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태경의 얼굴.
그것은 어른거리는 물기로 쉴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침의 새소리와 뜨겁게 느껴질 정도로 따뜻한 그의 나신. 그리고 내 가슴으로 바로 전해지는 격한 심장박동의 느낌. 쓰고 맵게 느껴지는 담배 냄새.....
이런때 담배라도 피울 수 있다면 나는 울컥거리며 올라오는 이 토악질 같은 눈물을 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여간해서 잘 피지 않지만 의사는 가끔 내가 담배를 피는 것도 정신건강에는 좋다는 말을 하곤 했었다.
취미생활도 여가생활도 전혀 없이 언제나 일만하고 일만 생각하는 가엾은 일 중독자는 담배라도 피워야 한다면서 말이다.
중간에 그르치긴 했지만 뜨거운 정사의 열기가 남아있는 부드러운 입술은 울음소리를 참아보기 위해 깨문 이빨의 위력으로 비린 피맛을 입안으로 흘려넣고 있었다.
담배?
태경은 담배를 피지 않았다. 아니, 나는 그가 담배를 피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지금 간절하게 담배를 피고 싶지만 침대 헤드로 손목을 묶여 있는 상태로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마술사가 아니다.
소금에 쩔어버린듯 슬픔으로 몸부림치는 생각의 끄트머리에도 알 수없이 알싸한 담배 냄새에 대한 의구심은 불쑥 버릇없는 못처럼 튀어 나왔다.
나는 천천히 이 알 수 없는 담배 냄새를 향해 머리를 돌렸고 그곳에는 문설주에 등을 기댄체 삐닥하게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몇번이고 눈을 깜빡여 환상을 지워보려 했지만 어른거리는 커다란 사내의 몸집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채 그곳에 불량스럽게 서 있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그는 적어도 내 앞에서는 기분 좋게 느껴지는 웃음을 한번도 지우지 않았다.
가끔 내가 에이즈나 걸려버려라 이 난잡한 바보놈아!!! 하는 따위의 욕을 하면 빈정이 상한듯 미간을 찡그리기는 하였지만 절대로 화를 내거나 화를 참는듯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지금의 그도 별일 없다는듯 불량스럽게 오른손에 불붙은 담배를 끼워들고 왼손으로는 포켓 재떨이를 들고 서서 웃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게 꿈, 혹은 환상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계속 눈을 깜빡이며 내가 이 알 수 없는 혼돈 속에서 미치지 않게 빨리 제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주문만 되풀이하였다.
내가 그를 보았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았다는듯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규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담배가치를 끼우고 있는 그의 손가락은 정확하게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합의 한 거야?”
크고 묵직한 목소리였다.
태경이의 목소리는 남자답지만 어딘지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이고 또 그래서 더 섹시하게 느껴지는데 반해 그의 목소리는 크고 무거우면서 기분 좋은 떨림이 있는 굵은 것이었다.
합의.... 한 거냐구?
[쳇!]
하는 소리와 함께 제 마음껏 사출해 버린 태경의 성기가 나를 빠져나갔다.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는 규태의 웃는 얼굴.
그리고 제 몸을 내게서 빼어내자마자 재빨리 이불을 가져다 내 가슴까지 꼼꼼히 덮어주는 태경의 찡그린 얼굴.
쿵. 쿵. 쿵.
불길한 전조처럼 커다랗게 느껴지는 심장박동 소리가 머리 속으로 울리는 것 같아 나는 한참동안 그저 작게 입을 달싹거렸지만 아무것도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까맣게 사위어드는 어둠 속에서 울고 있는 어린 남자아이의 발 밑에는 진득거리며 악취와 끈적임을 가진 불결한 피와 고름이 그림자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부정의 말들을 끌어안으며 그 아이가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될 때까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지켰는지 나는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지킨 방법.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고통을 외면하고 부정에서 눈을 돌려 버리는 것.
그래서 결국에는 자신조차도 절실하게 그의 것이었던 슬픔과 부정과 고통을 망각해 버리는 것.
천천히 나의 차고 맑은 내면 속에 흉흉한 과거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역겨운 고름주머니와 말라붙은 피딱지 아래 거침없이 뛰고 있는 내 심장처럼 시뻘겋게 아가리를 벌리는 상처가 균열하기 시작했다.
