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차 회귀자는 살고 싶다
101화
유세림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분명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을 게 뻔한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지금 내 표정과 시선은 그의 눈에 어떻게 비추고, 무엇을 말해 주고 있을까. 0회차 때의 어리석은 표정일까? 아니면 1회차 때의 증오로 가득한 얼굴일까.
스윽―.
유세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몸은 그의 큰 키에 금방 가려졌다. 유세림은 그대로 내 어깨를 붙들었다. 나로서는 뿌리치려면 충분히 뿌리칠 만한 힘이었다.
그는 그렇게 나를 새털처럼 가볍게 붙들고, 거리를 좁혔다.
“뭐 하는 거야?”
나는 고개를 숙이는 유세림에게 물었다.
내가 들어도 낯설게 느껴질 만큼 차디찬 목소리였는데, 유세림은 내 입술 코앞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그가 입을 열었다.
“허락한다면…….”
“…….”
“키스하고 싶습니다.”
“싫어.”
내 말은 거부라기보다는 경멸에 가까웠다. 그 뉘앙스를 유세림도 바보가 아닌 이상 알아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곤 굳게 다문 내 입술 위로 뜨거운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말랑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당장 걷어차려다가 멈춘 이유는 맞닿은 살에서 느껴지는 어떤 감각 때문이었다.
‘떨고 있다고…….’
그 유세림이…….
마치, 처음 하는 것처럼.
밀어내려면 밀어낼 수 있었다. 유세림은 언제든 기꺼이 밀려나겠다는 듯이 힘을 전혀 주지 않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한참 후, 놈이 혀를 밀어 넣으려고 할 때에야 어깨를 밀었다. 역시나 유세림은 순순히 밀려났다.
놈은 양 뺨을 붉힌 채 눈을 내리깔곤 짧게 한숨을 쉬었다.
“바로 밀어 낼 줄 알았어요.”
“…….”
굳이 찔리는 부분을 지적하는 것은 눈치 없이 구는 게 아니라, 놈이 내게 원하는 게 그것이기 때문이겠지. 일말의 가능성 말이다.
나는 냉정하게 말했다.
“착각하지 마, 너무 불쾌해서 순간 몸이 굳은 것뿐이니까.”
“한솔 씨는 당황하면 손을 웅크려 쥐는 버릇이 있어요.”
“……!”
나는 꽉 쥐었던 주먹을 나도 모르게 내려다봤다. 유세림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내 팔목을 붙들었다.
“왜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표정조차 사랑스러울까요.”
“닥쳐…….”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까지 미움 받을 짓은 하지 않은 것 같지만…… 그래도 다행입니다. 미움만 받은 건 아닌 것 같네요.”
유세림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 턱을 한 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힘주어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아까와 달리 밀어내도 밀리지 않았다. 뜨겁고, 거칠고, 탐욕스러운 키스가 이어졌다.
“주인!”
이에레가 힘을 쓰려고 하는지 나를 불렀지만, 그보다 더 빨리 유세림이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갔으며…….
“한솔.”
“희, 희도야…….”
백희도가 이 광경을 목격해 버렸다. 나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을 느꼈다.
희도는 충격 받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서 약간의 배신감과 강한 분노가 느껴졌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유세림의 얼굴을 가격했다.
퍽―!
유세림은 뺨을 맞았지만, 어딘지 맞아 주었다는 느낌이 강했다. 희도 역시 그 태도에서 조소를 읽은 듯 격분하면서 검에 손을 얹으려고 했다.
나는 그런 희도를 말리려고 애썼다.
“자, 잠시만……!”
“말리려는 거야? 왜?”
희도는 그런 내게 물었다.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내가 질 것 같아서?”
“……!”
그게 아니라고 말하려던 찰나, 피식 웃는 비웃음이 뒤에서 먼저 튀어나왔다.
유세림이었다.
“추하군요. 열등감입니까?”
챙―!
그리고 희도는 곧장 검을 뽑아 들었다. 유세림의 뜬 앞머리 일부가 살짝 잘려 나갔다. 그리고 그 바로 앞에서 검날이 원에 막혀 피부를 베지 못하고 멈춰 있었다.
휘익―!
유세림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곧장 허리춤에 있는 채찍을 꺼내 들었다.
그때부터 내 몸이 내 의지를 담지 않고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훌쩍 뒤로 물러나, 둘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이에레의 간섭이었다. 이에레가 내 몸을 움직였다는 걸 눈치챈 나는 마음속으로 녀석을 불렀다.
‘이에레!’
“주인은 저 사이에서 빠져나와야지.”
‘당장 멈추게 해!’
