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줘!!!!!!!!!!”
나는 핏대를 세우며 벌써 다섯번은 똑같은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세탁 삼매경에 빠진 태경의 귀에는 숲의 새소리만큼 일상적인 소음에 불과한 것인지 그는 꿈쩍도 하지 않은채 침실에서 벗겨온 시트를 큰 대야에 구겨 넣고 세제와 표백제를 정량 넣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옷은 달란 말이야! 젠장. 인질에게도 인격이란게 있는거야. 대체 홀딱 벗겨놓고 뭘하겠다는 거야!!!!”
나는 차가운 마룻바닥에 발 뒷꿈치를 탕탕 구르면서 분에 겨워 견딜 수가 없다는듯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여전히 태경은 그런 나의 고함소리에 무신경했다.
나는 별 생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침 커피를 마신 직후 주방으로 끌려가 반공기의 밥과 인스턴트 계란찜과 완전조리 식품으로 나오는 재첩국을 먹어야 했다.
그런 음식 따위를 집어 넣고 소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내 위장은 아침의 허기를 느끼지 않기 때문에 굉장히 불만스럽게 입을 내밀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보던 것과는 아예 근본부터가 다른 흉흉한 검은색의 딜도를 -그것은 끔찍하게 굵고 길고 하여튼 생각하는것도 싫을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흔들여 먹을래? 박힐래?의 선택을 종용하는 태경의 협박에는 굴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세상에...
겨우 태경의 손가락보다 조금 굵은 것을 넣고도 뼈가 녹는 것처럼 괴로워(?) 했었는데 그런 물건 따위를 넣을 수가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 난 굉장히 비겁한 사람이다. 더군다나 아픈건 질색이다.
결국 나는 놈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일때까지 소금을 씹는 것 같은 맛만 느껴지는 괴로운 아침식사를 꾸역꾸역 위속으로 집어넣어야 했고 그리고 대체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잉크를 탄 것 같은 검은색의 알 수 없는 한약까지도 마셔야 했다.
대체 인질에게 보약까지 먹여가며 학대하는 인질범은 개그의 소재로나 쓰일까 정말 재미없는 이상 논리의 결과물인 것이다.
“한 태경!”
“.....???”
산등성이에 있는 집까지 수도가 연결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지하수를 끌어다 쓰고 있는 이집에서 세탁이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량이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지하수에 풍부하게 섞여 있는 광물질은 흰색 침구가 아니면 눈길 주지 않는 나의 취향에 지독히도 맞지 않는 세탁 결과물을 번번이 뱉어내곤 했던 것이다.
때가 가시지 않아 회색처럼 침울하게 건조대 위를 펄럭이는 시트를 보다 못해 1층에 있는 욕실과 2층의 욕실, 그리고 주방을 거쳐 다용도실과 겸해 있는 세탁실까지 연수기를 해 달은 덕택에 나는 만족스러울만큼 새하얀 시트를 다시 가질 수 있었다.
태경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나를 보면서 그 연수기의 물을 틀어 시트가 가득 담긴 대야에 물을 담고 있었다.
“옷 내놔!!!!!”
“왜?”
“하!.....”
무슨 명분으로?
나는 잠깐 계속 발 뒷꿈치로 바닥을 구르는 모양새를 한채 서서 바지자락을 걷으며 대야 속에 시트를 밟을 준비를 하는 태경을 바라보았다.
놈은 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이렇게 홀딱 벗겨 놓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놈은 분명 목 바로 아래까지 단정하게 단추를 채운 옷차림을 하고 있지만 나는 그렇게 했다가는 언제 도망칠지 모르니까 이렇게......
“추워!”
“집안의 온도는 30도야. 홀딱 벗고 있다고 춥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온도는 아닌데?”
찰박찰박!
놈이 시트를 모질게 밟아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왜소하게 수그러들어 덜렁거리는 내 성기와 음영을 지닌 거웃을 재미있게 바라보는 태경의 시선에서 몸을 돌렸다.
“도망치지 않을테니 옷 줘!”
“도망 칠 수 있다면 바로 경찰서로 달려가겠다고 말한건 바로 오늘 아침이었어. 부탁인데 말이지... 당신의 기억력과 다른 사람들의 기억력은 동일하지 않아. 제발 나를 당신과 같은 한정치산자로 취급하는 일은 그만해줄래?”
“잇!!!!”
“더군다나 나는 이제 겨우 스물 여덟인걸? 교도소 같은 곳에 가고 싶을리가 없잖아?”
그는 스물 여덟이었구나.... 나와는 겨우 일곱살 차이가 날 뿐이네?
하는 바보같은 생각을 하며 나는 참 한심하게 감동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하는 일년동안 나는 그가 나에 비해 굉장히 어리고 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의 청춘과 활기에 주눅이 들 때도 있었다.
실제로는 겨우 일곱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 묘하게도 이상한 부분에서 즐거워졌던 나는 이런 한심하고 불합리한 의식의 발전에 혀를 씹었다.
대체 나는 정말로 한심하기 그지 없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아닌가.
이 상황에 그가 나와 일곱 살 차이가 나건 칠십 년 차이가 나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인질범, 인질범을 몇 번이고 마음 속으로 되풀이하면서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빨래를 밟고 있는 태경을 노려보았다.
“어찌되었건 옷이나 줘. 내 체력으로 널 따돌리고 마을까지 내려갈 수 있을리 없잖아.”
“......”
“한 태경! 옷 내놔아!!!!!!”
“거참!”
태경은 발가락으로 시트를 집어 올려 뒤집어 다시 밟고 다른 발가락으로 다시 시트를 반대편으로 뒤집어 밟는 일을 하면서 짧은 한숨과 같은 소리를 내뱉고 허리춤에 커다란 손등을 턱하니 올려붙인 자세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심심한가보지? 어제까지는 굉장히 괴로운 일을 몇 번이고 당했으면서도 조금 편하게 내버려두니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는가 보지? 아까 본 그 녀석을 꽂고 꼼짝도 할 수 없이 묶인채 하루종일 내버려둘까? 아니면 들며 나며 당신 속에 파뭍힌 그놈을 흔들어 주면서 죽을것 같은 당신 신음소리를 한번 즐겨볼까? 한번만 더 소리를 지르며 내 일을 방해한다면 거실 테이블 위에 묶여 그런 꼴이 될테니 고 앙칼진 목소리 다시 한번 높여보시지.”
옷 내놔!!! 하는 따위의 어린애 투정 같은 목소리는 목구멍으로 나가지 않고 뱃속으로 꿀꺽하며 삼켜져 버렸다.