괜찮다고. 아무일도 없었다고 지워버린줄로만 알았던 모든 것이 고스란히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쩍하고 입을 벌린 채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원래 주인이 돌아왔으니 샛서방은 사라져야 겠지?”
나를 엄습하는 어둠과 공포 속에서도 나는 비교적 명확하게 방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볼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이상하게도 나는 바로 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엄청난 감정의 동요 속에서도 작게 바스락거리며 태경이 바지를 주워 입고 바지 지퍼를 올리고 버클을 채우는 작은 소리까지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후후후 하고 낮은 소리로 웃고 있는 규태의 숨소리와 그가 내뱉는 담배 냄새 그리고 그의 포켓용 재떨이에 담배가 부벼 불씨를 저무는 소리까지 확실하고 명확하게 듣고 보았다.
규태는 딸칵 하는 소리를 내면서 포켓용 재떨이를 닫아 바지 주머니 안에 집어넣고는 다시 아무것에도 흐트러지지 않은 곧은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무언가 그에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아무리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이끌어 내보아도 나는 그저 작게 입술을 달싹거릴 수 있을뿐 내 의사를 표현하는 소리는 소리가 되어 나와주지 않았다.
“영신아. 합의 한거야 이거? 대답해 줄래?”
“뭘 묻습니까. 버젓이 보시면 모르십니까? 합의한 관계에서 저렇게 묶어놓고 박아대는 건 변태들이나 좋아하는 짓이지요. 규태 형님의 소중한 여왕님을 규태 형님 부재를 틈타 늑대 같은 이 몸이 잠깐 맛을 봤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침이 부서지는 벗은 어깨를 하고 태경은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우습게도 이런 상황 이런 시간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태경은 그렇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웃고 있는 태경을 바라보는 규태의 얼굴은 그날 그 병실에서 내가 처음 의식을 차렸을때처럼 무섭게 이글거렸다. 아니, 웃는 입매 그대로 그의 눈이 너무도 차갑게 가라앉아 있기 때문에 더 그를 경직되게 보이도록 만드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같은 곰이라도 태경이 아메리칸 불곰이라면 규태는 반달곰이다.
태경이 노련한 도둑고양이라면 규태는 유연한 사자일 것이다.
체격이나 급수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관심이 없는척하고 있지만 규태가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나를 겁탈 한 것이 태경이 아니라 규태였다면 나는 그야말로 아홉토막나서 야산에 버려질 각오를 해야 했을 것이다.
유연하게 이 퍼포먼스를 즐기면서 내기니 뭐니 하는 말같은것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같은 상황이라해도 태경이라면, 그라면 나를 해치거나 내가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으로 나를 밀어 넣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그의 본성에 대한 판단이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무력하게 침대에 누워있었지만 나와 마주보고 내내 웃고 있던 규태가 문지방 너머 사라지자마자 찍 소리도 낼 수 없는 목을 가혹하게 두들겨 모기소리만큼 작은 소리를 내야 했다.
반드시... 나는 그렇게 해야했다.
“도망가....”
태경은 내가 지금 이 상황에 그런 말을 한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다는듯 둥그렇게 커다란 눈을 뜨고 그 맑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차분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였다.
그리고 반질반질 손길이 잘 나있는 죽도를 들고 규태는 다시 그가 사라진 문지방을 넘어 나의 침실로 들어섰다.
이번에는 웃는 얼굴로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강직한 턱과 튼튼한 목을 너머 어깨는 경직된 채 태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현장에서 걸린 절도범에 대한 예우는 해주어야 하는 거겠지?”
천장까지 닿을 만큼 규태의 죽도는 아주 천천히 쳐들어 올라가고 있었다.
내 공포와 나를 뒤흔드는 데쟈뷰와는 달리 태경은 태연한 얼굴이었고 그는 언제나 웃는 얼굴로 호탕하게 말하는 규태라는 인간의 무서움을 전혀 실감하지 않는다는듯 규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는 꽤 홀가분한 그런 표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태경은 아주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그의 어깨로 와 부딪히는 죽도로 얻어맞을 때까지는 내가 정확히 볼 수 있는 평온하고 아름다운 얼굴인채로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태경에게는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에게 딱! 하고 내려치는 그 소리는 내가 나를 놓아버리는 시발점에 불과했다.
