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차 회귀자는 살고 싶다
100화
“…….”
[핑, 핑―!]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회귀 전에는 유세림이 저것을 핑이라고 불렀다. 그냥 저 몬스터가 그렇게 운다는 이유로, 큰 고민 없이 붙인 이름이라고.
과거에도 그가 주웠고, 키우고 돌봤지만, 애정은 일체 없던 무관심한 눈빛이 떠올랐다. 유세림은 곁을 내줄지언정 마음은 내주지 않는 이기적인 인간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해도 됩니까?”
내 이름을 붙여도 되느냐 물으며 돌아보는 저 얼굴에 스민 감정은 대체…….
‘같은 사람이 맞아?’
고작 몇 년 새, 유세림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대답 다신 유세림을 쏘아봤다. 유세림은 내 눈빛에 서린 적의를 읽어 내고는 조금 몸을 굳혔다.
“……역시, 기분 나쁜 겁니까.”
“그래. 기분 나빠.”
“…….”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유세림은 풀 죽은 얼굴을 했다.
저 입꼬리의 경련은 무안함을 감추기 위한 것으로, 나는 눈앞의 남자가 내 말에 상처를 받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부드러운 미소 뒤에 얼음 같은 차가움을 숨겼던 이전과 다르게, 그는 지금 붉은 피가 흐르고 따듯한 체온이 담긴 인간이었다.
“……그래도, 저는 솔이라고 부를 겁니다.”
유세림은 아까보다 한 톤 낮아진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마치 내가 무어라 말해도 제 마음은 꺾을 수 없다고 주장하듯 말이다.
나는 문득 유세림의 저의가 궁금해졌다.
매일 놈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지만, 그간 차마 면전에 대고 묻지는 못했던 말이 순간 불쑥 튀어나왔다.
“너, 정말로 나를 좋아해? 아직도?”
유세림은 눈을 크게 떴다.
“…….”
그리고 잠시 말문을 잃은 듯 나를 쳐다봤다.
유세림의 얼굴엔 잠시간 표정이랄 게 없었고, 눈동자는 빛을 잃어 가는 듯하다, 결국엔 원망을 담았다.
나는 내가 건넨 질문이 유세림에게 생채기를 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신경하게 들렸겠지. 어쩌면 조롱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알 게 뭔가. 왜 내가 유세림의 마음 따위를 아직도 신경 써야 하는 건데.
문득 진절머리가 나서 붉어지는 유세림의 뺨을 외면하고 그를 쏘아봤다. 귀 끝을 붉게 물들인 그의 얼굴은 아름다웠으나, 표정은 참담했다.
“……네.”
유세림은 나의 이런 태도에서 대답을 추측했을 터임에도 순순히 긍정했다. 여전히 저는 같은 마음이라고.
그 덤덤한 태도가 눈엣가시 같았다. 나는 울분을 터트리듯 가시 돋친 마음을 그대로 쏟아 냈다.
“나는 네가 싫다면?”
“……압니다.”
“안다고?”
“네. 그때도 그렇게 얘기했었으니까요.”
이제 유세림은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다.
나는 이 남자가 얼마나 강하고, 재능 있는지 안다. 말씨는 공손해도, 프라이드가 높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의 대단한 형 앞에서도 주눅 드는 성정이 아니라는 것도.
하지만, 그런 그가 지금 내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있었다. 나는 지금 유세림이 위축되어 숨조차 편히 내쉬지 못하는 상태임을 꿰뚫어 봤다.
그게 그냥 보였다. 감정이 그대로 읽혔다. 그가 오직 나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그때의 유세림도 지금의 나와 같았을까?’
이렇게 우스워 보였을까? 사람이?
“넌 내가 누굴 좋아하는지 알고 있잖아.”
“……네. 압니다.”
그래서 나는 잔인한 소리를 마구 해 댔다.
내가 만약 처음 생에서 유세림에게 이런 소리를 들었다면 자살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제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잖아요, 라니. 더 듣지 않고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유세림은 손끝을 떨면서도 내 폭언을 그대로 감내했다. 멱살을 쥔 대도, 아니, 목을 조른대도 그대로 당하겠다는 듯 순순한 태도였다.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로선 내가 제게 화풀이하는 거나 다름없을 테니 억울할 법도 한데, 유세림은 그저 나를 따랐다.
“안다고?”
내가 코웃음을 치며 다시 도발했을 때, 유세림은 고개를 들었다.
나는 흠칫 놀랐다. 유세림이 나를 겁박하거나 살기를 쏘아 보내서가 아니었다. 유세림이…… 눈물을 참고 있어서였다.
그는 붉어진 눈을 들어 나를 쳐다보면서, 눈을 천천히 깜빡이면서 조용히 속삭였다.
“백희도를 좋아하죠. 내가 아니라.”
“…….”