저렇게 웃으면서 말하고 있지만 태경은 그런 일을 하고도 남을만큼 굉장한 행동력을 지닌 사람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집주인을 인질로 잡고 온갖 흉칙한 짓을 하고 있으면서도 교체할 때가 된 시트를 벗겨 빠는 그의 행동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는 의외의 면에서 성실한 사람이었다. 성실하기 때문에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을 번복하는 일이란 없고 그래서 더 무서운 사람인 것이 확실했다.
나는 자존심이란건 땅바닥에 패대기를 치고 다소곳이 거실의 소파로 돌아와 무릎을 세우고 발목을 꼬아 드러내놓고 있기 불편한 중심을 가리면서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왕처럼 군림하면서 시건방진 민규태를 코끝으로 움직이던 유영신은 규태가 출장가면서 저만치 먼 바다에 떨어트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나 한심한 꼬락서니인지......
한참동안 나는 무릎을 껴안은채 그 무릎 위에 뺨을 대고 웅크려서 단말마로 끊어지는 많은 생각들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나는.......
나는 심심했고 어쩌면 그래서 뭔가 재미있는 일을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애벌빨래를 마쳤는지 욕실에서 실컷 밟아대던 대야를 들고 거실을 지나쳐 세탁실로 가던 태경이 잠깐 발길을 멈추고 서서 내가 하고 있는 모양새를 보고는 낮게 한숨을 쉬는 것도 알고 있지만 고개를 들기는 싫었다.
그리고 우렁찬 소리와 함께 돌아가는 세탁기 소리에도 꼼짝하기 싫었고 주방에서 뭔가 또 다시 음식을 만들고 있는 태경이 뭘하는지 보고 싶지도 않았다.
이불을 홀딱 벗겨버린 편안하고 안락한 나의 침대는 나와 같이 흉흉한 꼴을 하고 알몸뚱이로 있으니 지금 집안에 어디에도 내 아래를 가릴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참동안 소파 위에 쭈그리고 앉아 따땃한 사월의 햇살을 쬐고 있으려니 게으른 하품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어딘가 창문을 열어두었는지 흥에 겨운 산새들의 노래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오고 있었다.
새들은 노래하는 것일까 울고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에서는 새들이 운다고 표현하지만 영어를 말하는 나라에서는 새들은 노래한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새들이 우는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새들은 노래하는 것일까 우는 것일까.
나는 정말 한심한 생각들을 하면서 등을 구부리고 있는 자세로 한참동안 그렇게 소파 위의 인형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옷은 줄 수 없어.”
그게 굉장히 게으르고 의미없는 생각이었다고는 하지만 나는 직업상 생각이란 것을 할때 굉장히 열중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작가였고 그래서 그런 내 사고의 중간에 확 떨어지는 타인의 말소리 같은 것은 굉장한 충격임이 틀림없었다.
운기조식하는 무도인이 방해를 받은 것처럼 심장마비를 일으킬 것 같은 심정으로 나는 내가 앉아있는 소파 위에서 삼센티 정도는 허공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늘어지고 말았다.
“우아악!”
“......”
사지를 늘어뜨리고 소파 등받이에 등을 딱 붙인채 똥그랗게 눈을 뜨고 태경을 보는 나를 한심하게 내려다보는 태경의 검은 눈속에는 진짜로 불쌍하고 처량한 사내가 땅바닥에 패대기쳐진 개구리처럼 비스듬하게 누워 있었다.
“못살겠군......”
“뭐야! 씨발... 지...진짜 놀랬잖아!”
“밥 먹어.”
“안먹어!”
물론 턱도 없는 반항이었다.
하지만 난 골똘한 상념을 방해받은-비록 그것이 쓸모가 있건 없건간에 말이다- 것에 굉장히 화가 나 있었고 이번에야 말로 먹을래 박힐래 따위의 유치한 협박을 해도 듣지 않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었던 것이다.
“정말?”
“안 먹어. 아침 먹은거 아직 소화되지 않았어.”
“할 수 없군.”
그런데 태경은 내가 예상하는 유치한-하지만 무서운 것은 사실이었다- 협박은 하지 않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 해보이고는 주방으로 돌아가 차려놓은 음식을 정리해 넣는 것 같은 소리를 낼 뿐이었고 나는 이번엔 조금 점잖게 소파의 등받이로 등을 기댄채 앞을 손으로 가리고는 의심스러운 주방만 노려보고 있었다.
원래의 태경은 내가 신경질을 내면서 안먹는다고 말을 하면 예 예 그러세요... 하는 공손한 말로 차려놓은 밥상을 거두었고 그래서 나는 그가 밥상을 차렸다 다시 접는 일을 하는 것에 하등의 미안함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태경은 아무리 잔인한 짓을 해버려도 이상할게 없는 평소의 태경과 다른 인질범인데도 그는 예 예 하는 듯한 얼굴로 주방에 들어가 버린 것이어서 나는 불길한 예감에 미간을 찡그려야 했다.
나는 응석을 부리는 것처럼 그가 절대 나를 헤치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마음대로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소박한 믿음 따위 언제고 깨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게 태경과 나는 남이었다.
그는 나의 고용인으로 있으며 뭔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화가 나는 일을 꾹 가슴 깊은 곳에 눌러 참고 있는 지도 모르고 지난 일년은 한 태경이라는 인물을 정확히 판단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인지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아무리 그를 믿어도 태경은 흉악한 악당에 지나지 않고 나는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는 놀이개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었다.
입술을 깨물며 어떻게 해야좋을지 몰라 그렇게 한참동안 소파에 앉아있는 동안 태경은 식탁 위를 다 정리했는지 아침에도 본 약사발을 들고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평소와 하나 다를바 없는 평온하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변덕스러운 나의 내면에서 그는 머리 위로 커다란 뿔이 솟은 악마처럼 보이는지도 몰랐다.
“저....”
“약도 먹기 싫다는 말은 하지 않는게 좋아. 심신을 안정시켜주고 불면증을 없애주는 약이라니깐.”
“..... 미안해.”
“응?”
나름대로 이건 너무 비굴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어찌되었건 매번 나를 위해 상을 차리고 내 변덕에 의해 그것을 다시 치우는 일을 하루에 적어도 한번은 하는 태경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
그가 나를 억류하고 괴롭히며 놀리는 지금의 나약한 입장 때문이 아니라 지난 일년동안 그가 그런일을 하게 만든 나 자신에 대한 사과일지도 몰랐다.
나는 어찌되었건 많은 이유와 억울함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히스테릭한 행동에 대해서는 사과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뭐가?”
“그... 그동안... 수고해서 밥을 차려줬는데 먹지 않겠다고 소리질러서 미안해. 난...”