힘이 약해서 누군가에게 굴복하는 것은 절대로 장난이나 우스운 일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숨도 쉴 수 없을만큼 몰아쳐 대는 폭력 앞에서 비굴하게 몸을 낮추는 것.
걷어 채이고 두들겨 맞는 부분의 고통보다 더 비참한 것은 나를 부정당하고 내 존재의 가치마저 뒤흔드는 폭력이라는 몹쓸 행위에 무릎꿇는 나 자신이다.
나는 수도 없이 그것을 경험하였고 또 비겁하게 달아났다.
나를 품어 세상에 낳은 내 어머니를 여전히 그 고통스러운 폭행의 현장에 내동댕이쳐놓고 나는 달아났다.
오늘도 아니 지금 이 시간도 어머니는 그의 주먹질에 멍이든 눈을 하고 있을텐데. 그의 발길질에 토악질을 하면서 동그랗게 몸을 구부리고 오열하고 있을 것인데 나는 그것에서부터 달아나 버렸다.
내가 버린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면서 고개 돌리기를 부정했던 진실이 무엇인지. 나는 어째서 아무도 견뎌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혼자만의 무인도에서 그토록 평온하게 살 수 있었는지...
모든 것은 그다지 큰 소리도 아닌 규태의 죽도가 딱! 딱! 하고 무언가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두꺼운 알껍질이 균열되는 소리를 내며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내가 버린것. 내가 지켜야 했던 것. 그리고 내가 그토록 간절하게 바라는 것.
“아.....”
나는 이십년 가까이 그것에서부터 기를 쓰고 달아나고 있었다.
여전히 내 발목에는 절대로 끊어낼 수 없는 동아줄이 매달려 있는 것을 모른채 나는 어둠 속에서 그저 열심히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운동하는 물체는 계속 운동하려고 하는 특성을 가진다는 물리학 법칙처럼 처음에는 내가 달아나려는 대상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것도 망각한 채 나는 무작정 달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무거운 다리가 더 이상 의미 없는 제자리 뛰기를 멈추고 내가 지금 서 있는 바로 이곳을 보았을 때 그제서야 나를 둘러싼 알은 팟! 하는 소리를 내며 와장창 깨어져 버렸다.
“아악! 아아아아악!!! 아아악!!!!!!!!!!!!!!!!!!!”
발작을 일으키는 간질환자처럼 나는 무작정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내 손목을 단단하게 묶고 있는 비단 끈으로 쓸려나간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그 자리에서 새빨간 핏물이 베어나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나는 무의식의 공포 속에서 미친놈처럼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절박한 외침으로 나는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내 알속의 시간을 부여잡기라도 할듯 그렇게 온 힘을 다해 달아나려고 하였다.
이미 그런 나의 발작을 경험한 적이 있는 규태보다도 먼저 몸을 움직인 것은 찢어진 눈썹에서 피를 펑펑 흘리고 있는 태경이었다.
그는 엄청나게 아플텐데도 불구하고. 저 야차와 같은 민 규태 놈이 누군가를 죽이고자 마음먹으면 그 만만치 않은 죽도의 모질기가 고문 전공의 일본인 순사 못지않을텐데도 번개처럼 몸을 날려 발버둥치는 나를 껴안았다.
피가 줄줄 흐르는 내 팔목의 비단 끈을 풀고 덫에 걸린 짐승처럼 온 힘을 다해 퍼득거리는 나를 죽어라 껴안고 있었다.
미친듯이 박동 하는 내 심장을 꽉 붙들어 더 이상 발버둥치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태경은 튼튼한 가슴 안에 잔뜩 힘주어 나를 가두면서 아무리 애를 써도 그 팔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혼이 빠져나간다고 해야할까?
