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9)

  

내 집은 강원도의 산골 마을에서도 산촌. 그리고 그 산촌에서도 마을 뒷산의 칠부 능선으로 구불구불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한참을 와야 하는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제법 높은 담을 만들어 놓았지만 실상 대문을 활짝 열어놓아도 숲 속을 제집처럼 헤집고 다니는 다람쥐 같은 것이나 집안을 기웃거릴까 생전 가봐야 집을 방문하는 사람도 없었다. 

회사로 원고를 전달하는 것은 인터넷이라는 굉장히 편리한 문명의 이기가 생겨버렸고, 어차피 직접 대면하는 것은 계약서를 작성할 때 뿐인데다가 그것도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규태더러 시켜버리는 고약한 습성을 가진 나는 생전 가봐야 그 집에서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발전기며 저장 식품을 보관해 놓을 수 있는 지하실도 있고 입주 가정부를 구하는 일이 비교적 신경 쓰이는 일이었지만 태경을 만나기 전에는 산아래 마을의 아낙들이 번갈아 가며 일당제로 일을 해주곤 했었기 때문에 정말로 나는 이 외진 산골짝의 생활이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람을 맞대하는 것은 내게 큰 부담을 주는 일이었고 사람 따위는 그립다는 생각 전혀 하지 않는 고약한 사람이 바로 나라는 인간이었다. 

처음 이 집의 터에 위치해 있는 흉물스러운 폐가를 구입할 때 규태는 왜 쓸 데 없는데다가 돈을 쓰냐고 나를 타박했었다. 

하지만 건물보다는 대지가 꽤 넓었던 폐가를 싹 밀어버리고 이곳에 공사를 시작하면서 행정관청의 허가를 받는 일이며 신경 쓰이는 모든 일을 해주면서 그는 마치 제집을 짓는 사람처럼 흥분했던 것이다. 

산에서 바로 내려오는 작은 실개천이 집터 바로 옆으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커다란 웅덩이를 파서는 자연스러운 연못을 만들었고 집의 설계며 구조 따위도 그의 손이 가지 않은 부분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나야 기껏 해봐야 이 집과 터를 구입하고 여기 살겠다고 말한 것이 전부였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규태를 내 마음에 들여놓지 않았다고 말을 하면서 언제나 내가 싫은 것을 규태에게 밀어버리는 못된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 그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규태는 한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으며 내가 어떤 부담도 가지지 않는 그런 태연한 얼굴로 내 뒤치닥거리를 하면서 지금껏 나를 돌봐오는 일을 떠맡았다. 

갑자기 규태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볕이 따땃한 파고라의 질 좋은 나무 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은 자세로 흔들흔들 다리를 흔들었다. 

가끔 어디로 기어 들어오는 것인지 뱀이며 쥐며 토끼 같은 손님들도 찾아오는 정원의 잘 가꾸어진 나무와 잔디로 화사한 오월의 햇살이 바삭바삭 소리를 내면서 부서지고 있었다. 

꽤 볕이 뜨거운 봄날이었지만 둥치가 굵은 등나무를 얹은 파고라에는 짙은 녹음의 그늘이 드리워져서 기분 좋은 바람만 만끽하면 되게 그런 공기가 동그랗게 모여들고 있었다. 

뽁! 소리를 내면서 연못에 키우는 잉어가 동그란 물방울을 튕겨내고 커다란 자연석 위에 노란색 나비가 살랑거리는 날개를 접고 쉬는 모양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나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나는 생각지도 않은 행운을 손에 쥔 사람처럼 흥분하고 있었다. 

나는 태경을 만난 후 줄곧 그를 상대로 음탕한 상상만을 즐겼을 뿐 그를 향해 어떤 말도 어떤 친근함도 표현한 적이 없었다. 