“별 소리를 다 듣는군. 난 그 일을 하고 당신에게 월급을 받았어. 자. 마셔.”
정말로 사과라는 걸 할 기분이란게 들었다는 사실에 나조차도 놀라면서 조금쯤 감동하고 있었지만 태연하게 그걸 넘겨버리는 태경의 대답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태경은 검은색으로 일렁이는 약사발을 바로 내 코앞까지 들이대었고 역한 약냄새는 내 미간을 찡그리게 만들었다.
밥을 안먹는다고 그동안 그를 괴롭힌 것은 진심으로 미안하지만 약은 정말로 먹기가 싫었다.
“무...무슨...”
“말했잖아. 심신을 편안하게 하고 불면증을 치료하는 약이라고.”
“하지만 한약이란건...”
“전에 규태 형님과 유명하다는 한의원에 간 기억이 나?”
“.....”
분명히 그런일이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나는 취재를 하기 위해 한의사를 찾았던 것이고 반쯤은 장난처럼 진맥을 맡기기도 했었다.
절대로 그 젊은 한의사가 말하는대로 스트레스에 치여 죽기 일보직전이니 어떤 것이라도 릴렉스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는 웃기지도 않는 경고와 약을 먹는게 좋을 것 같다는 충고는 귓등으로 흘려 들었었다.
나는 술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는다.
오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취미 생활도 가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주구장창 틀어박혀서 글을 쓰고 책을 읽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없었다.
열살 넘어 내 머리로 생각이란 것을 하기 시작하면서 분란한 내 가정의 소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모든 것에서부터 마음을 닫아걸고 글을 쓰거나 읽는 것에 몰두하는 방법 말고는 내게 탈추구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덕에 나는 돈 한푼 내지 않고 대학에 갔다.
그리고 나는 이 집을 장만할 수 있을만큼 돈을 벌었고 혼자 먹고 사는 것은 평생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해도 충분할만큼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었다.
열살이 넘어 지금까지 그러니까 이십오년동안 나는 한가지 일만 했고 그것 말고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셈이었다.
딱히 지금 생활의 여유가 생기고 그 어떤것도 나은 균형잡힌 생활의 평온을 깰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하였다고 내가 다른 곳에 눈을 돌려 뭔가 재미난, 그러면서 나를 안정시킬 수 있는 일을 찾을 필요는 솔직히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십오년동안 나는 글을 쓰며 내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었고 다른 것에 흥미도 관심도 필요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규태 형님이 당신 몰래 지어온 한약이야. 지어오기는 했지만 어떻게 먹여야 할지 모르겠다고 우리 둘다 좀 곤란해 했었지. 이 참에 이거나 먹일까 하고 어젯밤에 약탕기에 넣어둔거지. 한재를 다 먹고 나면 불면증은 훨씬 나아질거라고 그 의사가 호언장담을 했다니 속는셈치고 먹어는 보는게 어때? 나쁜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리고 착하게 잘 먹는다면 상을 줄께.”
“?”
나는 어이없는 얼굴로 태경을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내 코앞에 약사발을 들이대고 있는 태경의 커다란 손은 물일을 하였는지 뽀얗게 젖어 있었다.
촉촉하게 느껴지는 손가락의 섬세한 주름들과 상이라는 단어는 묘하게 매치되어 심술을 부리느라 잊고 있었던 내 속의 관능을 팍! 하고 불붙여 버렸다.
나는 그동안 먹고 자고 쓰는 생활의 단조로움에 만족하고 살았지만 어느 순간 아니 아주 최근의 몇일부터 먹고 자고 쓰는 것을 제한받는 대신 굉장히 거절하기 힘든 달콤함을 알아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 정말 곤란한 사람이군. 다시 가져올까? 아침의 그놈. 벌을 받을지 상을 받을지는 당신이 결정해. 나는 어느쪽도 즐거우니까 말이야. 상황을 직시하고 현실에 적응하는게 어때. 응?”
조금 야비해 보이는 웃음을 웃으며 태경은 곤란한듯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얼굴도 그의 섹시한 입술을 망칠 수는 없는 것인지 나는 홀린듯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그가 말하는 아침의 그놈이란 것을 떠올리고는 나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고 말았다.
엄청 흉해 보이는 검은색의......
나는 마치 태경의 손에서 약사발을 빼앗듯 받아들고는 단숨에 그것을 마셔버렸다.
그건 수없이 많은 풀들을 오래 끓여서 내린 물처럼 쓰고 텁텁했지만 느끼한 맛은 없었기 때문에 토하고 싶어질 정도는 아니라해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좋은 맛은 아니었다.
적당히 데워진 약물은 내 식도를 거쳐 위로 내려가면서 입에서는 그리 뜨겁지 않았던 것이 마치 찬 겨울바람에 한참 방치되어 있다 포장마차의 뜨거운 오뎅국물을 마신 것처럼 속에서 확 하고 불이 붙는 것마냥 뜨끈뜨끈하게 열감을 내기 시작했다.
약이란게 원래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찌되었건 굉장한 걸 마셔버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끈거리는 속을 느낀 것은 내가 약사발을 마지막 한모금까지 삼켜버린 직후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혀가 아릴만큼 쓴 약을 다 마시고 온갖 인상을 쓰면서 내가 약사발을 내려놓고 입가로 흐른 약을 닦으려고 했을때 나는 태경으로 인해 손목이 붙들려지고 말았다.
나는 정말로 혼이 쏙 빠져나갈 만큼 혀가 쓰고 속이 뜨거워서 정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는데 냉큼 내 입가에 뭍은 약을 핥아 버리는 태경의 혀에 십겁을 하고 놀라 버렸다.
분명히 아침에 먹은 것은 이만큼 독하거나 화끈거리지 않았는데.... 하는 생각도 십리만리 달아나 버려서 나는 연신 내 입술에까지 달려들어와 입안에 남은 약맛을 모조리 걷어가겠다는듯 우악스러운 키스를 하는 태경에게 뭐라 반항한번 못하고 고스란히 입술을 내어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머리속으로 ‘겨우 이게 상이야?’ 하는 어린애 같은 생각도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진짜로 한심하기 그지 없는 녀석인거다.
서른다섯이나 처먹어서는 하는 생각이란게 고작해야 어떻게 하면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허리가 아프지 않고 오랫동안 잘 수 있지? 하는 따위이고 그나마 성인과 같은 생각을 하는건 일을 할때 뿐인 것이다.
몇 되지도 않지만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나를 보고 한심하게 혀를 차면서 위태로워 하는 것은 다 이렇게 발달되지 못한 나의 정신적인 어떤 면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무방비로 내놓은 내 입술을 태경이 마음대로 핥고 빨아대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아니, 내버려 두었다기보다는 차마 반항하거나 거절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 훨씬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왜?”
