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며 뭐며 굉장히 멋드러진 말을 한것 같지만 나는 역시 단순하기 이를데 없는 바보임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놈은 장담하건대 선수였다.
나는 스킨쉽도 싫어하고 누가 날 건들이거나 심지어는 가까운 거리에서 말하는 것도 싫어하는 지독한 인간 혐오주의자 였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내 상상속의 남자들.
그러니까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내 의도대로 반응하는 나만의 인형들만 사랑했다.
그들이라면 몸이 닿아도 아무렇지 않을꺼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 몇일동안 지독하게 익숙해져버린 -그건 너무 쉬운 일처럼 느껴졌다. 어이없게도 말이다.- 태경의 손과 입술과 그의 체취 그리고 목소리는 소름이 끼칠만큼 달콤하게 나를 이끌고 있었다.
더군다나 조금도 강압적이지 않게, 오히려 너무 부드럽게 와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은 그 섬세한 주름을 고스란히 그려볼 수 있을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는 중이었고 스멀거리며 내 벗은 몸뚱아리를 기어다니는 커다란 손은 마치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있었다.
침대의 헤드위로 돌려져 묶여 있는 나의 팔목부터 팔 안쪽의 예민한 피부를 타고 겨드랑이까지 물방울이 흘러내리듯 아무렇지도 않게 스며들어와서는 별로 만져지거나 자극된 적이 없는 예민한 옆구리까지 천천히, 그렇지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는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감은 눈 안으로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그의 표정과 그의 손이 지금 어떤 일을 하는 것인가를 생각하며 어금니를 꾹 깨문채 금세라도 베어나올 것 같은 신음소리를 참고 있어야 했다.
솔직히 서른 다섯이나 처먹었으니 성애의 기본이 어디인지 농후함이 어디인지 질척함은 어디부터인지는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상식으로 혀도 섞지 않는 다정한 베이비 키스와 겨우 옆구리와 팔을 만지는 정도는 패팅은 아주 근엄하고 정직한 소프트 패팅에 지나지 않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실제 느끼는 것은 차이가 나도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뭐가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느니, 겁탈하라느니 하는 말인가.
웃기게도 나는 그저 그런 평범한 태경의 행동에도 질금질금 성기 끝으로 프리컴을 뱉어내면서 최고로 흥분하고 있었다.
내가 머리로 온갖 음탕한 짓을 하면서 그를 농락해 왔어도 실제로 그가 내 살갗에 닿아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과 사람과의 관계라는 실감은 내게는 충격적이리만큼 자극이 심해서 도무지 견딜 수 있을것 같지 않았다.
더군다나 내가 이미 맛본적 있는 엄청난 폭팔과 같은 엑스타시의 기억은 생생하게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세상에......
묶여서 딜도 같은 것으로 하루종일 자극되어 흥분하는 것과는 격이 다른 낯설음에 파도는 내가 상상도 못하는 곳에서부터 새파란 불길을 지펴 오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한 저기 심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묵직하게 진탕질을 치면서 내 심장의 박동소리처럼 규칙적으로 쿵! 쿵! 나를 울리는 성적 흥분이 한참을 애를 쓰고 달리기 한 후처럼 등과 이마로 싸하게 식은땀을 뱉어내었다.
등허리 한켠에 자잘한 전류를 올려놓은 듯한 감각이 온 신경의 말초 혈관을 타고 흐르며 손가락 마디마디까지 호수면의 잔물결처럼 확실하게 퍼져나가는 것은 끝도 없이 반복되면서 더는 내가 견딜 수 없어 히끅! 하면서 몸을 움츠러트리게 만들고 말았다.
“흐윽!”
따뜻한 체온을 가지고 내 명치 위에 넓게 편 손바닥이 그대로 정지하는 것을 느끼며 나는 실눈을 뜨고 태경을 훔쳐보았다.
그는 나름대로는 꽤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방금 전 내가 낸 그 소리에 의아하다는듯 눈을 크게뜨고 나를 살피다가 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고는 큭! 하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음란해.”
“잇!”
“입으로만 잘난척하며 도도하게 굴면 뭐해. 당신 몸은 어쩔 수 없이 녹아 질척거리는데. 이것봐. 아직 근처에도 가지 않은 이놈은 벌써 불끈거리며 싸고 있잖아?”
저속한 단어들이 귓바퀴를 돌면서 날카로운 송곳처럼 머리 속을 쿡쿡 찔러대고 있었다.
그냥 그정도 떨어져 낮게 속삭이는 말들도 말캉거리는 뇌의 주름지고 척척한 곳을 퍽퍽 쑤셔오는것 같은데 이번에 태경은 낮게 몸을 낮추어 튼튼한 가슴을 내 가슴에 딱 붙인채 바로 귓가에 따뜻한 숨결을 잔뜩 퍼부으며 작은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신 몸 중에 제일 예민한 곳이 어디인줄 알아?”