“그럼 둘 중 하나를 크게 다치게 만들거나 죽여야 하는데, 누구를 고르겠어?”
‘……뭐?’
하지만 이에레는 나를 둘 사이에서 빼내기만 했을 뿐, 둘을 말려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말도 안 되는 선택을 종용하기만 했다.
‘그게 무슨…….’
“당연히 유세림이지?”
하지만 이어진 이에레의 질문에 이상하게도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이에레는 내가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코웃음 쳤다.
“하.”
‘……뭐야, 너.’
“주인 마음의 번뇌를 읽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래.”
‘내가 무슨 번뇌를…….’
“유세림에게 그렇게 당해 놓고도 아직도 저 여우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니.”
‘뭐? 아니야! 내가 유세림을 좋아한다니, 그게 무슨 개소리…….!’
“좋아한다고 안 했어. 미련이 있다고 했지.”
이에레는 내 말을 끊고, 두 말의 차이점을 알지 못하는 나에게 설명하듯이 말했다.
“유세림에게 집착하고 있잖아, 주인은. 밀어내고 멀어질 기회를 줘도 그러지 못하는 걸 보고 확신했어.”
이에레는 내가 대답하기 곤란한 부분만을 콕 집어서 물었다.
나는 발끈하면서 대답했다.
‘아니라고! 난 유세림한테 관심 없…….’
“그럼 유세림이 입 맞췄을 때, 왜 밀어내지 않았어?”
‘…….’
그러나 이어진 질문에 말이 막혔다. 목에 뭔가가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머릿속에서도 정리되지 않은 문장이 불쑥 튀어나오려고만 했다.
‘그건…….’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가만히 기다리던 이에레는, 결국 제가 먼저 답을 내렸다.
“백희도는 그걸 보고 꼭지가 돈 거야.”
뜬금없이 희도를 언급하면서 말이다.
‘뭐?’
“주인이 조금 전, 유세림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유세림하고 싸우는 거라고.”
‘희도가 처음부터 보고 있었어?’
“응.”
‘뭐, 뭐야! 그걸 왜 말해 주지 않은 건데?!’
나는 이에레에게 화를 냈지만, 녀석은 묵묵부답이었다. 되레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마치, 가늠하는 것처럼 말이다.
“말해 줬다면, 유세림을 밀어내고 백희도한테 갔을 거야?”
그리고 그 질문을 받는 순간, 머릿속이 멈추는 느낌이 들었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데, 그렇다고 말해야 하는데……. 나는 대답 대신 두 사람이 검과 채찍으로 서로를 공격하고 있는 모습을 쳐다봤다.
챙, 챙―!
스르륵―! 착!
백희도와 유세림은 둘 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치열하게 공방 중이었다.
희도는 검은색 검으로 빠르게 유세림과의 거리를 좁혀 들어갔고, 유세림은 반대로 거리를 벌려 채찍의 공격 범위를 확보하기 위해 빠르면서도 유연하게 공격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유세림은 꼬리처럼 땅에 늘어뜨려 두었던 채찍을 이번엔 손에 촘촘히 감아올렸다. 짧게 치는 공격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었다.
백희도는 그 모습을 보곤 자신의 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짧고 빠른 공격이 들어온다면 전부 거두어 내겠다는, 단기간에 스피드를 낼 수 있는 자세로 전환한 것이다.
“[삭풍].”
“[쇄아].”
게다가, 이젠 스킬까지 쓰기 시작했다.
‘이에레! 이러다 둘 다 큰일 나!’
나는 지금이라도 둘 사이를 중재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에레는 확고했다.
“여기서 주인이 나서면 일이 더 복잡해져. 결국, 주인이 선택해야 끝나.”
‘내가 무슨 선택을 한다는 건데?’
“주인이 살리고 싶은 사람을 선택해야지……. 안 그래?”
나는 그 말을 듣고, 미친 듯이 싸우고 있는 두 남자를 쳐다봤다.
지금은 희도가 미묘하게 더 우세에 서 있었다. 유세림은 여전히 채찍을 휘두를 만한 거리를 확보하지 못해서 희도의 검에 몸 여기저기를 베였고, 아름다운 금실 청사 역시 볼품없이 찢겨 나간 상태였다.
하지만 어째선지 승기를 잡은 희도의 표정은 불안하게만 느껴졌다. 이에레는 그 모습을 보더니 혀를 쯧쯧 찼다.
‘왜 그래?’
“너무 급해. 유세림 녀석에게 말려들어 갔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희도의 허리춤에 유세림의 채찍이 휘감겼다. 하여 희도는 삽시간에 유세림의 앞에 끌려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