바로 코앞에 자신의 코를 맞대고 있는 태경의 눈을 들여다 보는 것은 힘이 들었다.
너무 가까와서 사팔이 눈이 되는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작게 웃음기가 베어 있는 것은 확실하게 구분 할 수가 있었다.
“뱃속이 뜨거워....”
“약이 뜨거웠나?”
“그렇게 뜨겁지는 않았어. 하지만 뱃속이 뜨거워.”
“꽤 독한 약이라고 하더니 그런 의미였나보네? 가끔 속이 냉한 사람들에게 처방하는 한약은 굉장히 뜨겁다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몸에 나쁜 것은 아니야.”
입술과 입술을 마주대고 간질간질하게 느껴질만큼 가깝게 코를 맞댄체 말하고 있는 태경의 체취는 참 기분 좋은 것이었다.
소름이 오짝하고 돋을만큼 달콤하게 느껴져서 나는 계속 눈을 감은채 이런 상황이 굉장히 좋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의 미련도 없다는듯 훌쩍 태경의 자취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나는 한참동안 눈을 감은채 내가 느끼는 이 불합리하고 비정상적인 평온을 즐겼다.
뭐 마음 한쪽에서는 웅성웅성 미워해야 한다느니 도망쳐야 한다느니 하는 소리들이 들렸지만 다른 마음 한켠으로 나는 어쩌면 세상과 단절된 이런 상황에서 조금의 불편도 느끼지 못한채 내가 가질 수 있는 태경의 모든 것을, 상상으로만 가져온 그의 모든 것을 실제로 독점하고 싶다는 음탕한 욕구들이 번잡스럽게 들끓고 있는지도 몰랐다.
실제로 나는 한번도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산 적이 없었다.
나는 사람을 만나지 않고 세상과 소통되지 않고 그렇게 줄곧 혼자만의 세상에 나를 가두고 살아왔다.
제멋대로 그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나를 자신의 친구라 칭하며 마음대로 끌고 다니는 규태녀석이라고 해도 내가 그를 온전히 인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지나치게 열성적으로 나를 껴안으려 하고, 내 세상으로 제녀석을 집어넣으려 했기 때문에 반쯤 그냥 방치하는듯 내버려둘 뿐이었다.
그렇게 너무 오랫동안 나는 나 혼자만 존재하는 시공의 비뚤린 공간에 살고 있었고 그곳에 지금 내 허락을 받지는 않았지만 누군가 들어와서 제 나름의 의미로 나를 격리시킨다고 내가 답답해 하거나 못견뎌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는지 몰랐다.
그리고 나는 원칙적으로 한 태경이라는 남자를 흠모하고 있었고 그가 나를 더이상 아프게 하지 않는다면 그가 행하는 어떤 일도 그닥 별 상관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그런식으로 열심히 자기합리화의 상념에 빠져 있는 나는 부드러운 손길에 어루만져 졌고 눈을 떠서 상대를 확인하는 무의미한 일을 하고 싶지도 않은 마음에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더니 어린아이처럼 안아 옮겨졌다.
어디로 가는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이제 궁금하지도 않았고 뜨듯하게 데워진 뱃속의 느낌이 그리 나쁜것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쪽에 속했기 때문에 나는 나른하게 계속 눈을 감은채 부유하듯 떠가는 어디론가를 생각하며 기분좋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편안하게 안착한 곳은 익숙하게 생각되는 바삭바삭 마른 침대 시트 위였고 비록 내 팔목은 가차없이 침대의 헤드위로 돌려져 묶였지만 포근한 이불이 덮여오는 감각에 그냥 내처 눈을 감은채 고롱고롱 낮은 숨만 내쉬기로 마음을 먹었다.
“잠깐 외출을 해야해.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가 보지?”
“흐응.....”
손가락 하나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을만큼 몽롱한 기운이 온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약사발의 약물을 처음 들이켰을때처럼 빠르게 따땃하고 기분좋은 안도감으로 혈관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 퍼져나가고 있었다.
“뭐지?”
“졸려....”
겨우 실눈을 뜨며 길게 하품을 하는 나를 보고 태경은 잠깐 당황하는듯한 낯색을 내비췄지만 그는 겨우 침대 시트를 새로 까는 시간동안 마취제를 투여받은 짐승처럼 꼬박꼬박 조는 내가 그리 나쁘지 않은 상태라고 판단했는지 토닥토닥 내 가슴위로 덮힌 기분 좋은 양모 이불을 두들여 주었다.
“의사가 호언 장담을 할만한거 같군. 좋아. 내가 나가 있는 동안 잠이나 실컷 자라고.”
“흐응.....”
그게 약기운인지 뭔지는 정말 알 수 없지만 나는 양지바른 곳에서 겨울 햇볕에 기분좋게 늘어진 아기곰처럼 금새 꿈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건 내가 생각할 수도 없는 깊은 잠이었다.
나는 잠깐 잠깐 낮잠을 자거나 어디서건 가리지 않고 토막잠을 자는 습관은 가지고 있었지만 남들이 매일밤 취하는 숙면은 한번도 취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바스락하는 소리에도 화들짝 깨어나는 나의 수면신경은 팽팽하게 당겨진 바이얼린의 줄처럼 언제나 바짝 긴장한채 느슨해지지 않았고 한동안은 병원에서 수면제를 처방받아 잠이 들어야 했을만큼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수면제에 취해 잠을 잘때도 나는 반쯤 깨어 있었고 잠든 내 주변의 소리들이 어떻게 울리고 있는지 어떤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명확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기억할 수 없이 먼 옛날 내가 아기적에 그렇게 했던 것처럼 내 스스로 어떤 욕구에 의해 깨어날때까지 단한번도 주변에 신경쓰지 않는 깊은 잠을 처음으로 잘 수가 있었다.
그게 내가 마신 한약 때문이라면 나는 그 약을 매일매일 마셔도 좋다는 생각을 하였다.
**********다섯번째 하루
제대로 잠을 자고 일어난 기분을 처음으로 맛보았다고나 할까...
내가 눈을 떠 가진 느낌은 그런 것이었다.
정말 깊고 포근한 솜이불 속에 포옥 파묻혔다 빠져나온 것 같은 안락한 기분은 내 얼굴을 간지럽히는 사월의 아침 햇살 아래 간질간질하게 심장을 긁어대고 있었고, 더할나위 없이 쾌청한 심리적 평안함은 저절로 띄어지는 미소로 표현되었다.
나는 굉장히 개운하고 즐겁고 행복한 기분으로 눈을 떴고 더군다나 잠이 들 때도 그닥 불편하게는 생각하지 않았던 팔목은 풀려져 얌전히 내 가슴 위에 있었다.