“헉!”
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소리는 온몸에 솜털이 바짝 곤두설만큼 충격적인 것이었다.
더군다나 낮게 허밍처럼 내뱉는 태경의 목소리는 굉장히 섹시하기 때문에 나는 나도 모르게 큰 숨을 들이키며 몸을 긴장시키고 말았다.
“경험도 없는 주제에 당신이 얼마나 예민한 뒤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 응? 앞을 만져주는 것보다 훨씬 더 괴로운 얼굴을 하면서 창백한 허벅지 안쪽의 피부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는 거야. 응? 알고 있어? 거기가 얼마나 예민하고 달콤하게 녹아 끈적대는지 알고 있어?”
“......지....”
“뭐? 지랄? 후후후후 유 영신 다리를 벌려봐. 이렇게 겨우 귀에 대고 음탕한 말을 지껄이는 걸로도 가버릴 것처럼 뭉클뭉클 싸고 있으면서 겁탈을 하라고 건방지게 지껄이는게 당신이지. 암. 유 영신은 그런 인간이지. 안그래?”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었다.
나는 어이없게도 손끝하나 대지 않은채 그가 내 귓가에 속삭이는 저속하고 난잡한 말들로도 이미 절정에 다다를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오르가즘의 경계에 서 있었다.
그게 더할나위 없이 비참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의 심리적 데미지로는 북어 대가리처럼 살아왔던 삼십 오년의 경험치라는 것을 허무러트릴 수는 없었다.
나는 턱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어금니를 꽉 깨물고 오히려 옥좨듯 두개의 다리를 딱 붙이면서 시체처럼 몸을 경직시켰다.
그래서 그가 화가 나 폭력적으로 나를 짓눌러 주기를 바랬다.
힘으로 짓이겨지는 것은 자의로 몸을 여는 것보다는 덜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쾌락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보다는 참아내기 쉬운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물리적 힘의 작용에 굴복하며 살아왔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내게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아둥바둥 버텨온 지금까지의 자존심을 막살하고 내 몸을 여는 것은 죽어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런 고집이 당신의 매력이기는 해. 그렇지?”
태경은 아주 느긋하게 속삭이면서 내가 힘을 주어 붙이고 있는 두개의 다리 사이를 닿을듯 닿지 않을듯 살짝 간지럽히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게 야한 것 같으면서도 간지럽기만 한 것 같기도 하고 엉겁결에 힘이 풀어진 다리로 냉큼 기어들어온 커다란 손은 아주 정확하게 벌어진 고간의 회음을 꾹하고 누르는 것이었다.
뭔가 아래쪽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역류하듯 명치까지 뜨끈하게 울컥 하는 기분이 들어서 나는 멍청하게 이게 뭔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손 빠른 태경에게 내 비부를 훤히 내주고 말았다.
그는 아주 잠깐 내가 팍 풀어진 라면면발처럼 기운을 빼는 동안 번개처럼 움직여 그나마 버둥대던 두 다리를 번쩍 치켜 올려버린 것이었다.
제엔장......
이런 식이라면 다시 세상에서 제일 쪽팔린 자세가 되어버렸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의 몸에 닥칠 이미 알고 있는 변화를 기대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호오... 긴장하지는 말라고. 아프게 하지 않는다고 약속했잖아? 나는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야. 대신.”
대신?
느리게 떨어지는 그의 단어들에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나는 훤히 드러난 아랫도리를 타인의 시선에 노출시키고 있는 긴장감으로 몸을 떨었다.
“대신 끔찍하게 달콤한 목소리를 내게 만들어 주지. 지금 당신을 찌르고 있는 것이 누구의 것인지. 당신을 어쩔 수 없는 꼭대기까지 데려가는게 누구인지 당신의 그 예쁜 목소리가 쉴 때까지 불러대게 만들어 줄꺼야. 응? 흐응?”
태경은 계속 웃음을 가득 담은 목소리를 낮게 내고 있었다.
조용하지만 단호하고 또 그러면서 굉장히 매혹적으로 들리는 그 목소리에 반응하면서 나는 다른 수없이 많은 소리들 중에서 이 음란한 광경에 포함되는 많은 것들을 정확하게 구분하고 있었다.
따닥거리는듯한 밖의 산새소리와 꾸룩꾸룩 하면서 하수관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 심지어는 규칙적인 시계바늘 소리의 수많은 소음들 중에서 음란한 것들은 정확하게 귀를 통해 나를 자극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내 기억속에서는 아죽 끔찍하게 남아있는 오렌지 향의 젤 뚜껑을 여는 작은 소리와 꿀럭하고 그것을 짜내는 소리 아주 낮고 조용하게 숨쉬고 있는 태경의 호흡과 미친듯이 뛰면서 심장마비라도 일으킬듯 두근거리는 나의 심장소리.