물론, 지금이라고 태경이 나의 어떤 부분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착각이라도. 한 여름밤의 꿈처럼 덧없이 지나는 잠깐 동안 내 망상이 만들어낸 착각이라도 지금 이렇게 태경과 함께 있는 이 시간은 충분히 즐겨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한 기망이든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어리석은 희망이든 어찌되었건 지금 이 순간은 태경과 함께 있고 그리고 그가 18일의 기한을 넘기면 나를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나는 매정하게 그를 뿌리치고 다시 내 섬에서 나 혼자만의 상념으로 관계가 아닌 망상으로만 사람을 대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하...하하... 

내 주변에 조금이라도 나를 아는 출판사의 현 부장과 대학 동기 놈 중에 유독 규태와 친하던 강일이 같은 사람들은 내가 어째서 규태와 아무사이가 아닌지 이해하지 못했다. 

두 손으로 꼽으면 충분한 나의 인간관계에 내가 게이임을 아는 사람은 현 과장과 강일이 정도가 전부였고 더군다나 내가 남자의 몸을 사랑하면서도 스킨 쉽이나 섹스를 혐오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민 규태가 유일했다. 

나는 그만큼 아무에게도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은채 나 혼자만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었다. 

몇번인가 나는 규태의 그럴싸함 그리고 규태의 변하지 않는 신중함에 나를 내어주고 싶었지만 그것 역시 나 혼자만의 망상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을 뿐이다. 

규태가 소위 말하는 날리는 테크닉의 매너 짱인 파트너라고 해도 나는 그를 허락할 수 없었고 내 망상이 아닌 실제로 누군가와 몸이 맞닿는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토악질이 날 정도로 혐오스러운 일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결국 규태건 태경이건 내가 그들을 향해 관능적인 희망을 품는 것은 내 머리 속에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 혼자만의 상상일 때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 그래서 내가 태경의 확신처럼 그에게 사로잡혀 그를 향해 엉덩이를 흔들거나 그가 없이 살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을 그렇게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비참한 착각을 일부러 유지한채 나를 겁탈한 태경이 내 곁에 머무는 것을 되도록 즐거운 방향으로 생각하려 노력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나를 아프게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남음 열 몇일의 시간 정도 내 삶에서 누군가와 함께 라는 달콤한 환상으로 채워도 좋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내 삶에 아버지가 내린 철퇴는 그런 것이었다. 

폭력에 비굴하게 굴종한 어린 아이가 폭력 앞에 바들바들 몸을 떠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내게 선물한 것은 내 생명과 그리고 내게 허락된 시간동안 아무도 내 안으로 들여보내지 못할 정도로 단단하고 높은 성벽이었다. 

불신과 두려움과 그리고 버림받는다는 것에 대한 누구보다 선명한 실감. 

버림받지 않기 위해 나는 아무것도 취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그것이 무척이나 어리석은 일이라 해도 나는 그 일을 그만둘 정도로 용기 있는 사람은 되지 못했다. 

내가 내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언제나 그에게 얽매여 있는 것처럼 내가 가지는 이 섬뜩하리만치 치졸한 이기심도 나의 평생동안 아무리 애를 써도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게 기한이 정해진 소꿉장난처럼 나의 삶에 잠깐 스쳐 가는 바람이라고 그렇게 자위하면서 내게 주어진 시간을 마음껏 즐기고 싶었다. 

“너구리 같은게 있는가봐.” 

“.....” 

태경은 한참동안 담벼락 밑둥에 있는 구멍을 메꾸었기 때문에 흙으로 더러워진 손을 연못물에 흔들어 씻으면서 중얼중얼 혼자말처럼 고약한 놈이라느니 하는 말을 하고 있었다. 

“개라도 한 마리 키워! 너구리도 꽤 위험한 동물이야 알아?” 

“나 먹을 것도 챙겨먹기 잊어버리는데 개 먹을 것 챙길 수나 있을까?” 

“하! 그렇지... 그래... 말 안하고 내버려두면 몇 일이고 꼬박 굶는 인간이 어련하시겠어?” 