“정말 징그럽게 자는군.”
“...????”
태경은 불쑥 내 앞으로 나의 아침 식량을 내밀며 흐리게 웃고 있었다.
나를 깨운 것은 반짝거리는 사월의 아침햇살도 아니고 충분하게 잠들어 있었던 육체가 이제 슬슬 움직여 볼까 하는 생각에서도 아님을 깨달았다.
나는 달콤하고 익숙한 커피 향기에 깨어났고 그것은 이제 방금 끓인 것을 증명하듯 자잘한 우유 거품이 잔뜩 떠 있는채 뽀얀 김을 올리고 있었다.
“밥 아니면 씨리얼.”
“......”
기분 좋게 자고, 그리고 기분 좋게 모닝 커피를 마시는 귀로 듣기에는 심각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었기 때문에 나는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데 태경은 그런 나를 조롱하며 협박하는 것에 재미를 들린 사람처럼 서슴없이 침대 옆의 협탁에서 그 흉칙한 물건을 꺼내 흔드는 것이다.
제엔장.....
“씨리얼!”
사악해도 저게 저렇게 사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의 탈을 쓰고 태어나서 저렇게까지 사악하고 숭하면 못쓰는 법이다.
나는 혼자 생각만으로 궁시렁궁시렁 욕을 해대었지만 내 미각을 만족스럽게 휘감아 흐르는 달콤한 우유커피 그리고 충분히 자고 난 뒤 개운해진 생각들의 즐거움을 훼손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나는 홀딱 벗은 알몸에 감금당하고 있는 인질에 흉흉한 강간범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지만 나는 그럭저럭 행복했다.
어째서 그럴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찌되었건 나는 씨리얼을 먹는 동안에도 그리고 어제 낮에 먹었던 것과는 또 다른 맛이 나고 있는 약사발을 들이켰을 때도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니, 굉장히 들떠있을 정도로 좋은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이 약을 먹고 나면 또 어제처럼 뱃속이 따땃해지면서 졸음이 쏟아질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이 녀석이 아무리 흉한 짓을 한다고 해도 잠들어 버리면 알 수 없으니까... 하는 심정으로 현실에서 열심히 도망가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제 낮에 먹은 것과는 달리 조금 밍숭맹숭한 맛이 나는 약사발은 마치 어제 아침에 먹은 것처럼 그냥 조금 쓰고 배가 부르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신체적 변화를 선사하지 않은채 내 위속에서 출렁거렸다.
어이없이 실망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 버린 것인지 태경은 식탁 위에 턱을 받치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제대로 지은 약인지 아침 처방, 점심 처방, 저녁처방이 모두 달라. 어제 저녁은 꽤 곤하게 잠들어 있어 먹이질 못했는데 아침 처방은 당신 기대만큼 졸음이 오거나 하는 약효는 없는거 같지?”
“...... 좋았는데...”
“약 먹는 거 싫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피울 때는 언제고?”
“......”
든든하게 뱃속도 채워지고 충분하고 남을 만큼 개운하게 자버리고 그러고 나니 나는 못된 호기심처럼 손가락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는 기분이 되어버렸다.
그건 황칠을 해놓아 도저히 쓸 수 없다고 생각되었던 캠버스 위에 흰색 물감을 고르게 도포한 것처럼 굉장히 커다란 공백으로 반짝이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 위에 나는 뭔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고 그래서 내가 느끼는 이런 새로운 경험의 채색으로 정신 없이 빈 화면을 채워야 할 것 같은 안달이었다.
그렇게 하고 싶고 꼭 지금 그걸 못하면 아슬아슬하게 기억에 걸쳐 있는 좋은 기분이라는 묘사를 영영 잃어버릴 것 같아서 나는 입술을 깨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글을 쓴다는 것은 영 몹쓸 일이다.
나라는 주체는 거울처럼 투명하게 아무것도 없이 그냥 텅 비어있는 공간으로 내버려두고 내 안에 뭔가 조그마한 것이라도 스며들어온다면 어떻게 그것을 밖으로 내비춰보일까만 생각하게 되는 그런 일이 글을 쓴다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온전히 텅 비게 내버려두고 나라는 인격이 가지는 개인적인 감성이란 건 한올도 남김없이, 내가 가지고 흡수하고 수긍하는 모든 것은 그저 내가 밖으로 내보내는 단어들의 색감이 되어 한번도 머무르지 않고 나를 떠나버리는 것이다.
그게 아깝거나 아쉬워도 굉장히 안타까운 기분이 든다해도 어쩔 수 없이 꼭 누가 강제로 시켜서 그렇게 하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펜과 종이를 찾고 있는 내 모습에 나는 내 스스로가 참 처량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자 하루 늦춰지긴 했지만.....”
“....???”
나는 물끄러미 태경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찌 보면 조금 겸연쩍어 하는 것 같았고 또 어찌 보면 좀 경직되어 보이기도 하였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미처 이해하지 못했지만 언제나 강력한 자기보호 본능의 민감성을 자랑하던 내 머리 속에 경계경보는 새빨간 회전등을 점등하면서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 무엇보다 절실하게 글을 쓰고 싶은데 놈이 하고 싶어하는 것은 다른 것이 분명했다.
그는 어제의 평온한 하루처럼 오늘의 나를 내버려둘 생각이 요만큼도 없었고 뻔뻔한 주둥이로 놀려대던 그놈에 수업인지 뭔지를 지금 당장이라도 착수할 기민한 행동력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게 마치 먹이감을 사냥하기 직전처럼 느긋하게 보이지만 섬세한 근육 하나하나에 응축되어 있는 힘과 기운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사자의 모습 같아서 나는 십겁을 하면서 식탁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딱 갖다 붙였다.
그건 마치 사냥 당하는 가엾는 어린 동물의 본능처럼 이성적 사고 보다 빨리 내 몸을 움직였지만 당장 눈앞에 무시무시한 눈과 직면한 나는 그저 의자의 등받이에 찰싹 등을 붙이고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하게 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기묘한 억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태경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 손목을 그러쥐고는 방금 전 기분 좋게 내가 빠져 나왔던 침실의 내 잠자리까지 끌고 갔고 뻣뻣하게 굳어 있는 나를 침대 위에 억지로 앉게 하고는 한참동안 새까만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뭐!”
“글쎄.....”
태경은 웃고 있었다.
분명히 웃고 있는데도 그는 달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칼날처럼 스윽 하고 가슴을 저밀것 같은 잔인함을 품고 있었다.
싫다고 도리질치는 나를 우악스럽게 안을 때.