눈을 감고 있으면 아주 많은 것을 들을 수 있게 되는데 나는 세상에서 제일 쪽팔리는 자세로 어린아이처럼 두 다리를 높게 들리운채 누워 가만히 그런 것들을 듣고 있었다.
아아.... 나는 어쩌면 굉장히 쓸모없는 짓을 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작은 소리들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몸따위를 가지고 절대로 마음만은 그를 향해 열지 않겠다느니 어떤 방식으로도 내가 자의로 너에게 몸을 열지 않겠다느니 하는 말을 해버리다니...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흐윽!”
처량맞은 생각들을 하다가 나는 개구리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제발 그 화들짝 놀라 튀어 오르는 짓은 그만할 수 없나? 그만큼 몸이 예민하다는 증거겠지만 나는 단지 당신 입구에 젤을 바르고 있을 뿐이라고.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아. 안그래?”
분명히 태경은 나를 비웃고 있었다.
제엔장.....
엄지손가락으로 짐작되는 커다란 손가락이 미끌어지듯 예민하고 주름이 많은 깊은 곳의 민감한 피부들을 쓰윽쓰윽 쓰다듬는 것을 따라 지남철에 끌려가는 쇳가루처럼 나는 그의 손만을 향해 반응하면서 잘게 몸을 떨었다.
그리고...
“씨발! 씨이바알!!!!!!!!!!!!”
“후후후후후후”
두 가지 종류의 것.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아주 선명하고 투명한 주황색과 형광빛이 나는 초록색의 딜로로 인해 그곳으로 뭔가가 들어오는 느낌을 나는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물론 저놈의 무식한 것으로 쑤셔지기도 했고-으아아악!!!!!- 약을 발라준다는 핑계로 흉한 손가락으로 헤집다시피 했던 적도 있다.
나는 다 까맣게 잊어버리고 팔자 편하게 거래니 뭐니 하고 있었지만 내 몸은 그것을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수태 많이, 그러니까 그 증오스러운 비단 끈 때문에 밀려나갔다 밀려들어오던 그런 느낌까지 모두 합하면 정말 수태 많이 몸서리치게 알고 있는 느낌이지만 삼십 오 년을 그런 거 모르고 살았던 시건방진 몸은 겨우 하루동안 편하게 잠만 퍼잤다고 그 익숙함(?)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맹렬하게 움찔대기 시작하였다.
러브 젤로 미끈미끈해진 태경의 손가락은 내가 그 형태를 확실하게 그릴 수 있을 만큼 나의 내부와 밀착되어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버거울 정도로 아프게 나를 찔러대는 중이었다.
“힘 빼.”
“..... 너 같... 너 같으면 빼겠냐?”
“그래도 많이 부드러워진 거야. 처음엔 마치 경직되는 것처럼 입구만 건들여도 딱딱하게 굳어버리더니 엄지손가락을 단숨에 삼켜버렸잖아? 느낄 수 있지? 내가 지금 당신 안에 있는 거야. 응?”
그렇게 난잡한 말을 하면서 태경은 내 속에 있는 엄지손가락을 빙글 돌리더니 커다란 손으로 파들파들 떨고 있는 나의 아래를 부드럽게 쓸어 덮었다.
“당신 몸은 기억하고 있어. 어떻게 하면 아프지 않게, 기분 좋게 될 수 있는지. 알고 있지?”
그랬다. 나는 아니, 내 몸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그것이 들어왔을 때 엉겁결에 죽어라 다리를 뻗대면서 몸을 굳혔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의 아래는 나른하게 풀어지며 아래에서 잔물결처럼 번지는 미세한 전기 같은 느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랫도리가 짜릿짜릿하면서 뭔가 알 수 없는 느낌이 시작되는 것에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면서도 미간을 찡그렸다.
완전히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인간처럼 내 마음은 이런 행위를 강압에 의한 굴복일 뿐이라고 말하고 나의 몸은 그렇게 문을 비집고 들어와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태경의 손가락을 잘근잘근 씹어대면서 더 깊고 음탕한 쾌락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퍽? 뽁? 하여튼 묘사하기 힘든 작은 소리를 내며 태경의 손가락이 빠져 나갔을 때 나는 확 붉어지는 얼굴에 불이 붙는 것처럼 느끼며 어이없는 신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나 정말 대책 없는 인간이 맞는가 보다.
“아쉬워하지 마. 인상 쓰면 예쁜 얼굴이 무섭게 변한다고....”
어찌되었건 주도권은 태경이 잡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야 요 뻔뻔한 주둥이로 나는 당하는 것이지 하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해 버렸고 더군다나 똥침 놓겠다는데 좋다고 엉덩이 들이대는 게 미친놈이지 제정신이냐고 말할 정도로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발칙하게 발기해 버린-내 흥분의 증거는 아주 명확하게 일어서서 불끈불끈 흔들리고 있었다.- 몸을 감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데 있었다.
