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차 회귀자는 살고 싶다
102화
이에레의 말이 맞았다. 희도가 돌연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안 돼!’
“안 돼!”
나는 온몸에서 피가 전부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끼며 희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이에레도 내 움직임을 막지 않았다.
날카로운 채찍 끝이 희도의 눈을 찌르기 직전에 나는 가까스로 그걸 낚아챌 수 있었고, 유세림은 내가 끼어들자마자 힘을 거뒀다.
희도는 제 앞에 선 나를 보며 패배감 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유세림이 조롱하듯 속삭였다.
“한솔 씨 덕분에 실명은 면했군요.”
“……유세림!”
“넌 외팔이가 될 뻔했고 말이지.”
나는 그제야 채찍만이 희도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희도의 검 역시 유세림의 오른쪽 어깻죽지를 살짝 베어 낸 것을 보았다.
오직 희도가 위험한 것만이 눈에 들어와서 놓친 부분이었다. 희도는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싸늘한 태도로 등을 돌렸다.
“백희도……!”
나는 처음으로 성을 붙여 희도를 불렀다. 하지만 희도는 잠시 걸음을 멈췄을 뿐,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뒤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유세림, 너…….”
나는 화가 난 채 유세림을 돌아봤다.
유세림은 내 사나운 표정을 보고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사랑을 갈구하는 자의 비굴함 없이, 그는 태연한 낯으로 내 앞에서 고개를 들었다.
화가 치솟아 놈의 멱살을 붙잡으려던 찰나, 유세림이 입꼬리만 올려 빙긋 웃었다.
“어차피 미움 받고 있으니까요.”
“희도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널 죽일 거야.”
진심이 담긴 내 목소리에 유세림은 피식 웃으면서 답했다.
“백희도가 그걸 원할까요? 방금도 당신이 자신을 감싸서 자존심 상해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짓던데요.”
“…….”
나에게는 트라우마가 있다.
유세림이 어떻게 희도를 죽였는지, 눈앞에서 그저 지켜만 봤어야 했던 그 무력감. 그 지옥 같던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희도가 유세림보다 훨씬 강해진다고 해도, 아마 그 잔상에서 벗어나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은 영원히 침묵해야 한다. 없어진 과거니까.
희도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아니, 희도가 떠올려서는 안 되는 기억. 그래서 나는 속에서 올라오는 쓴 물을 삼키며 유세림에게서 등을 돌렸다.
“나와 희도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하지 마. 그런다고 너한테 기회가 가는 일은 없을 테니까.”
가시 돋친 말을 내뱉고 나니 속이 한결 나아졌지만, 유세림은 가만히 당해 주지 않았다. 놈은 기어이 내 등에 대고 불편한 한마디를 던졌다.
“둘 사이에 사이라고 부를 만큼의 진전이나 있습니까?”
발끈할 뻔했지만, 결국 나는 유세림과 말을 더 섞지 않는 걸 택했다.
이에레는 무시하며 걷는 내 등 뒤를 타박타박 쫓아오면서 혀를 찼다.
“으으. 귀찮은 걸 결국 꽂히게 만들었구만…….”
유세림을 두고 말하는 것 같았기에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걸음을 재촉해, 희도의 방을 향해 거의 뛰듯이 걸었다.
그런데 희도는 방에 있지 않았다. 마치 날 기다리고 있던 양, 방으로 가는 복도 길목에 등을 보인 채 비스듬히 서 있었다.
내 발걸음 소리를 들은 듯 서늘한 시선이 나를 잠시 훑어봤고, 그렇게 우리는 짧게 대치했다.
“희도…….”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다가간 건 내 쪽이었다. 희도는 눈을 내리깐 뒤, 저의를 알 수 없는 한숨을 내뱉었다.
“유세림과 왜 그러고 있던 거였지?”
그리고 팔짱을 낀 채 곤란한 질문을 던졌다.
이에레가 얄밉게 중얼거렸다.
“자기 좋다고 따라다닐 땐 언제고, 유세림하고 그러고 있으니 배신감을 느낄 만도 하겠지…….”
‘닥쳐.’
나는 속으로 이에레에게 경고한 뒤, 일단은 변명하듯 말을 꺼냈다.
“갑작스럽게 접근해서 당황했던 것뿐이야.”
“…….”
나는 내 안의 미련이니 뭐니 하는 이에레의 의견은 깡그리 무시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내가 정말로 원하는 사람은…….
‘그럴 리 없어.’
눈앞에 있는 희도니까.
희도의 시선이 나를 훑어봤다. 전혀 신뢰하지 않은 눈빛이었다.
“나와 유세림을 저울질한 건가?”
“아니야! 유세림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어! 너도 알잖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하지만 희도는 더 듣지 않고 내게 성큼 다가왔다. 그러곤 내 뒷덜미를 붙잡아 나를 제 쪽으로 당겼다.
삽시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깜짝 놀라 움츠러들었는데, 희도가 내 입술 코앞까지 다가와선 덤덤히 말했다.