고통스러워 비명소리말고는 아무것도 질러대지 못하며 악악대는 나를 아무렇게나 들쑤실때.
그는 꼭 저런 얼굴이었다.
평소 그의 얼굴을 단정하고 기품 있게 만드는 차분한 표정 없이 잔뜩 열에 들떠서 가물가물 정욕에 스러진 그런 야차의 모습으로 태경은 웃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도 이런 황당한 반전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훤한 아침 햇살아래 드러내는 저 숭하고 발칙한 성욕의 대상이 나라는 사실은 굉장히 좋지 않았다.
내 머리는 맹렬한 속도로 돌아가며 어떻게 하면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 마치 어제와 같이 평온하고 즐거운 주변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였지만 천천히 내 머리위로 내려오는 그의 얼굴을 느끼며 질끈 눈을 감아 버리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어차피 처음부터 알고 있는 것이었다.
왜 내가!!!!
라는 부질없는 의혹이 다시 첫날밤의 끔찍한 고통을 되살리며 지분거리듯 나를 물어뜯기 시작하였다.
왜 나인가. 어째서 나인가.
왜 그는 나를 탐하려 한단 말인가.
나를 갈기갈기 찢어 발길듯 고통스럽게 범하며 어째서 그는 나를 이토록 아프게 만들려 한단 말인가.
왜 나여야 한단 말인가. 내가 뭘 그리 잘못했길래.....
사지 육신의 뼈들이 다닥다닥 소리를 낼만큼 무섭게 떨려오는 두 팔을 꼭 움켜쥐고 나는 질끈 눈을 감은채 내가 까맣게 잊었다고 생각한 그날 밤의 무시무시한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게 하나하나 되살아나는 것을 무기력하게 두려워하기만 하였다.
변덕스러운 봄날의 날씨처럼 녹을듯 부드럽게 나를 대해주던 아니, 녹을듯 부드러운 정도는 아니라해도 마치 연인처럼 다정하게 대해주던 한 태경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아주 사소한 원망과 쓸모 없는 상념들이 번쩍번쩍 섬광을 남기며 사라지는 의식 속에서 내가 기억하는 끔찍한 고통은 그리 빨리 나를 덮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우아하고 느린 움직임으로 내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 두팔을 꼭 껴안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손을 가만히 떼어내서는 침대의 헤드로 돌려 묶었다.
어째서 내가 아무런 저항없이 그가 행하는 폭행에 이토록 순응하는가는 두번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크지 않은 키에 뼈와 가죽만 남았다고 말할만큼 유약한 몸을 하고 있다.
하지만 태경은 그런 나를 아기처럼 번쩍 안아들고도 조금의 위화감 없이 움직일 수 있을만큼 커다란 몸을 하고있는 건장한 청년인 것이다.
발악을 하면서 덤벼들면 그래 몇대쯤 두들겨 패는 것은 가능할꺼다.
하지만 두 대 패고 열대 맞은 뒤에 강간당하는 것보다는 한대도 안맞고 좀 다정하게 대해주는 것을 기대하는 게 더 영리한 행동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구태여 변명을 하자면 그런 것이지만 나는 시커먼 정욕을 안고 번들거리는 태경의 눈을 보고는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못하게 되어버려서 그가 시키는대로 그저 그의 처분만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내 삶의 최근 기억중 가장 극악했던 그날 밤의 상황이 고스란히 재현되는듯 나를 엄습한 공포는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짙고 무거운 것이었다.
이렇게 꼼짝도 할 수 없이 묶인채 저렇게 번들거리는 야수의 눈을 하고 있는 남자에게 나는 겁탈당했다.
온몸을 찢어 발기는듯한 내부의 통증과 섬세하리만큼 정확하게 가장 고통스러운 자극의 접점으로만 끝도 없이 헤집어지던.... 내게 섹스의 기억이란 그게 전부였다.
태경이 만들고 태경으로만 채우진 기억 속의 그 일을 당장 눈앞에 두고 나는 다닥다닥 이가 마주칠만큼 두려움에 겨우 실눈을 뜨고 훤한 햇살아래 무표정하게 나를 내려다보는 태경의 얼굴을 살폈다.
어찌나 떨고 있는지 흐린 시야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태경의 잔영도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는데 벌벌 떨면서도 나란 놈이 가지는 특유의 모질고 독한 주둥이는 살아있는지 나는 음산하게 깔리는, 하지만 부들부들 떨고 있어서 그리 위협적으로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 뭐하자는 거야 지금.”
“수업.”
“이...이거 풀어.”
“내가 왜?”
“너...너...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으면서 아직 입은 살았군. 약속했듯이 아프게는 하지 않아. 약속은 지킨다는거 알고 있잖아? 당신 피 속에 낮게 흐르고 있는 음탕한 본질을 남김없이 깨워주겠다고 말했잖아. 아무렇게나 엉덩이를 흔들고 다니면서도 나는 섹스가 싫어라고 말하는 건방진 입에서 울며 매달리는 신음소리만 나게 만들어주지. 어차피 내 목적은 처음부터 당신을 길들이는 것 뿐이었어. 내가 없으면 하루도 잠들 수 없는 색정광의 몸으로 말이야.”
“미친...미친 새끼.”
그는 이가 부서져라 갈아대는 나의 입술위로 매혹적인 입술을 아주 가볍게 부딪혔을 뿐이었다.
그건 나비처럼 작은 부대낌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고 마치 꿈인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찰라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런 어이없는 상황에는 너무도 이질적인 입맞춤에 나는 짧은 숨을 들이켜야 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섹스.”
“씨팔... 미친거 아냐? 이건 강간이야! 섹스는 서로간의 합의가 있어야 하는거잖아!!!”
“좋아. 그래. 어차피 당신 성격으로는 계획되지 않은 어떤 일은 참을 수 없겠지. 십팔일 동안 어때. 응? 십팔일 동안 나와 몸을 나누고도 계속 섹스가 싫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때는 아주 깨끗하게 당신 삶에서 물러나 주지. 좋아? 대신 거짓말은 용서 못해. 유영신. 어때? 악마와의 계약을 해보겠어?”
“.....”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장난꾸러기처럼 눈을 반짝이며 내 코끝에 입을 맞추는 태경을 죽일듯 노려보았다.
이 바보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야!!!!
나는 자꾸만 번복되는 엄청난 괴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태경은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겁탈했고, 그 다음날은 사악한 군주처럼 나를 희롱했다.
그리고는 다정하지만 장난이 심한 보호자처럼 나를 보살폈다.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흉악한 겁탈범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내게 무슨 제안을 한단 말인가.