차라리 지금이 밤이라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새까만 밤이라면 좋으련만 나는 붉어진 얼굴도 숨기지 못하는 햇살아래 고스란히 몸을 드러내놓고 태경의 눈앞에 있었다.
다시 태경의 손가락이 나를 방문했을 때 나는 안도하면서도 죽고싶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그것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또 몇 번이나 경험해서 알고 있는 움직임으로 미끄럽게 빠져나갔다 다시 쓰윽! 하고 들어오는 일을 반복하는 동안 아래에서 시작된 미세한 전기는 배와 가슴과 등을 타고 손끝 발끝까지 아주 확실하게 나를 뒤흔들어놓기 시작했다.
“흐으윽!”
몽롱하게 정신을 잃어버린 귓가로 전자기기에서 나는 듯한 자잘한 소음이 이명으로 들려오는 시점에 이르러 나는 어느 때는 아주 날카롭고 깊게 스며들었다가 빠져나가고 또 어느 때는 나를 꽉 채우며 출납하는 태경으로 인해 나도 모르는 달콤한 비명소리를 질러대면서 고개를 뒤채고 움찔움찔 허리를 움직였지만 그가 주는 것 외에 내가 추구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유 영신 눈을 떠.”
“흐응....”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내 안의 어느 부분.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민감하고 섬세한 스위치를 건들이면 더 이상 뻔뻔하게 잘난 척 할 수 없는 격랑에 휩쓸려 높은 곳으로 또 낮은 곳으로 정신 없이 떠밀려 갈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그가 애를 태우겠다는듯 굳이 그 스위치의 근처만 지분거릴 뿐 불근불근 애액을 토해내는 나의 페니스를 쓸어주지도 않고 내처 모른 척 그 스위치를 찾지 못하는 사람인척 내벽을 더듬대는 이유도 나는 알고 있었다.
“하앗.... 태...태경. 한 태경 제발...”
“눈을 떠.”
눈이 부셔서 아프게 눈이 부셔서 나는 절대로 눈을 뜰 수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보이지 않는 끈으로 조정되는 섬세한 꼭두각시인형처럼 나는 멍하니 젖은 눈을 떠 눈물에 아른거리는 태경을 보았다.
그리고 탄탄한 근육으로 꽉 조여져 있는 그의 벗은 어깨로 화사하게 떨어져 부서지는 햇살과 햇살의 음영으로 더 어둡고 음산하게 보이는 그의 가슴을 보면서 더 낮고 애절한 신음소리로 그를 보채었다.
나는 스위치를 켜는 키워드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이제는 그 키워드가 바뀌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빡빡하게 나를 채우는 손가락들을 조금씩만 움직여줄 뿐 심술이 잔뜩 난 야수처럼 나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태경아....”
“봐. 이제 내가 너에게로 들어갈 거야. 장난처럼 느껴졌던 딜도나 손가락과는 비교되지 않는 나를 삼키는 거야. 당신 눈으로 직접 봐. 내가 누구지?”
“.... 한 태경.”
나는 몽롱함을 부유하면서 이제 가치를 가지지 못하는지도 모르는 키워드를 낮게 중얼거렸다.
내 다리 사이로 초라하게 일어서 몸을 뒤채는 나의 성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크고 건장한 것이 돌격 앞으로!!!를 기다리고 있는 장수처럼 단단하게 일어서 있었다.
그게 새까만 어둠 속에서 잔인하게 나를 찢고 고통의 절정에서 의식을 잃어버리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원흉이란 것을 알면서도 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태경과 태경의 성기와 태경의 아랫배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유연하게 허리를 휘고 급한 숨이 들이켜질 정도로 압도적인 질량감의 그것을 나의 입구로 가져다 대었을 때도 나는 멍하니 그런 태경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안에 공허한 빈방.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 마음 속에 완전히 텅 비어서 햇볕도 바람도 들지 않는 그저 시커먼 공간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채울 노력도 그 안을 들여다볼 생각도 나는 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비어있는 채로 내버려둔 내 안의 텅텅 비어있는 그 빈 공간의 눅눅하고 음습한 공기를 뚫고 체온과 체향을 가진 태경이 들어오고 있었다.
목련꽃처럼 해사하고 맑은 볕과 오래 묵은 나무등걸처럼 단단하고 깊은 향기를 가진 그가 한번도 채우려 하지 않았던 내 안으로 들어와 나조차도 알지 못했던 공허와 외로움과 쓸쓸함의 빈 공간을 그의 것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숨이 콱 막혀버릴 만큼 뜨겁고 강한 것이 비어있는 수숫대처럼 잔 바람에도 부서지는 소리를 내는 나를 푸른 수액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커다란 냉장고를 꽉 채우고 있는 대형 마트의 비닐 봉지를 꺼내 차가운 냉기가 하얀 김처럼 흘러내리는 냉장고 앞에 주저앉은 채로 나는 푸욱!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확 저놈의 면상에 집어던져 버려?