“놀랐을 땐 보통 지금처럼 반응하는 게 정상이야. 그런데, 유세림이 다가왔을 때 넌 안 그랬잖아.”
“……!”
희도는 빨개진 내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나를 천천히 놓아주었다.
나는 불길함을 느꼈다.
그래서 희도의 팔을 붙잡았다.
“유세림과는 정말, 아무런 사이도…….”
희도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알아. 네가 날 좋아하는 건.”
“……그럼…….”
“그리고, 나도 네가 싫지 않아.”
“……!”
나는 그 말에 조금 숙어지던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간 희도와의 감정적 격차가 순간 확 줄어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희도는 내 표정에서 갈망을 읽은 듯했다. 제 생각보다 열렬했던지 눈빛에 약간 당황이 스치긴 했지만…… 결국 내게 손을 내밀었다. 검을 잡아 거칠고 투박한 손끝이 볼을 스쳤다.
“그, 그럼 우리…….”
나는 기대를 품고 희도를 쳐다봤다. 하지만 희도는 그 순간 손을 거뒀다. 그러곤 아주 냉정하게 말했다.
“그래서 좀 거리를 두고 싶어졌어.”
“뭐라고!”
“넌 훈련에 방해가 돼.”
“무…… 뭐?”
어떻게…… ‘네가 싫지 않다’는 말 뒤에 이런 결론이 나올 수 있는 거지?
“큭…… 푸, 푸하하!”
이에레가 뒤에서 폭소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아니, 내가 싫지 않으면, 당연히 사귀어야 하는 거 아냐?
“어째서…….”
망연자실한 내게 희도는 조금 망설이긴 했지만, 결국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강해지고 싶으니까. 그래야 내가 가진 걸 지키고, 빼앗기지 않을 거 아니야.”
“하지만…….”
나는 우리 사이를 확정 짓고 싶은데. 그래야…… 유세림이 하는 개소리도 다 흘려들을 수 있지 않은가.
나는 희도의 굵은 손을 확 붙잡았다. 그러곤 거의 애원하듯이 말했다.
“사, 사귀면서 생각해 보는 건 어때?”
“……뭐?”
희도의 손이 움찔 떨렸다. 나는 희도가 고민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하여, 희도의 손을 내 가슴께로 끌어당겼다.
“사, 사귄다고 해서 주제넘게 요구하는 건 하나도 없을 거야! 네 훈련에 절대 방해되지 않을게! 데이트하자고 조른다거나…… 절대 그러지 않을 테니까…….”
귀찮지 않은 애인이 되겠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희도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런 뜻이 아니야…….”
희도가 귀 끝을 조금 붉힌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내게 잡힌 손을 조금 꼼지락거렸다. 빼고 싶은데, 여기서 밀어내자니 그건 또 난감하다는 낌새였다.
‘어째서어……!’
나는 희도가 내 접촉을 불편해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거의 절망 상태가 되었다. 싫지 않다는 건…… 그냥 선을 긋는 말이었던 건가? 내가 잘못 이해한 건가?
희도는 그런 나와 눈이 마주친 뒤,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더니, 내 손을 잡고 제 방문을 열었다.
드르륵―.
희도는 나를 방 안으로 집어넣었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나는 얼결에 희도가 쓰는 방에 희도와 단둘이라는 걸 알아챘다.
“귀찮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야.”
희도가 나를 보며 힘주어 말했다.
“훈련이 먼저라는 게 아니라…….”
“응.”
“아직 부족해, 내가.”
“……대, 대체 뭐가?”
“너랑 사귀기에.”
“……응?”
나는 극도의 겸손을 목격하자 멍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희도는 정말 진지했다. 수심 깊은 수려한 얼굴 위로, 그 나름의 진지한 고민들이 깃들어 있었다. 절대 비웃을 수 없는 고뇌 말이다.
“유세림이 저렇게 깝치는데도 곧장 제압 못 했잖아.”
“그건…….”
“그리고 네 형…… 솔직히 기분 나빠. 다 큰 동생한테 너무 질척거린다고.”
“응?”
“하지만 힘으로 어떻게 누를 수도 없고……. 다 좀 좆같네.”
“으흐흑…….”
이제 이에레는 아예 방구석을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
나는 눈알만 굴렸다. 유세림을 싫어하는 거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형까지 은근히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남자라서 그런 건가?
“혀, 형은…… 절대 그런 건 아닌…….”
“…….”
나는 반사적으로 형을 옹호하려다가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대놓고 묻지는 않았지만 ‘나야 형이야?’ 하는 느낌이 강하게 풍겨 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잘못 말하면 희도랑 사귈 기회가 영영 멀어진다……. 나는 마음속으로 형에게 미안하다고 속삭인 뒤, 희도에게 말했다.
“새, 생각해 보니까 이제 독립할 때가 되긴 했지……. 네 말도 맞아.”
“그래?”
희도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다행히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굳어 있던 표정이 조금 풀리는 것을 보며, 나는 내 선택이 맞았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