잔걱정이 많은 연인을 둔 것처럼 따뜻하게 데워져오는 망상 속에서 나는 흐리게 미소를 지었다. 

산을 거쳐 정원으로 밀려오는 바람은 따뜻하고 상큼한 기운을 품고 있었고 그래서 다소 두꺼운 셔츠 하나 달랑 걸치고 있는 몸이지만 춥거나 하지는 않았다. 

“점심으로 삼겹살 구워 먹자.” 

“....???” 

태경은 뜬금 없는 내 말에 이마로 손그늘을 만들며 나를 바라보았다. 

“점심때 마당에서 삼겹살 구워 먹자. 마늘도 굽고. 꼬치에 끼워서 불에 구워 먹으면 참 맛있다.” 

“....... 유 영신.” 

“한 태경 너 절대 나 못 이겨. 너한테 겁탈 당하면서 나 물론 굉장한 즐거움을 느끼지만 그것이 인간을 채우는 모든 것이 될 수는 없어. 나는 이런 식으로 삼십 오 년을 살아온 인간이고 그게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아. 내가 모르는 많은 것을 너는 내게 가르쳐 줬지만 그게 나의 전부가 될 수는 없는 거야. 사람이란건 빵으로만 살아가는 게 아니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이야기도 있지만 사람이 빵과 말씀으로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사람은 빵과 말씀 그리고 물도 마셔야 하고 쾌락도 가져야 하고 또 수없이 많은 것들로 채워지는 거야. 그러니까 니가 약속한 딱 십팔일을 채우고 가라. 너도 원 없이 니가 탐하는 나를 가지고. 너라면... 내가 아무리 싫어한다고해도 너와 닿아있는 점점의 시간 정도 인정 할 수 있다. 그러니 내 안에 너란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든 작은 부분 차지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우리 이 우습지도 않은 대립은 그만 하자.” 

그게 내 솔직한 바람이었다. 

물론 그런 것을 입밖에 내어 말한다는 것은 나로써도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태경을 나로 채워지는 어떤 부분에 인정한다는 것. 그게 내 망상이 아니라 내 시간으로 인정한다는 것. 굉장한 양보였고 호의였다. 

이런 이야기 규태가 들었다면 그는 낄낄대며 그간 들인 공이 있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을 했겠지만 태경이가 규태 만큼은 나를 모른다는 것이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나는 그만큼 약해지고 있었고 이 망상이 그 18일로 끝난다는 것을 나 자신에게 확신시키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18일 혹은 180일이 될 수 있는 그의 독점이 끝났을 때 내가 관계가 아닌 그저 시간으로만 그를 마음 속에 간직할 수 있도록 나는 내 자신에게 세뇌시키고 있는 거였다. 

아무렇게나 되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안일하게 밀치면서도 나는 그가 떠난 후의 나를 걱정하며 이 일이. 이 관계가 그리 중요한 변수가 아니라고 열심히 나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웃기고 있군.” 

근데 이 싹수 노란, 건방진 젊은이는 나를 대놓고 비웃기 시작했다. 

짜식... 남은 일껏 열심히 머리 굴려서 사근사근 이야기하는 중이구만.... 

“꿍수 피우지 마. 귀엽지도 않아.” 

“....뭐!” 

“뭐? 내기에 질 것 같으니 머리 굴리는 거 세살 난 애라도 알 수 있겠다. 당신은 내가 바보로 보여? 바보 룸펜.” 

“야!!!!!” 

“뭐! 오늘은 아침부터 이래저래 놀랬을 거 같아 노곤하게 대해줬더니 또 그놈에 바보머리가 현실을 망각한 거야? 지금 우리가 장난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아... 내가 아는 태경이는 이것보다는 좀 더 귀여운 녀석이었는데.... 

하지만 나는 절대로 니가 바라는 것처럼 누군가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 따위 할 수 없는 종자란 말이다. 이 병신아!!!! 