하는 생각을 하면서 왜 그곳에 들어가 있는지 모르는 세탁용 세제와 섬유 린스를 따로 밀어놓고 이 봉투 저 봉투에 난잡하게 들어차 있는 아채와 고기를 꺼내 서랍과 야채 칸에 정리하면서 아까부터 청소기를 들고 이 방 저 방 거실까지 싹싹 치우고 있는 태경을 한번 노려보았다가 들고 있는 튼실한 애호박을 한번 봤다 하면서 또 야한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이거만 했나?
아니... 이것보다는 좀 작았지?
나 참 너무 대단한 거 아냐?
하는 따위의......
그리고 조금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내가 잘 알고 있는, 그러면서 게이이고 육체관계를 꾸준히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규태가 유일했다.
그런데 그놈이 매번 파트너를 갈아치운다고 해도 아침나절에 시쳇말로 열라 박아댄 상대에게 식사 준비를 시켜봤다는 말은 생전 듣도 보도 못했다.
비교 사례가 빈약하다는 생각은 못하고 나는 연신 점심 준비는 당신이 해. 나는 청소를 할테니 하는 싸가지 없는 말을 하고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한 태경만 욕하고 있었다.
물론 그와 나의 관계가 고용인과 피고용인이었을 때도 식사준비는 내가 해왔었다.
태경이 할 줄 아는 음식은 오직 황태죽 하나 뿐이다.
그 나머지는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음식을 만들어 왔기 때문에 나는 그를 고용하고 단 사흘만에 식사준비는 내가 하겠다는 선언을 했던 것이다.
어떻게 멀쩡한 멸치볶음의 레시피를 가지고 독약을 만들 수 있는 것인지....
나는 그것도 재주라고 생각하며 감탄하기도 했었다.
그래! 그렇다고 쳐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나는 지금도 아랫도리로 아직 그가 남아있는 것과 같은 느낌에 욱씬욱씬 허리를 펴기 힘들었고 또 나른하게 혈관을 타고 흐르는 쾌감이 채 가시지도 않은 몸 상태였다.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기 싫어서 요 좋은 기분 고대로 꼬박 졸고 싶은 마음이었단 말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던 대검찰청이던 어떻게 이런 나에게 점심준비를 시킬 수 있는가 말이다!!!!!!
규태 놈이 암만 개망나니에 대책 없는 카사노바라고 해도 이런 상태의 파트너에게는 아마 근사한 룸서비스를 불러다 줬을 것이다.
아... 음.....
나는 그야말로 여태까지 나의 수음으로 인한 사정은 어린애 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화끈한 엑스타시를 생각하면서 저절로 얼굴이 확 붉어져서 들고 있던 죄 없는 애호박을 또각 하고 분질러 버렸다.
태경은 약속했던 대로 숨이 턱 막힐 만큼 위압적이기는 하지만 그만큼이나 강렬한 달콤함으로 나를 이끌었다. 더군다나 소위 섹스라고 해야하는 그걸 끝내고는 나를 번쩍 안아들어 욕실로 데려가서는 더운물에 담궈 놓고 부드럽게 씻어주기까지 하였다.
욕실에서도 당해버릴 거야... 라는 나의 기대는 신사적이고 냉담하기까지 한 손길로 북북 닦이면서 접어야 했지만 말이다.
더군다나 그는 입고 밖에 나갈 수는 없지만 앞을 가리는데는 무리가 없을 만큼 커다란-태경의 것으로 짐작되는- 낡은 셔츠 한 장까지 던져주었다.
향긋한 섬유 유연제 냄새와 함께 바삭바삭한 태양의 향기까지 가득 담고 있는 셔츠는 달랑달랑 내 허벅지 위에서 흔들리며 아침에 경험을 아른하게 되살리고 있었다.
“후우... 미쳤구만...”
나는 칠랄레 팔랄레 뛰어가는 상념들을 다잡으며 다시 비닐봉지 안에 들어있는 물건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콩나물과 두부, 김치, 양파, 돼지고기 소고기, 대용량 우유 두 병과 초콜렛 스낵류의 과자 몇 봉지.
세 개의 비닐봉지에 들어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놓으니 냉장실이 꽉 차버릴 정도로 그는 많은 식재료를 사 가지고 온 것이었다.
물론 식재료 사이사이에 양말이라든지 주방용 키친타월 같은 것도 들어있었지만 말이다.
“콩나물 된장찌개나 만들어 먹을까?”
태경이 사온 것들로는 아주 많은 종류의 음식을 만들 수 있었지만 나는 우선 시원하면서 매콤한 콩나물 된장찌개에 마음이 끌렸다.
콩나물은 신선했고 찌개거리용으로 끊어온 돼지고기도 적당히 비게가 섞인 것이 국물내기 적당한 것으로 보였다.