나는 이 방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전혀 상관이 없는 타인처럼 냉정한 눈으로 그런 모든 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경의 품안에서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치는 나도, 피가 철철 흐르는 얼굴을 하고도 죽어라 나를 껴안고 있는 태경도. 조금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손에 쥔 죽도를 늘어트리는 규태도 나는 무심하고 냉정한 눈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것인데 내 영혼은 마치 육체를 빠져나온 사람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아 그 세 사람의 기묘한 대립과 알 수 없는 관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이.... 이긴 거야.”
내가 이겼다? 무엇에서? 무엇으로부터? 나는 뭘 이긴거지?
나는 망연자실 침대 위에 앉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철벽같은 담벼락으로 안전하게 둘러쌓았다 생각했던 나의 세상은 태풍아래 찢겨나간 비닐하우스처럼 부질없는 것이었다.
이만큼의 자극으로도 충분히 헤지고 사라질 수 있을 만큼 연약한 유리의 집에서 나는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채 내 자신이 만들어낸 망상이라는 양수 속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마치 정해진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처럼 부자연스럽지만 너무도 당연하다는듯 그렇게 일어나고 있었다.
내 마음을 깨우는 것.
무엇도 아닌 내 마음을 잠들게 했던 그 폭력 아래서 라는 우스운 설정.
억압과 폭력 굴종과 비참함 속에서 내가 내 스스로를 진실된 눈으로 바라볼 때까지 끝없이 나를 채찍질하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나는 기억해야 했다.
나를 부정한 사람은 아버지였고 나를 돌봐오던 사람은 나의 아버지에 그 누구보다 유사하다고 생각한 민 규태였다.
어쩌면 내가 껍질을 벗고 나오도록 나를 들볶는 것은 규태의 역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내 칩거된 삶의 시작부터 함께였고 지금 내 두꺼운 껍질이 벗겨져 나가 고름과 피를 흘리는 상처가 태양아래 드러날 때까지 내 곁에 있었던 사람인데도 그는 이번 일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태경이 내게 준 것은 나를 볼 수 있도록 정직하게 나를 비추는 그의 눈이었다.
그의 까만 눈동자는 때로 상처 입은듯 흔들렸고 때로는 잔인하게 번뜩였다.
나는 그의 눈 속에서 마침내 나를 본 것이고 그 결과는 참혹하리 만치 비참한 것이었다.
내가 안전하다고 믿고 있었던 모든 것은 내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 나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열일곱의 어린 소년으로 정체되어 있었다.
내 어머니를 버렸다는 죄책감으로부터 내 자신의 비굴한 지난날로부터 나는 전력을 다해 달아나고 있었고 나는 결코 뒤를 돌아보거나 나를 비출 거울 따위를 바라보지 않았다.
겁탈하고 모욕하고 셀 수 없이 나를 뒤흔들며 내가 마침내 그의 눈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차가운 메스로 도려내는듯 내 상처를 쑤시던 모든 일은 중단되었다.
내가 섹스를 싫어하는 이유. 내가 어설픈 금욕주의자를 표방하며 언제나 마음으로만 누군가와 간음했던 이유.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사람과의 관계를 만들지 않고 언제나 혼자만의 신경증 환자처럼 날카롭게 가시를 세운 채 아무도 내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던 이유.
나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외면하고 있었다.
거짓을 세뇌하여 진실로 만들어 버리듯 진실을 외면하여 무로 만들어 버리는 것.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게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면 누구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의 시간인 것이다.
내가 선택한 간단한 도피 방법을 깨기 위해 태경은 미친듯이 내 성의 문을 두드렸는지도 몰랐다.
그가 목이 터져라 내 이름을 부르며 자신을 보라고 한 것.
내 앞에 있는 사람. 나를 겁탈하고 나를 괴롭게 만드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본 이유.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냐고 물어본 이유.
그는 어쩌면 내 앞에 나를 괴롭거나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버지가 아닌 한 태경이라는 인물이라고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고 내가 정지해 있던 시간 속에서도 세월은 무탈하게 흘러 나는 이미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쉽사리 다치지 않는 성인이 되어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벌레처럼 내 살갗을 파고들어 고름주머니를 만들고 있는 숱한 기억의 오류들을 그는 하나하나 찢고 터트려 그 안에 점점 썩어 가는 나를 깨우고 있었다.