나는 꿀꺽꿀꺽 내 마음 속의 외침을 삼키면서 상당히 기분이 나빠진 것 같은 태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바베큐 준비 할 테니까 꼼짝 말고 앉아 있어. 제발 사고 좀 그만 치고... 허긴 그 꼴을 해 가지고는 어디로 달아날 수도 없겠지만......” 

그래!!! 나 홀딱 벗고 달랑 셔츠 한 장 걸친 채 앉아있다. 그런데 꼭 그걸 그렇게 확실하게 깨우쳐 줘야 하는 거냐? 

나는 덜렁 집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태경의 등 뒤에다 대고 다시 혀를 댓자나 내밀어 베!!!!를 해주었다. 

나는 무엇보다 그가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규태는... 규태는 보기에도 그렇지만 속이 상하거나 하는 일은 여간해서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고 그만큼 단단하고 확고한 자신의 기둥을 가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태경은 내가 무슨 말을 하건 쉽게 동요되는 그런 눈을 하고 있어서 그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를 나는 봤기 때문에 그가 걱정되었다. 

나는 내 걱정과는 별개로 내 마음 가는 대로 나를 바꿀 수도 없을 것이고 그리고 냉혹하게 상처받은 그를 내쳐버릴 만큼 내가 상상할 수 없는 고약한 부분을 가지는 사람이었다. 

내가 왜 이렇게 갈등하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여덟번째 하루 

  

“아무리 그래도 넌 강.간.범일 뿐이야! 이 손 저리 치워!!!” 

아주 좋은 아침이었지만 기분 좋게 웃으며 다정하게 입을 맞추는 태경에게 흔들리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그렇게 모질게 말하면 흔들리는 내 욕망이 바로 세워지기라도 하듯 나는 그렇게 태경을 도발했고 보기 좋은 입매에 드리워진 미소가 딱딱하게 굳어버리며 태경은 내 손목을 언제나 그렇게 하듯 침대의 헤드로 올려 묶어버렸다. 

그리고는 내가 약해질 수 밖에 없는 관능의 파도. 

내 그곳은 언제나 나의 의사와는 반하여 다른 세상으로의 일탈을 꿈꾸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작이야 놈의 빈정을 상하게 만든 강.간.범. 이라는 내 말로 불붙었지만 늘상 말은 그렇게 하면서 먼저 달아올라 몇번이고 도달하는 것 또한 나였다. 

바득바득 이를 갈면서도 내게 나비와 같이 입을 맞추고 예민한 목덜미를 부드럽게 핥아주면서 태경은 잔인하게 번들거리는 눈을 들어 나를 비웃었다. 

마치 상처입은 맹수처럼 그는 무섭게 이글거리는 눈을 하고 있었지만 처음의 약속처럼 그가 주는 관능은 위험하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혼자만의 삶. 안전한 도피처를 박차고 나가 험한 세상으로 돌진하고 싶어하는 경주마처럼. 내 욕망은 근원도 찾을 수 없는 무저갱처럼 깊은 몸부림으로 나와 내 감성과 내 안전을 휘몰아치고 있었다. 

태경은 단 한번도 섹스(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것을 섹스라는 말로 부르지 않았다.) 중에 나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내가 달뜬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내 욕망을 뿌리까지 송두리채 태워버릴 수 있는 강력한 화약에 불씨를 당길 키워드를 말할 때까지 조금도 나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끝도 없이 나를 불사르고 불살라 회빛으로 점철된 재가 되어 작은 한숨에도 날아가는 허무한 존재가 될 때까지 내 어디가 가장 예민하고 약한지 훤히 알고 있는 잔인한 미소를 띤 채 때로는 내 성기를 뜨거운 입 속에서 살랑살랑 굴리고 내 가련한 젖꼭지를 잘근잘근 씹어버리면서 내내 느긋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어느 때가 가장 못견디게 혼란스러운가 하면 무릎의 뒷 편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면서 허벅지에 닿은 가슴에 묵직한 혼돈이 도리질 칠 때 실눈을 뜨는 나의 눈으로 비친 태경의 땀방울이었다. 