양파에 호박도 있고 버섯도 종류별로 여러가지를 사 가지고 왔으니 이것저것 넣고 잡탕으로 끓여서 뜨거울 때 아삭아삭한 콩나물과 함께 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군침이 넘어오는 것 같아서 나는 기분 좋은 웃음을 웃었다.
된장찌개에 콩나물을 넣는 사람은 없지만 나는 그걸 꽤 좋아했다.
아니, 사실 내가 콩나물을 아주 많이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몰라도 경상도 어딘가로 취재 여행을 갔을때 허름한 식당에서 끓여내 온 그 콩나물 된장찌개는 그 이후 내가 즐겨 끓여 먹는 찌개가 되어버렸다.
태경도 처음에는 이게 무슨 된장찌개냐고 웃으며 반박하였지만 맛을 보고는 일년동안 줄곧 질리게 먹어도 별다른 불평을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아무 재료나 손에 잡히는대로 넣어도 그 맛에 큰 변화가 없는 레시피라서 간단하게 만들어 먹기는 썩 좋은 음식이었다.
“태경아...”
나는 평소에도 그를 그렇게 불렀고, 지금 상황이 좀 묘하다고 해서 그를 그렇게 부르지 못할 이유는 없지만 어쩐지 쑥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호기 있게 부른 것과는 대조되게 조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여버렸다.
“.....”
청소기를 들들 끌고 주방 입구까지 온 태경은 내가 겨우 냉장고 정리를 끝내고 콩나물 봉지를 든채 일어서자 한쪽 눈썹을 위로 치켜뜨면서 왜? 라는 식의 표정을 지었다.
옛날에는 저놈이 왜 그러세요? 하는 식의 이쁜 말을 한 적도 있었다.....
“뭐 할 거야?”
“콩나물 된장찌개나 할까하고... 싫어?”
“.....”
“밭에 가서 파 심어놓은 거 두 대만 잘라다 줄래? 파 안들어가면 뭔가 빠진듯한 맛이 나잖아.”
“......”
그런데 태경의 표정이 이상했다.
콩나물 된장찌개를 처음 먹으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한달에 두번 정도는 꼭꼭 먹어왔던 음식에 새삼스레 저런 표정을 지을 것은 없지 않은가.
태경의 표정이란게 바보 아냐? 하는 식의 비아냥이 반쯤 섞인 이상한 것이었다.
“파 좀 끊어다 달라고.”
“...... 하아... 개념이 없는건지... 생각을 안하는 건지....”
얼핏 들으면 투덜대는 것처럼도 들렸지만 또 다르게는 신세한탄처럼 들리는 긴 한숨을 내쉬며 태경은 가위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쳇! 뭐가!!!!
하는 것은 그가 나가고 아주 잠깐 내가 심통맞게 지껄인 혼자말이었지만 나는 조금 욱씬거리는 허리를 짚고 서서 콩나물을 씻어 냄비에 깔고 양파도 썰고 돼지고기도 적당하게 썰어 그 위에 올려놓고 된장을 물에 개서 콩을 걸러낸 된장물을 냄비에 담았다.
대체 뭐가? 꼭 한심해 죽겠는 불량 청소년 보듯 할껀 없잖아.
옷도 이것밖에 안 준건 지 놈이고 칠순 노인처럼 꾸부정하게 서 있을 수 밖에 없도록 만든 것도 지 놈이면서 뭐가!!!!!
밥도 안해줄까 보다!!!!
하는 생각들은 아직 머리 속에 남아있었지만 압력밥솥에서 김이 오르는 칙칙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제법 개운해진 기분으로 버섯을 다듬기 시작했다.
팽이버섯은 오돌오돌한 맛이 혀에 감겨서 좋고 느타리는 작은 것이 고소해서 맛있다.
새송이 버섯은 쫄깃한게 고기를 씹는 것 같지만 깔끔한 맛이라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버섯이기도 했다.
“여기.”
“헉!!!!!!!!!”
불쑥 어깨너머로 찬바람을 가득 안은 매운 파가 넘어오자 나는 화들짝 놀라며 들고 있던 새송이 튼실한 것을 훌쩍 머리위로 집어던져 버렸다.
“뭘 그렇게 놀래. 또 혼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나쁜 놈. 제발 기척 좀 하고 다녀! 어떻게 너는 체격은 내 두배는 될꺼 같으면서 소리도 없이 다니는거냐.”
“당신이 지나치게 발을 끌고 다니는 거야.”
궁시렁 거리며 버섯을 찢는 내 뒤에 서서 태경은 청소를 하러 나가지도 않고 뭐라고 다른 말을 하지 않은채 가만히 서 있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본다면 평온하게 보인다고 말할만한 그런 풍경.
어쩌면 참 아름다운 연인이구나...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 풍경.
나는 하지만 그 실상을 생각하며 작게 어깨 숨을 내쉬었다.
나는 인질. 이놈은 강간범!
여전히 내 뒤에 서 있던 태경이 아주 느리고 조심스럽게 내 허리를 안아왔다.