짙은 패배감에 물든 목소리는 어느새 쉬어 있었다. 그 목소리에는 희도를 향한 분노가 아니라, 삭히고 삭인 감정이 녹아들어 있었다.
유세림은 말문을 잃은 나를 앞에 두고 느릿하게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습니다. 당신이 기분 나빠 하고, 제가 그만두기를 바라도……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
“좋아합니다. 하지만, 제 마음만은 조롱하지 말아 주세요.”
“하…….”
나는 유세림이 끝내 울진 않고 나에게 부탁하는 것을 보며 나도 모르게 탄식했다.
‘그래……. 넌 나와 정말 다르구나.’
나도 만약 너에게 이렇게 대놓고 말할 수 있었다면, 과거는 뭔가 달랐을까?
“불편하시면 앞으론 최대한 티 내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솔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도 하지 않을게요.”
“…….”
“제가 당신에게 인형을 준 게 부담스러웠습니까? 혹시나 저에게 헛된 희망을 준 것 같아서 경고하는 거라면…….”
유세림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잠시 입술을 떨었다. 자존심을 누르고 눌러, 다음 문장을 잇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춘 것처럼.
“물론, 저로선 그런 기대를…… 감히 품지 않았다곤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당신을 좋아하는 건 당신이 아니라, 내 자유입니다.”
나는 그런 유세림을 멍하니 보다가, 불쑥 치민 기억에 따라 내뱉어 버렸다.
“……페어 각인이라는 거, 알아?”
“네?”
“아냐고.”
“……네. 압니다.”
“그거, 강제로 맺는 방법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그 말을 꺼낸 순간, 내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이에레가 등 뒤에서 나타났다.
이에레가 그늘진 음성으로 나에게 말했다.
“어리석어, 주인.”
유세림에게 쓸데없는 도발은 하지 말라는 뜻 같았다.
하지만, 나는 말을 멈출 수 없었다. 이것을 확인하지 않고는 도무지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페어 각인을, 강제로요?”
유세림은 순진하게도 눈을 크게 떴다.
‘나쁜 일이 아닙니다. 당신과 페어를 맺으려는 것뿐이에요.’
‘긴장하지 마세요. 아프진 않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내 목을 물어뜯던 야만인과 똑같은 얼굴인데도…….
“그래. 그런 방법이 있대. 그 방법이 있다면 유세림, 너는 나에게 그 방법을 사용할 거야?”
“……네? 그게 무슨…….”
“내가 네 것이 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거냐고.”
“…….”
질문이 끝나자, 유세림은 내 얼굴을 쳐다봤다. 과거의 유세림을 증오하고 있는 내 표정을 말이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아니요.”
“……!”
“그런 짓을 하면, 당신에게 영원히 미움받지 않습니까.”
유세림은 주저하듯 몇 번을 망설이다가, 떨리는 손을 들어 내 손을 붙잡았다.
나는 뿌리치지 못했다. 유세림이 망설임 없이 과거와 완전히 반대되는 선택을 한 데서 온 충격 때문이었다.
유세림은 내 손을 붙잡고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원하는 건 한솔 씨의 몸만이 아닙니다. 물론, 그도 어느 정돈 포함하고 있습니다만…….”
물기 어린 시선이 내 뺨을 훑었다. 유세림은 마른 땅 위로 제 한쪽 무릎을 천천히 꿇었다.
이에레가 내 뒤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주인, 유세림의 마음에 번뇌가 있어.”
“…….”
나는 이에레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면서 흘러내리는 은발을 쳐다봤다.
유세림은 눈을 내리깔고 고백했다.
“백희도를 좋아하는 것만큼 저를 좋아해 주었으면 합니다.”
“…….”
“당신이 누군가를 그렇게나 좋아하는 걸 이미 봐 버렸으니까……. 그 이상으로 절 좋아해 주는 게 아니면, 안 됩니다.”
“…….”
“온전한 당신을 원해요. 그렇지 못하면 포기하겠습니다.”
그 말에 이에레가 뒤에서 코웃음을 쳤다.
“진실과 거짓이 반반이야.”
하지만, 무릎을 꿇은 채 나를 올려다보는 유세림은 마치 복종하는 개와 같아서…….
“주인, 유세림에게 보복하고 싶은 거야? 아니면, 유세림의 사랑을 받지 못한 과거의 주인에게 보상해 주고 싶은 거야?”
나는 이에레의 날카로운 질문에 어깨를 떨면서도 유세림이 붙든 손가락을 끝내 떨치지 못했다.
‘세림아―!’
던전에 갇혀 세림이를 불렀던 나. 물속에서 죽어 가면서도 네가 돌아보기만을 바랐던 내가…….
‘왜 이렇게 허기가 지지?’
유세림의 이 순정을 먹어 치우고 싶어서. 희도의 사랑을 원하면서도, 유세림을 갈가리 찢고 그를 망치고 싶어서.
그래서, 뿌리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