“오늘로 닷새째 날이야. 어때? 십팔일이 지나고도 내게 미친놈이니 죽여버리겠다느니 하는 말을 할 자신이 있어? 어차피 손해보는 장사는 아닐텐데? 나는 마음만 먹으면 일년이고 이년이고 당신을 감금해 둘 수 있는 사람이니까 말이야. 이제 십삼일만 내게 팔팔하게 저항하면서 고귀하신 섹스 혐오주의자의 의지를 굽히지 않을 수 있다면 내가 깨끗하게 물러나 주겠다니깐? 어때?”
“너는!”
“응?”
나는... 솔직해 내가 좀 한심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래도 영 바보는 아니었다.
나는 비교적 머리가 좋은 편에 속하는 사람이었고 특히나 그게 계약이나 거래의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기가 막히게 나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말을 돌리고 꼬는 것에 천부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잔머리를 굴리는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뜨으한 인기 작가들도 3%~5%밖에 계약하지 못하는 인세를 7%나 받으며 거기다 원고료까지 챙겨 이만큼의 돈을 모으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아무 생각도 없었고 그만큼 그가 행하는 폭력앞에 무기력하게 무릎꿇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러한 면에서 나의 잔머리는 거래라는 말이 나오면서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 팽팽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가 하는 말의 순서와 진위를 나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항상 집에서 일하는 것만 지켜보았던 한태경은 틀림없이 잔머리 굴리는 나는 알지 못하는게 분명했고 그 증거로 그는 눈에 띄게 당혹스럽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십팔일동안 너와 씹질을 하면서도 내가 섹스가 좋아지지 않는다면 내 눈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다고? 그렇다면 만일 십팔일동안 그짓을 하며 내가 니놈 의도대로 엉덩이를 흔들며 요부처럼 앵앵대게 되면? 그럼 네가 얻는것은 뭔대?”
“하!......”
“뭐냐고 이 씨발놈아! 이 황당하고 열딱지 나는 웃기지도 않는 퍼포먼스를 하면서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뭐야! 설마 목적도 없이 이런 엄청난 일을 꾸민건 아니겠지?”
태경의 새까만 눈동자가 내 눈 바로 위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단정하고 반듯한 이마위로 쏟아져 내리듯 검은 머리카락이 살랑거리고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익숙하지 않지만 절대로 기분 나쁘지 않는 그의 체취가 나를 마취시키는 것 같았다.
“역시 그리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던게야 유영신.... 규태 형님이 그렇게 쩔쩔 매는 이유는 이런데 있었던 건가? 아무리 봐도 어린아이처럼 먹을거나 밝히는 못된 습성을 가진 꼬맹인줄 알았더니 이런 머리를 쓸줄 알다니 말이야.... 의외의 곳에서 한방 크게 먹은 느낌인걸?”
“느낌이고 자시고 니놈이 원하는 거나 말해.”
내가 아득아득 이를 갈면서 잡아먹을듯 노려보아도 태경은 금세 평정을 되찾았고 팔딱팔딱 맥박이 뛰고 있는 목덜미에 부드러운 입술을 가져다대면서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말해 이자식아!!!!!”
“말할게 뭐가 있나. 당신이 나한테 길들여진다면. 그래서 섹스 혐오주의자 금욕주의자의 레텔을 떼어버린다면 그야말로 내 놀이개가 되어 내 옆에 있게 되는 거겠지. 육체의 본능이란 그리 만만하게 볼 일은 아니거든?”
“그리고.”
그런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어린놈이 이 나를 상대로 길들이겠다느니 가르치겠다느니 하는 어이없는 말을 하는 게 열불 날 지경이지만 어찌되었건 한번 향기나 맡고 버릴 꽃 같은 것은 꺽지 않는 법이다.
꽃을 꺽을 때는 그게 단지 몇 걸음이라 해도 제 손아귀에 떨어져 제 것으로 되는 암묵적인 욕구를 말하는 것이니까 향기나 맡고 버릴 것은 취하지 않는 거다.
그러니 애써서 공을 들여 길들이겠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요구조건은 아니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나의 놀랍도록 영악한 잔머리는 어리버리한 채 상황인식도 제대로 못하는 정신머리를 밀치고 성큼 나서더니 제멋대로 이 거래를 주도하고 있었다.
참 어이없게도 말이다.
“그리고 라니?”
“거래의 결과는 그런 것이라 해도 거래의 조건은? 조건이 있을거 아니야. 나는 분명히 절대로 아프지 않게 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내밀었다. 네가 제시하는 조건은 뭐냐.”
“......”
순간 나는 태경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분명히 목도하였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에 혼자 속으로만 좋아하였던 남자 아이가 해열제 먹고 피린계열의 알러지로 꼬르륵 넘어가는 내 모습을 보던 그 얼굴.
지금도 내 기억속에 생생히 살아있는 갈색 눈동자의 흔들리는 홍채. 진탕을 일으키듯 뒤섞이는 눈동자. 바로 그 모습처럼 태경의 새까만 눈동자가 아주 잠깐 그렇게 흔들리는 것을 나는 분명히 목격하였다.
그리고 그 미세하고 작은 떨림이 내 가슴으로 직격해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가슴이 뻐근하게 묵직한 것을 올려놓은 것처럼 숨이 막히면서 아주 빠르게 그 물결은 온 몸의 섬세하고 먼 부위까지 잔잔하게 전이되고 있었다.
“......나는...”
“...너는?”
생각보다 어리버리한 인질범은 나름대로 재빨리 머리를 굴리고 있지만 그게 내 눈에 그대로 보여서 아주 귀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뭐... 이런식으로 어른인체 해봐야 조금만 아프게 만들어 놓으면 확 엎어지며 우는 소리를 할 인간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찌되었건 작게 입술을 달싹이며 그 다음말을 잇지 못하는 태경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가 귀엽다는 생각을 하였다.
“없어.”
“없어?”
귀여운 녀석이 눈에 보이게 평정을 찾는 시간은 아주 짧았다. 나는 아쉬웠지만 그렇게 귀여운 얼굴을 한 태경을 보내주는 수 밖에 없었다.
“없어. 어차피 이건 내가 쥐고 흔드는 게임이야. 나 아쉬울게 뭐 있다고 조건따위를 내걸어?”
오냐. 그렇다면 너 아쉬운거 천지로 내가 만들어 주마.
“난 있어.”
“.....??”
그냥 이렇게 설왕설래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아까 전에 허벅지에서 툭툭 건들여 치며 제 존재를 알리던 끔찍한 태경이 녀석의 성기는 벌써 말캉말캉하게 쫄아들어 있었다.
그건 마치 작용 반작용의 법칙처럼 커지면 내 간이 졸아들고 작아지면 내 간이 비대해지는 그런 현상을 낳고 있는거 같았다.
