자극했다.

영상은 마치 실제 전투처럼 생생했는데 1대1 전투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이들이 부딪히는 거대 전투 역시 소름 돋을 정도로 현실감 있게 표현되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런 고퀄리티의 게임이 여태 묻혀 있었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였다.

“아니면 영상만 영혼을 갈아서 만든 건가? 그래도 이 가격이면 어느 정도 퀄이 있단 얘긴데….”

시현은 9만 원이란 가격에 아주 잠시 구매를 망설였지만, 이상하게도 자꾸만 아른거리는 잔상에 결국 눈을 꾹 감고 결제 버튼을 눌렀다.

‘그래, 이러려고 여태 쎄빠지게 돈을 벌어 온 거 아니겠어.’

금방 결제가 됐다는 핸드폰 진동 소리가 울렸다. 시현은 설치를 알리는 로딩창이 빠르게 차오르는 걸 보다가, 금세 나타난 설치 완료 표시에 기다릴 새 없이 빠르게 게임을 실행했다.

그리고 제 눈에 보이는 버튼 두 개를 보며 짧게 웃었다.

“오, 요즘은 마교가 대세지.”

진영을 고르는 두 개의 선택지가, 엄청난 그래픽의 배경 위에 무심하게 떠올라 있었다.

시현은 아무 생각 없이 마교가 쓰여 있는 버튼 위로 커서를 옮겼고, 앞으로 달라질 제 인생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채 신나서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딸깍.

마우스를 클릭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순간 화면에서 눈을 찌르는 빛이 터져 나왔고 동시에 시현은 낯선 곳에 떨어졌다.

그리고 인적 없는 숲의 가운데에서 눈을 뜨자마자 어이없게도 반투명한 창이 나타나 다짜고짜 퀘스트를 주기 시작했다.

[system: 주인공을 천마로 만들어 중원을 장악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스토리가 끝날 시 다시 현실로 되돌려 드립니다!]

시현은 무척이나 당황했지만, 상황은 이미 들이닥쳤다. 얼마간 현실을 부정하며 돌아갈 방법을 강구했으나,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것 외엔 이곳에서 버텨 나갈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그 이후로 퀘스트를 따라 달달 구르다가 노예 시장에 있던 앙상한 주인공 아이를 구해 냈고, 몇 년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이겨 내며 차근히 끝을 향해 달렸다.

물론 처음엔 말도 안 하고 무뚝뚝했던 아이 때문에 얘를 데리고 언제 하나하나 다 끝내나 걱정뿐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이제 자신을 스승이라 부르며 극진히 모시고 있었고 그 말은 거의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아이와 모든 걸 함께하며 많은 걸 나누었다는 뜻이었다.

‘근데 이상하게 게임 이름이 기억이 안 난단 말이지.’

시현은 대수롭지 않게 머리를 긁적이다가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선을 내렸다.

“어디 객잔이라도 찾아가고 싶지만…. 죄송합니다. 스승님…. 괜히 저 때문에.”

“아니! 그게 왜 너 때문이야. 전혀 아니야.”

잠시 다른 생각을 한 사이에 벌써 검붉은 루비 같은 눈동자가 점점 촉촉해지고 있었다. 시현은 기겁하곤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태운의 머리를 품에 끌어안았다.

“제 사사로운 복수 때문에 늘 스승님이 고생하는 것 같습니다.”

“마교 놈들이 나쁜 거지. 너는 그냥 앞만 보면 돼. 다른 건 내가 다 보조해 줄 테니까 알았지?”

비록 피범벅이 된 시체 조각들이 즐비한 이곳에서 할 만한 행동들은 아니었지만 시현에게는 일단 태운을 먼저 달래 주는 게 제일 중요했다.

이 세상의 주인공인 연태운은 게임 설정상 현 천마의 사생아로 게임 주인공답게 천재적인 지능과 오성,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잘생긴 외모를 가진 캐릭터였다.

비록 어렸을 때는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처럼 작고 앙상해 얘가 진짜 주인공이 맞냐는 말이 절로 나왔었지만 말이다.

‘그치만 지금은 말도 안 되게 수려해졌지….’

게다가 자신이 스킬에 의존해 억지로 시전하던 초식들도 단 한 번만 보고 손쉽게 익혔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성인이 됐을 땐, 이제 초식이라는 것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 초강자가 되어 있었다.

‘솔직히 능력만 보면 이젠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마교 따위는 손쉽게 손안에 넣을 것 같지만….’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생각보다 더 야만적인 무협 세상에 충격을 받은 현대인 정시현이 저도 모르게 연태운을 너무 품에 안아 키웠다는 거였다.

한참을 문제를 모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려 보니 연태운은 잔인하고 무서운 무림인이 아니라 말랑하고 착한 솜뭉탱이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마냥 심약하게만 키운 건 아니었는데 대체 왜 이렇게 됐지.’

연태운은 얌전히 시현의 품에 안겨 토닥임을 받다가 또 무슨 자책 어린 생각을 했는지 이내 시현의 허리를 세게 끌어안고 힘겹게 숨을 토해 내고 있었다.

윽.

며칠 동안 쉼 없이 이어진 전투에 가뜩이나 삐걱대는 허리에서 와드득하는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사실 저보다 훨씬 강해진 힘에 이제는 이런 식으로 달래 주는 게 조금 버거웠지만 그래도 이렇게 힘겨워하는 걸 보면 마음이 약해져 쉽게 뿌리치기가 어려웠다.

‘아이고…. 이런 천마가 세상에 어딨냐고요…. 내가 본 소설들 다 어떡할 건데.’

시현은 한참 연태운을 달래다가 하늘 한가운데 걸려 있던 해가 조금 기울 때쯤 퀘스트창을 몰래 확인하며 다시 한번 계획을 다잡기 시작했다.

그 순간 말랑하게 풀려 있던 태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으며 촉촉하게 젖어 든 눈빛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대체 제게 무엇을 숨기시는 겁니까, 스승님.’

태운은 시현의 주변을 맴도는 푸른 빛을 없애 버릴 기세로 조용히 쥐었다. 그러나 곧 연기처럼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것을 보며 눈동자 밖으로 빠져나오려고 하는 감정을 빠르게 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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