반듯하고 아름다운 이마를 타고 코끝으로 흘러 우윳빛의 투명한 물방울이 내 위로 뚝! 하고 떨어지는 것. 

나는 마치 그 물방울에 갇혀 버리는 작은 개미처럼 바둥거리며 그가 주는 내 혼란과 걷잡을 수 없는 관능의 족쇄를 내동댕이치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 했다. 

화끈하게 달아오른 비부의 틈새로 나를 가득 채우고 있는 태경의 체온. 

언제나 비어있던 내 방안의 콤콤하고 안락한 공기를 걷잡을 수 없는 대지의 바람으로 몰아내 버리는 그의 존재감. 

나는 그것에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안타깝게 애원했다. 

나는 계속 그랬다. 그리고 앞으로도. 약속된 날짜가 끝날 때까지 내 방안을 빛으로 채우고 싶은 나의 작은 소망보다 훨씬 커다란 침묵과 고요의 욕망이 태경에게로 흐르는 내 마음에 뚝을 쌓고 나를 머물게 함을 알고 있었다. 

그가 주는 아찔한 엑스타시는 내가 경험한 그 어떤 행위보다 강렬한 것이지만 나는 그의 정액으로 채워지지 않는 아니 채워지기를 부정하는 마음의 공동을 가지고 있는 바보였다. 

뻔히 다 알고 있으면서 부조리한 내 마음의 맹점 따위 전부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부정하고 잘못된 결정으로 나를 모는 내 본능은 언제라도 종잇장처럼 뒤집혀 버리기를 원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잘못된 본능이지만 그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관계는 내 집의 안전한 외로움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것이고 내가 지금껏 아슬아슬하게 쌓아온 모든 안정과 믿음을 밑둥부터 처참하게 무너트릴 것이다. 

“하앗... 태경아... 흐윽!!!” 

섬세한 내부의 점막들은 잔뜩 충혈되어 그의 흉기를 감싸 안고 있었다. 

데일듯 뜨거운 체온과 박동 하는 두근거림의 젊은 그를 감싸고 마치 그에게서 생명의 근원을 흡수하겠다는듯 맹렬하게 움찔거려 그 안에서의 쾌락을 추구하고 있었다. 

젖어 흐르는 눈시울의 눈물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끝도 없이 나를 몰아가는 태경은 사냥개처럼 집요하게 내가 도망가는 방향으로만 나를 내쫓고 몰아대고 그리고 물어뜯으며 내 본능과 이성과 바람의 기묘하게 뒤섞어 버렸다. 

“음탕한 요부야...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음탕한 요부인거야. 알아? 유영신. 알고 있는 거야?” 

“....몰.....흐읏... 애태우지마. 그러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태연한 표정으로 연기하지. 실은 조금만 건들여 주어도 이렇게 음란한 물을 질질 흘리는 뒤를 가지고 말이야.” 

“흣....” 

“마음으로는 수천번도 더 간음하면서 겉으로는 아닌척 요망하게 말하는 거야. 쓸모 없는 몸뚱이를 하고도 사내를 홀리는 거야.” 

내 안의 스위치. 

매번 나를 흔적 없이 폭사시키고 다시 태어나게 하는 그 빨간 스위치를 교묘하게 피하면서 태경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괴로운듯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도 잡을 수 없는 관능의 절정을 코앞에 두고 나는 내가 스스로 내 사출을 도울 수도 없이 묶여있는 몸이 되어 그저 안타깝게 머리채를 뒤흔들 뿐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이야!!!!” 

“태경아 제발!!!! 아읏!!!!” 

무딘 칼처럼 말이 내 가슴을 찔렀다. 

다시는 다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내 생명 근원의 존재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떨고, 잔인하게 떨어져 내리는 태경의 단어들이 속속들이 그것의 약점을 고스란히 베어놓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쓸모 없는....  