어째서 그런 극단적인 수단을 택했는지 그는 어째서 나를 설득하는 것이 아닌 나를 억압하는 것으로 나를 깨웠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그의 존재 유무를 떠나 일단 내게 온 나의 새로운 시간을 맞아들이기에도 힘에 겨울 정도로 현실과 몽상의 괴리에 헉헉대고 있었다.
이렇게 태경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것도 이상심리의 전형적 증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과정보다 결과를 보아야 했다.
그가 내게 남긴 결과 너무도 고통스럽고 또한 너무도 힘에 겹지만 내가 돌아 봐야 하는 나라는 사람의 실체를 나는 더 확실하게 응시해야 했다.
한 태경이 내게 무슨 짓을 하였고 그것이 얼마나 나쁜 짓이고 하는 일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 영신아?”
나는 규태가 방에 들어온 기척도 느끼지 못할 만큼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다.
그는 잘 다림질되어 있는 내 옷을 내밀며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고 상냥한 얼굴로 침대 한 켠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묵직한 그의 무게로 삐걱대며 매트리스의 스프링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규태가 건네준 실로 오랜만에 입어보는 내 옷을 천천히 걸쳐 입기 시작했다.
“......”
“......”
규태는 너무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가 곰이 커다란 앞발로 새끼 손톱만한 종이 학을 접는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완전히 비워진 내 속의 빈 방에 지금 내가 앉아있는 이 방과 이 침대가 그러하듯 커다란 햇살이 달콤한 향기를 뿌리며 들어서고 있었다.
비록 내 안에 있는 그 빈방에는 아직 끈적거리는 고름과 종기와 짓이겨진 살덩이가 즐비해 처참한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빈방의 한가운데 혼자 서서 내가 왜 이 방의 문을 열고 나가야 하는지 내 발 밑에 있는 것이 안락한 보호막이 아니라, 안전한 몽상의 양수가 아니라 버려야할 비린 핏덩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를 향해 웃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 고소.... 할 꺼냐?”
“...???”
나는 내가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하는 규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태경이 말이다. 고소 할 꺼냐?”
“.......”
한 태경? 고소?
법에 그 죄를 말한다는 고소가 아니라 나는 그야말로 쓴웃음의 고소를 하고 싶었다.
“커피 타와.”
“....뭐?”
“못 알아들어? 커피 타와. 커피 아직 못마셨어.”
제 손으로는 라면 하나도 못끓이는 대단한 집안의 귀한 아들 민 규태지만 그는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그래봤자 몇 되지도 않지만) 그러하듯 내 커피를 타는 방법만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나도 꽤 엄청나게 발악을 했던 모양인지 꺽꺽 잠기는 목소리는 쉬어빠진 김치쪼가리처럼 볼품 없이 흘러나왔지만 규태는 나의 그런 모습이 안심 된다는듯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방을 나갔다.
오랜만에 속옷과 셔츠와 바지까지 차려입은 내가 천천히 거실로 걸어 나왔을 때 방에서 못한 난장판의 2부를 치르기라도 한 듯 거실은 억망진창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머그컵을 들고 주방을 나오던 규태는 머쓱한듯 머리를 긁으며 미소 짓고 있었다.
틀림없이 내 얼굴은 야차의 그것과 맞먹을 정도로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을 것이다.
그의 손에서 내 커피를 빼앗듯 받아 들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우유 껍질이 생기도록 그것을 후후 불어 식히면서 나는 소파 위에 어지럽게 늘어진 물건들을 대충 발로 밀어버리고 걸터앉았다.
섹스라는 것이 꽤나 집중해서 벌어야 하는 굉장히 민감한 행위인듯 아직도 내 비부의 깊은 곳에 남아있는 태경의 잔재는 쓰리고 아릿한 통증으로 끈적이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멍하게 뚫려 있는 구멍으로 나는 태경을 받아들이고 그 댓가로 나를 보는 거울을 얻었던 것이다.
아니... 나는 그와의 섹스-그제서야 나는 그것이 섹스임을 인정하고 있었다.-를 어떤 사람보다 즐기고 있었다.