“뭐.”
“하자.”
“....!!!!!!”
나는 언제나 그렇듯 또 느슨하게 경계를 풀고 있었다.
보골보골 끓기 시작한 된장에 익어가는 콩나물 냄새 그리고 그 속에 흐리게 섞인 돼지고기와 양파 냄새를 맡으며 나는 이것이 경직된 억류의 상황이 아니라고 나를 속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음탕하게 젖어있는 태경의 목소리가 귀 바로 뒤편에서 웅얼대는 것으로 그런 평온한 일상은 파삭 소리를 내며 깨어져 내 발 밑에 뒹굴었다.
섹스는 황홀하리만큼 달콤했다. 내가 상상도 못했던 즐거움이었고 아찔한 엑스타시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 재미있는 것이 분명한 그것이 배제된 이런 나른한 일상 쪽에 더 친근함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거친 숨소리와 질척한 애무도 즐거운 것을 이제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된장 냄새와 익어가는 밥 내음이 가득한 주방의 한적한 색감을 더 사랑했다.
이유 없이 분한 마음이 들어서 나는 입술을 깨물며 획하고 몸을 돌려 태경을 노려보았다.
“밥 안먹을 거야?”
“찌게 끓을 동안....”
크고 섹시한 입술은 참담하다고도 표현할 수 있는 내 기분 같은 것은 아랑곳 않는다는듯 내려와 귀밑의 매끄러운 목덜미를 탐욕스럽게 빨아대기 시작하였다.
“점심을 먹고 곧 약을 먹어야 하는데 그럼 바로 골아떨어질 꺼면서? 먹기 전에 오늘 정오분의 수업을 해두는 게 나을 것 같아. 응?”
“......”
“아까 호박을 꼭 쥐고 있는걸 보니 다시 또 내 것으로 쑤셔지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던데 뭘. 앙큼하게 내숭 떨지 말아. 어차피 나는 내가 하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할 꺼야.”
“말했지?”
“흐응?...”
나는 으득! 하는 소리가 날만큼 모질게 어금니를 깨물었다.
“내가... 내가 스스로 너한테 몸을 열지는 않아.”
“아. 그래. 그렇게 말했었지....”
나는 그때 보았다.
아주 보기 좋은 커다란 입이 단정하게 다물어져 있는데 작게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왜! 왜왜!!!!
모욕당하고 강간당하고 수치스럽게 벗겨진채 함부로 취급되는 것은 나란 말이다!
왜 네가 화를 내는 거냐. 대체 왜!
아주 커다란 태경의 손이 내 손목을 등뒤로 돌려 움켜쥐었고 나는 으득으득 어금니를 깨물면서 마음대로 놀려지면서도 마음의 비참함에 반하여 흥분하기 시작하는 성기를 잘라내고 싶었다.
나는 제멋대로 놀아나는 내 몸 따위 죽여버리고 싶었다.
**********여섯번째 하루
하.하.하......
이런 썩을...
육실할, 때려죽일, 염병!!!!!!!!
......
누구라도 엄청나게 무거운 다리가 배 위에 턱하니 얹혀 있는채 코끼리에게 밟히는 악몽을 꾸고 옵션으로 허벅지 옆으로 벌떡대는 건장한 성기를 느끼면서 일어난다면 저와 같은 원초적인 욕설이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마지막의 것은 그닥 불평할 것이 안되지만-나는 언제나 그런 관능적인 환상에 사로잡히고는 했다.- 앞의 두 가지는 욕 나오기 충분할 만큼 나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더군다나 나는 벌써 삼십분은 넘게 그 커다란 다리통과 단단한 팔뚝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힘을 쓰고 있었다.
아무리 뽀시락거려도 케헴! 하고 헛기침을 해봐도 놈은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더군다나 내 힘으로는 놈의 족쇄와 같은 팔다리를 풀어내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하다 생각될 만큼 그것들의 악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어제 점심의 콩나물된장찌개는 진짜로 한심한 맛이었다.
충분히 좋은 재료와 익숙한 레시피였지만 내 마음은 즐기는 그것의 맛을 기꺼워할만큼의 기력이 없었다.
독약과 같은 약을 먹고 꼬르륵 의식이 넘어갈때까지 태경은 내내 화가 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고 저녁나절 잠깐 깨서는 억지로 퍼먹이다시피하는 저녁식사를 한뒤 겨우 정신이 들려고 할때 또 약을 먹어야 했다.
처음으로 먹는 저녁 처방이라는 그 한약은 점심때 먹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꼬르륵 잠겨 넘어가는 마취와 같은 수면과는 달리 몽롱하게 아슬아슬한 감각을 주었기 때문에 빌어먹을 한 태경의 저녁 수업이란 것은 내 의지와 상반되게 아찔한 오르가즘으로 끝이 났다.
