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차 회귀자는 살고 싶다
99화
“하아…….”
집으로 돌아온 나는, 이에레에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뒤, 희도와 유세림이 준 선물을 앞에 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희도가 준 팔찌와 유세림이 준 인형.
“…….”
희도는 대체 무슨 마음으로 나에게 이 팔찌를 준 걸까? 혹시, 희도가…… 나를 좋아하는 걸까?
‘하지만, 그렇게 낙관적으로 여기기에는…….’
요즘 들어 나를 대하는 희도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건 안다. 전보다 좀 부드러워졌다고 해야 하나.
‘그치만…….’
그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낯가림이 옅어져, 어느 정도 친밀해졌기 때문일 확률이 크다.
‘내 마음과 희도의 마음이 같을 리는…… 없으니까.’
그리고 나는 희도를 엄청 좋아한단 티를 팍팍 냈기에, 희도가 그걸 모를 리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희도는 내게 감정적인 표현은 일절 한 적 없었다.
물론, 남자인 내가 저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역겨워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희망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근데, 이제 그 정도로는…….’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점점 욕심이 생긴다는 게 문제였다.
특히 오늘처럼 이런 선물을 받아 버리면…… 희도는 그냥 친구에게 주듯 건네준 거라 해도, 나는…….
‘그리고 지금의 희도는 모르겠지만, 난 이미 예전에 희도랑 이런 거 저런 거 다 해 버렸다고.’
플라토닉으로는 안 된단 말이야.
나는 뺨에 열이 오르는 걸 느끼면서 발을 꼼지락거렸다.
이에레는 그런 나를 힐끔 쳐다봤다.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나는 속으로 녀석에게 말했다.
‘끼어들면 다시는 너랑 한마디도 안 할 거야.’
“쳇.”
이에레는 아쉽다는 듯이 입을 꾹 다물고는 다시 벽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무슨 표정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 쪽팔리긴 한데, 이에레가 내색만 안 하면 희도 생각을 마음껏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희도…… 키스를 정말 잘했는데.’
나는 쩝, 입맛을 다셨다. 그냥 잘했다는 기억만 어렴풋이 남아 있고, 그 느낌은 이제 너무 희미해져서 떠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희도가 나를 좋아했던 때가 너무 오래전이라는 게 새삼스레 와닿아 마음이 아팠다.
나는 헛헛해지는 기분에 내 방 침대에 누워서 베개를 안고 뒹굴뒹굴했다. 희도를 끌어안는 것처럼 꼬옥 껴안으면서, 짧지만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려 보았다.
‘호텔에서 지낼 때 희도한테서 나던 좋은 냄새…… 다시 맡고 싶어.’
아주 가까이서 맡아야 희미하게 나던 향이었다. 지금 희도에게도 그 냄새가 날까?
‘나지 않더라도, 그냥…… 가까이서 끌어안고 싶어.’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럴 수 없다니. 왜 나만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돌아온 건지. 새삼스럽지만 잔인하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잠시 나 스스로를 불쌍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숨이 살짝 새어 나왔다.
그러나, 자기 연민의 시간은 짧았다. 왜냐면,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아냐. 난 운이 좋아. 그렇게 끝나 버리지 않았잖아.’
나처럼 안타깝게 이별한 사람들 모두가 연인과 재회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 난 운이 좋은 거겠지.
그렇다면, 앞으로 나는 이 두 번째 기회를 날려 버리지 않도록 희도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나는 희도가 준 팔찌를 손목에 채운 상태로 팔을 쭉 뻗어 보았다. 진주가 차르륵 피부를 타고 흐르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다 갑자기 가시가 박힌 것처럼 떠올리고 싶지 않은 녀석까지 생각났다. 나는 내 가방에 인형을 달아 주던 유세림의 표정을 상기하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 씨.”
저가 뭔데 그런 표정을 짓는 거냐고!
지금의 유세림이 나를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다. 체감은…… 잘되지 않지만.
하지만 나로서는 이전 회차의 기억 때문에, 당연하지만 나를 좋아한다는 유세림의 말은 여전히 거부감이 든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그 거부감도 점차 옅어진 것은 사실이다.
이전 회차에서의 광기 어리고 이기적이던 유세림과 어딘지 얼빠지고 순진해 보이는 지금의 유세림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이 때문인가?’
희도도 나이 때문인지 뭔가 좀 더 혈기 왕성하니까.