“뭐 어차피 그래 칼자루 니가 쥐고 있는 거지만 나도 요구는 할 꺼다. 알고 시작했는지 모르고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강간이란 거 사람 탈 쓰고 나서 할 짓 아닌 거다. 그거 얼마나 치욕스럽게 내면 깊은 곳에 상채기 아니라 치명상을 입히는지 네놈은 날 때부터 그렇게 건장하고 튼튼해서 모르겠지.”
“......”
“사내놈으로 태어나서 아니 이건 여자라도 마찬가지야. 힘으로 못 이겨 누군가에게 성적으로 굴복하는거. 내가 지켜야 하는 가장 소중한 나의 개인적 공간을 억지로 열어야 하는거 그거 목숨 달고 세상 살면서는 못할 짓이다. 나는 절대로 그런거 용납하는 성격도 아니고. 그쯤은 각오하고 시작했겠지?”
“.....”
태경은 내내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새까맣게 반짝거리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나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나는 그가 흉물스럽기도 하고 끔찍하기도 하였지만 또 반면 그런 그가 깨물고 싶게 사랑스럽기도 했다.
말했지 않은가. 나는 스톡홀름 신드롬의 이상심리 현상을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물론 좋지. 어제... 아니 그제 니놈 손가락에 쑤셔지면서 나도 남자니까 어쩔 수 없이 예민한 성적인 부분이 있고 상황 전개가 어떻게 되어도 좋은 감정 기분 좋은 절정 느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 나는 여전히 섹스를 혐오하고 그딴거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무슨 소리하는 거야. 좋단 말이야. 싫단 말이야.”
“몸은 좋은데 마음은 인정 못한다는 말이야.”
“......”
나는 내가 상당히 괴변을 늘어놓고 있다는 거 인정하지만 이게 괴변이라는 것은 들키기 싫었다.
나는 치열하다시피 영악하다.
나는 언제나 내가 도망갈 구석 같은 것은 두 개 세 개 만들어 놓고 살아왔다.
그게 현실적인 문제이건 감정적이거나 관계적인 문제이건 나는 언제나 손톱만한 생채기도 얻지 않고 도망칠 수 있는 구멍 언제나 마련해 두고 살고 있었다.
태경이 나를 아홉 토막내어 야산에 묻어 버린다면 모를까 이런 감금의 생활이 영원으로 지속될리 없고 내 의식이 살아있는 한 나는 언제나 내가 당한 치욕을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 분명한 거다.
강간에서 화간으로?
하! 그럴 수 있다.
억지로 몸을 열어도 좋을 수 있는 거다.
몸은 그럴 수 있는거다. 그런데 나는 이 일의 지독한 맹점이 바로 그 부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긍지와 자만심으로 살아가는 나 같은 인간.
섹스는 싫다며 콧방귀를 끼던 나 같은 인간이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자의가 아닌 타의로 몸을 열어도 결국 그것에서 쾌락을 얻을 수 있다는 바로 그 점이 내 몸이 느낀 통증과 고통과 절박한 상황보다 더 잔인하게 나를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감금과 협박이 어떤 빈틈 혹은 어떤 계기로 중단될 때.
혹은 그가 나에게 더 이상 흥미가 없어져 꺽은 꽃을 버리게 될 때.
그때를 대비해 살아갈 구실을 만들고 싶은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겁탈 당하며 쾌감을 얻었지만 내가 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
나는 단지 폭력 앞에 굴복하였을뿐 나의 자의까지 내 준 것은 아니라는 것.
나는 그 구실을 얻고 싶은 것뿐이었다.
“십팔일동안 나는 네가 하겠다는 그 웃기지도 않은 수업 자의가 아니라 네 강압에 못 이겨 받는 거다. 나와 섹스하고 싶다면 처음 그날 밤처럼 나를 묶고 겁탈해. 내가 스스로 너한테 안기는 날은 절대로 없을 꺼다.”
“쾌락은 인정하지만 섹스는 인정 못한다는 건가? 도도한 이기주의자 룸펜 유 영신?”
“그래 쾌락은 인정해. 하지만 내가 스스로 너에게 안길 것을 원하는 날도. 내가 스스로 몸을 열어 너를 받아들이는 날도 없을 꺼다.”
“하!”
태경은 짧은 단말마의 웃음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게 굉장히 가슴 아픈 속삭임처럼 들려서 나도 모르게 살짝 미간을 찡그려야 할 정도로 향이 짙고 색이 깊은 감정으로 다가왔다.
이게 얼마나 비겁한 말인지. 이게 얼마나 책임회피적인 말인지 나도 알고 있었다.
나는 모든 잘못을 태경에게 돌리고 있는 거였다.
나는 분명히 태경의 도구로 절정에 이르르고 내가 평생에 걸쳐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도원향을 구경하면서 태경에게 매달려 울었다.
태경은 처음 그날밤 나를 겁간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의 약속처럼 단 한번도 나를 고통스럽거나 불편하게 만든 적이 없었다.
나는 어쩌면 현실로 탐닉하는 태경을 즐기고 있으면서도 명분상 모든 잘못과 원인을 태경에게만 밀어 넘기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폭력으로 나를 강간하는 것이라고 나는 어쩔 수 없는 피해자에 불과한 것이라고.
나는 비겁하게 모든 죄의 굴레를 태경에게 뒤집어 씌운채 그가 지금부터 줄 쾌락만 받아들이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비겁한 역할극 놀이를 하고 있었다.
“좋아. 얼마든지 묶어서 탐해주지. 대신 내게도 조건이 하나 생겼어.”
“... 뭐지?”
“나는 억지로 당신을 열어 쾌락의 구렁텅이로 빠트릴꺼야. 하지만 나는 근사한 즐거움을 선사할때마다 비용을 받을꺼야. 당신은 당신에게 그걸 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의식 속에 박아넣어야 해. 내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절대로 당신이 절정에 이르지 못하도록 해주겠어. 당신을 음탕하게 달아오르도록 만드는 사람이 누구인지. 당신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즐거움에 있게 하는 것이 누구인지 매번 명확하게 이야기 해야해. 나 한 태경의 이름을 부르면서 당신 앞에 누가 있는지를 확실히 기억해. 그게 내 조건이야.”
“그런 식으로 조건 반사 교육을 하겠다는 거야? 야비하다는 생각 안해?”
“야비한건 당신이 백배는 더한거 같군. 이대로 거래는 성립된 건가?”
“.....”
야비한 것은 내가 먼저였다.
내 목덜미에 빠르게 뛰는 맥박위로 입술을 가져다대는 태경의 체취를 느끼면서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왜 가슴이 아픈지 나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