결국 나는 그와 내 사이에 있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오해들을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것이리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기억으로 판단하고 상처입을 뿐 누구도 말하지 않는 말과 말 사이의 침묵을 이해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태경은 달뜬 흥분으로 주처할 수 없이 떨고 있던 내 몸이 점차로 진정되고 그리고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끼지 못한채 힘차게 나를 치받아 올리는 것에 열중하고 있었다. 

[화냥년. 남의 씨를 베고 와서 평생 내 뼈골을 빼먹으려는 구미호 같은 년.] 

나는 정말로 아버지의 자식이 아닌 것은 아닐까? 

나는 한번도 어머니의 정절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어머니는 정절을 의심받을 만한 성품을 가진 분이 아니었다. 

그리고 웃기게도 정신 나간 나의 아버지란 작자는 내가 다섯살이 되던때 이미 친자확인이란 것을 해보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진실도 반복하여 그것이 거짓이라 세뇌하면 마치 거짓처럼 느껴지고 또 거짓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나는 정말 어머니의 음탕한 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쓸모없는 기생충 같은 존재로 변태 되는 것은 아닐까? 

태경은 그런 나의 운명이 내 의지로 정체되어 있는 것에 하늘이 내린 발화점이 아닐까? 

조금전만 해도 견딜 수 없이 매혹적인 즐거움을 선사하던 아랫도리는 이제 버거운 질량감을 딱딱하게 견제하는 고통으로만 남아있었다. 

혼돈과 상처는 내가 현실을 보는 차가운 눈을 가리고 기억과 시간은 내 심장을 터트릴듯 움켜쥐고 있었다. 

“나를 봐. 유 영신 나를 봐. 나를 봐!!!!!” 

[왜 때리시는 겁니까. 제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러시는 겁니까.] 

전혀 다른 말이었다. 

내 기억 속에서 내가 아버지와 나눈 마지막 대화의 목소리는 공포에 질린 무력함만 있었다. 

어째서 나는 늘상 몸을 나눌때 그가 내게 종용하는 저 말이 그때의 내가 토할 것처럼 내뱉았던 말과 겹쳐 들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를 봐. 유 영신. 내가 누구야. 나를 봐!!!” 

[제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러시는 겁니까.] 

확 하고 뱃속에서부터 용암처럼 뜨거운 기운이 퍼져 나갔다. 

모든 것을 태우고 가라앉은 재처럼 흐린 회색으로 빛을 잃은 태경의 눈을 응시하면서 나는 이제 더 이상 내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쾌락과 발칙한 몸을 채워나가던 고통 속에서 나를 잊은채 그 속에 비친 쓸모 없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로부터 부정당한 그 얼굴. 

비굴하고 참혹하고 처참했던 유약함 몸과 그 암울한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쌓아올린 거대한 벽. 

차갑게 식어있는 얼음덩어리 속에서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는 나는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상처들이 속속들이 썩어 들어가는 부질없는 고깃덩이에 불과했다. 

고름과 악취 풍기는 상처를 방치한 채 나는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허울좋은 유리관 안에서 그저 죽은듯 가만히 정체되어 있었다. 

태경의 까만 눈동자 속에 내가 있었다. 

그토록 외면하려고 했던 내가. 그토록 부정하려고 했던 내가 있었다. 

웃기지도 않는 현실도피의 멍청한 짓을 하면서 억지로 고개를 돌리고 듣지 않으려 했던 어린 내가 오줌을 지리며 어둠 속에서 문고리를 부여잡은 채 울고 있었다. 

“으윽!” 

가슴으로 썩은 냄새를 풍기며 올라오는 뜨거운 것을 삼켜 넘기려 하여도 그것은 지금껏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호언장담을 하면서 큰소리치던 내 정신세계를 비웃기라도 하듯 커다란 해일처럼 나를 덮치고 있었다. 

한 태경의 눈 속에 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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