그는 훌륭한 파트너였고 그리고 어쩌면 훌륭한 연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드디어 완성된 먹음직스러운 우유 껍질을 오물오물 씹으며 나는 입을 꼭 다문 채 코로만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영신아?”
“흐응?”
“....... 괜...찮은거냐?”
“이거 니가 다 치우고 가.”
“응?”
내 머리 속에 뚝이 넘치고 있었다.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는 나의 과거. 내가 경험했던 정지된 시간의 방치 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하는 일들.....
나는 태경과의 안락하고 아름다운 아침을 꼭꼭 숨겨둔 채 그것이 흘러 넘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흘러 넘친 단어들은 그 아름다운 아침이 아니라 몸일 꺽일만큼 고통스러운 성찰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정직한 눈동자. 나는 지금 휘몰아치는 단어들 속에서 가만히 숨을 죽인 채 그것들이 하나하나 정렬하여 내 앞에 늘어설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 한 태경이?”
“응.”
규태는 잠깐 그의 광폭한 야수성을 드러내듯 무섭게 미간을 찡그렸지만 곧 아차! 하는 표정과 함께 굳어진 얼굴을 풀어 나를 향해 웃었다.
“쫓아내 버렸어.”
“그럼 너 혼자라도 다 치워.”
“영신아?”
규태는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듯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딱 한가지 일만 하고 나서 나를 찾으러 갈 것이다.
내가 무책임하게 방기하였던 나. 잃어버렸던 나를 찾으러 갈 것이다.
이만큼 늦어버렸으니 조금 더 늦어져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 시뻘겋게 입을 벌리고 있는 내 상처를 보듬고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너무 힘에 겨워 도망가고 싶어져도 내 앞에 줄을 지어 들이닥치기 시작하는 언어들을 내 가슴으로 껴안고 내 뼈와 살을 통과해 세상에 내어놓을 것이다.
내가 그것만은 반드시 해야한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조금이라도 큰 소리를 내면 조심스러운 그것들의 발걸음이 멈추기라도 할 듯 나는 신중하고 무겁게 몸을 일으켜 난장판이 되어있는 거실 바닥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조심스럽게 걸어 나갔다.
이층의 작업실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서서 나는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려 아직도 나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작게 입을 벌리고 있는 규태를 보면서 미소지었다.
맹렬한 야수의 본능을 지니고 있는 그의 얼굴에 겹쳐 섬세하고 부드러우며 차분한 눈을 하고 있는 태경이 보였다.
한 사람은 내 멈춤의 시작을 함께 하였고 한 사람은 내 멈춤의 끝을 열어 주었다.
나는 그 두 사람 모두에게 매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나는 두 사람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무엇보다 먼저 내 안에 흐르는 글자들을 꿰맞추어 생산해 내야 한다.
그 다음의 일은 그 다음에 생각하기로 나는 그렇게 마음먹으며 불안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규태를 향해 작게 미소지어 주었다.
나는 부정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
나는 세상에 태어난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소중하고 아름다워서 절대로 부정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
비참하게 무릎을 꿇어도 가증스럽게 현실을 외면해도 그 어떤 것도 나라는 것.
껍질이 벗겨져 나간 상처가 고통스럽게 피를 흘리고 있지만 고름과 함께 흘러나오는 그 피가 멈출 때쯤이면 느리지만 확실하게 새 살이 돋아나 새하얀 흉을 남기고 아무렇지도 않게 되는 날이 꼭 올 것이다.
내가 지키고 싶은 것. 내가 돌려 받고 싶은 것. 그리고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은 그 상처가 아물어 흐릿한 흉으로 남아 있을 때 그때 생각하기로 하였다.
오늘 나는 해야할 일이 있고 내일은 반드시 다른 태양이 뜰 것이니까.
“당분간은 너도 오지 마. 나 일 할꺼야......”
비겁한 바보 룸펜,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인간 말종.
그런데다 지가 영리한 줄 알고 머리를 굴리는 멍청이.
그러니까 조금 더 오랫동안 생각해도 나쁜 것이 아니다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느리게 비명을 내지르는 나무 계단을 밟아 내 상처와 내 고통과 내 절망을 보다 확실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내 작업실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내 상처가 아물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