과거엔 좀 여유만만하고 섹시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의 희도는 패기 넘치는, 그 나이 때 소년만이 보여 주는 아우라가 있다. 그래서인지 유세림조차도 전과 다르게 앳되고 풋풋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유세림의 모습까지 증오할 수는 없었다.
‘맞아. 지금 유세림을 증오하는 건…… 힘들어.’
차라리 그렇게 인정을 해 버리니까 매듭이 탁 풀리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후우.”
“주인은 물러.”
“조용히 하랬지?”
“유세림이 그냥 맹하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무르다고.”
“유세림이 뭔가 했어?”
나는 안고 있던 베개를 확 치우면서 이에레에게 물었다.
이에레는 바보지만, 그래도 날카로운 구석이 있고 실력자니까. 내가 보지 못한 부분을 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이에레는 내게 말하기 전에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더니 휙, 하니 고개를 돌려서 다시 면벽 수련을 하는 자세를 취했다.
“몰라. 주인은 내 말 안 듣잖아.”
“뭐야! 지금 장난할 기분 아니야! 뭔가 알고 있으면 빨리 말하라고!”
나는 그런 이에레의 목덜미를 붙잡고 탈탈 흔들었다.
이에레는 그런 나에게 잠시 당해 주는 듯하더니, 어느새 내 몸 위에 올라타서는 팔목을 꽉 붙잡았다.
그러자 갑자기 이에레가 굉장히 무겁게 느껴졌다. 위압적이지는 않았지만, 손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안 내려와?”
그런 나를 내려다보던 이에레는, 돌연 낯을 굳히고 싸늘하게 말했다.
“정신 차려, 주인. 유세림은 싹이야. 주인을 불행하게 만들 싹.”
“……!”
“맹한 건 주인이지, 유세림이 아니야. 개도 물기 전엔 귀여워. 대체 왜 당하기 전에는 공격하지 못하는 건데?”
나는 이에레의 말에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이에레는 긴장한 나를 보면서 팔을 붙잡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내 뺨을 문질렀다.
“나는 주인의 악몽을 볼 수 있어.”
“…….”
“백희도가 죽을 때, 주인이 통곡하는 꿈을 봤어.”
“…….”
“나는 내가 섬기는 주인의 그렇게 비참한 울음소릴 다시 듣는 건 사양이야.”
이에레는 그렇게 말한 뒤, 내 팔을 놓아주었다. 그럼에도 나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 * *
이에레의 충격적인 말 이후, 나는 방을 나와 정원 님의 뒤뜰에서 생각에 잠겼다.
이에레는 그런 나를 따라 나오지 않았다. 제가 한 말이 내게 어떤 파문을 일으켰는지 아는 듯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에레의 냉정한 말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기 때문에, 그 누구도 원망하지 못한 채 소용돌이치는 마음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핑―.]
돌연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삐악거리는 새소리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어디서 들어 본 듯한 소리를 말이다.
“쉬이…….”
[삐이…….]
나무 하나를 지나서 뒤로 돌아가 보니 여태껏 나를 번민하게 한 남자, 유세림이 웅크려 앉아서는 무언가를 소중히 감싸 쥐고 있었다. 게이트를 막 넘어온 듯, 그의 주변에 찬 공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나는 인기척을 죽인 채 다가가, 유세림의 정신을 사로잡은 무언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저건…….’
과거, 유세림이 키웠던 새다. 이름이…… 핑이었나.
‘사냥한 건가?’
“생각보다 부상이 심하군요.”
“…….”
유세림은 품에서 포션 병을 꺼냈다. 그러곤 손수건에 포션을 듬뿍 묻혀서는 새를 꼼꼼히 닦아 주었다.
새는 유세림을 피해 도망치려고 하다가,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상처가 회복되는 것을 느꼈는지 나중에는 몸을 유세림의 손에 몸을 비볐다.
“천천히 마시세요.”
유세림은 그런 새에게 병을 기울여 포션을 먹이기까지 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한솔 씨?”
내가 뒤에 있었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침착한 목소리였다.
나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잡은 거냐?”
“아뇨, 주운 겁니다. 키울 거예요.”
그리고 유세림은 이전과는 달리, 무심하지 않게 답했다.
유세림은 내가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이며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색이 한솔 씨의 머리 색과 똑같아서 눈에 띄었습니다. 앞으로 솔이라고 이름을 붙여 부르려고 합니다.”
[핑―.]
새는 그것이 제 이름이라는 걸 알아챈 양, 포션 주둥이에서 입을 떼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