감금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는 언제나 다른 곳에서, 내가 잠자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밤을 보내었기 때문에 개운한 새소리와 함께 눈을 떴을때 훌떡 벗고 있는 그가 내 옆에서 고른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은 굉장한 충격이었다.
나는 한번도 태경이 깊이 잠들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말끔하게 깨어있는 모습이었고, 조금의 빈틈도 없이 단정한 옷차림에 격조있는 몸가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처럼 작게 입을 벌리고 고릉고릉 코를 고는 모습은 그냥 보고 있기는 참 훌륭한 광경이었다.
이놈에 대들보 만한 다리와 도망가는 여편네를 붙들고 있듯 힘을 풀 생각이 전혀 없는 팔뚝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나는 부서지는 4월의 햇살 아래 기묘한 음영이 나타나 있는 태경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양이 좋은 눈썹이 살짝 찡그려져서 꿈을 꾸고 있는듯 조금씩 움직이는 감은 눈꺼풀 안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한번쯤 부러진 적이 있는듯 살짝 어긋난 콧대는 날카롭게 선이 져 있었지만 콧망울은 복스럽게 동그란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가 언제나 발정하는 그의 섹시하고 커다란 입술은 아까 말한것처럼 작게 벌어져 깊고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은 무방비한 어린아이 같기도 하고 짙고 달콤한 정사를 마친 만족스러운 사내의 얼굴 같기도 하였다.
나는 반듯하게 누워서 단지 고개만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태경은 내 쪽으로 돌아누워서 나를 껴안고 있었다.
이렇게 얼굴을 딱 마주대고 누워서......
나는 또 내가 처한 현실을 망각해 버렸다.
“죽이게 귀엽구만....”
“....흠....”
“안 일어나냐? 커피 안줄꺼야?”
나는 그저 바스락하는 소리만으로 잠에서 깨어나지만 태경은 영 그런 스타일의 수면습관은 가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근 삼십분에 달하는 사투를 포기하고 나는 직접 그를 깨우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여태껏 뭔가 심각하게 미간을 찡그리고 있던 얼굴이 부드럽게 펴지면서 태경은 아찔할만큼 아름다운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야! 한태경!!!! 커피 줘!!!!!”
“조금만....”
나도 남과 같은 평범한 유년시절을 가졌다면 커다란 목소리로 아침을 깨우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저렇게 애처러운 간청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문득 가슴을 치고 지나는 원망과 분노가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그 슬픔은 내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고 그 원망은 내 주변을 둘러싼 철벽과 같은 담을 만든 근원이었다.
나는 그 익숙한 고통에서 달아나기 위해 언제나 아무렇지 않은듯 너스레를 떨거나 더 혹독하게 나를 몰아세우는 일을 해왔었다.
그리고 나는 이번에는 천편일률적인 그런 반응대신 그 화를 풀 다른 상대를 찾아내었다.
“야 임마! 입냄새!!!! 지독해. 너 위 안좋지? 앙? 맨날 라면 쪼가리 같은거나 주워 먹고 있으니 위가 그 지경이지!!! 야 너 저리 가! 으액!!!! 진짜 사람이 못 맡을 냄새야. 꾸엑!!!!!”
“.......”
워낙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발버둥을 쳐서 태경은 부시시 눈을 뜨고는 한참동안 멀뚱멀뚱 눈꼽 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슬픔에서 달아나는 방법.
태경의 어리둥절한 눈은 내가 지금까지 취해왔던 어떤 행동보다 확실하게 그것에서부터 나를 격리시켰다.
“이 닦아! 너 그리고 위장병 치료해라. 아욱!!!! 드런 새끼.”
“......”
“가서 이 닦고 오고 나 커피 만들어 줘! 뭘 봐! 지놈 뱃속에 있는 밥주머니 하나 못챙기는 병신! 게으른 인간이나 위장병 같은걸 달고 다니는 거야. 그만큼도 자기 관리를 못하는게 무슨 성인이야! 으액!!! 저리 꺼져. 입냄새 장난 아냐!”
나는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명치가 아릿하게 아파오면서 목울대가 꽉 조이는듯 힘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뜰때 내 옆에 잠들어 있는 누군가와 마구 성깔을 부리듯 패악을 치지만 정말은 걱정이 되어서. 나쁜 그의 위장이 안타까워서 소리를 지르는 나의 모습.
그렇게 가질 수 있는 너무도 일상적이고 평범한 아침의 풍경을 동경한 오랫동안의 그리움이 절대로 내가 원한 시추에이션으로 연결되지 않는 이것을 달콤한 거짓으로 덮고 있는 것이 서러워서 싸아하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성질머리 하고는.....”
태경은 마치 내 조심스러운 바람을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지금 이 순간에는 건방진 바보 룸펜이니 노리개 감이니 수업이니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마치...
그는 내가 가장 간절히 원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그런 사람처럼 기운차게 벌떡 몸을 일으켜 섹시한 엉덩이를 북북 긁으며 방을 나갔다.
아아...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