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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99/104)

2회차 회귀자는 살고 싶다

98화

그 이후에도 한솔과 내 사이는 여전했다. 한솔은 나를 좋아하는 티를 폴폴 냈고, 나는 한솔을 반쯤 무시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내 속은 겉과 달랐다. 이러다 한솔이 나를 포기하고 영영 관심을 끄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런데, 그럼에도 한 발짝 더 다가가는 게 힘들었다.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는 모르겠다. 한솔의 손을 잡으면, 그 순간 낭떠러지로 처박힐 것만 같아서 쉽사리 마음을 열 수 없었다.

같은 남자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런 종류의 터부가 아니라……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린 듯한 불길함이 들었다.

꼭 한솔을 지켜 주지 못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아무도 위협하는 것이 없는데, 왜 나는 쫓기는 사냥감처럼 구는 걸까.

‘마치, 꿈속에서처럼…….’

이 상태로 한솔과 사귀게 된다면 실패한 꿈의 절차를 고스란히 밟을 것만 같달까. 나도 이게 이상하다는 건 아는데, 그 꿈만 생각하면 한솔에게 말을 거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다가가고 싶지 않아도 한솔에게 끌렸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자꾸 시선이 돌아갔다.

이미 몰래 입까지 맞춘 상태에서, 게다가 상대방이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아는 상황에서 절제하기란 정말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눈엣가시 같은 유세림까지 한솔을 노리고 있는 마당이니.

‘내가 유세림보다 강해지면, 그땐 한솔한테 고백할 수 있을까.’

아니, 유세림 말고 한성훈보다 더 강해진다면…….

한성훈은 내가 아는 각성자 중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니 말이다. 게다가 한성훈도 동생이라기엔 한솔을 너무 싸고돌고 있으니까…….

‘한솔은 대체 왜 저런 놈들하고만 얽혀 있는 거지.’

나는 괜스레 투덜거리면서 수련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나만 열심히 사는 게 아니다. 재능있는 사람이 주변에 너무 많았다. 특히, 유세림은 나만큼이나 재능이 뛰어나면서도 언제나 쉬지 않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실전 경험은 나보다 더 많은 것 같아, 노련함까지 갖췄다는 게 짜증이 났다. 지나 버린 시간은 어찌할 수 없으니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처음 봤을 때부터 유세림을 강하게 의식했다. 그러다 의식을 넘어 놈을 증오하게 된 것은 한솔이 마검 일로 쓰러진 이후부터였다.

그때부터는 녀석의 힘과 여유가 참을 수 없을 만큼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 스스로의 부족함이 인식됐다. 물론 전에도 힘을 원했고, 성장을 위한 갈증이 있었지만, 요즘처럼 절박하진 않았다.

이젠 힘을 향한 내 열망이 무엇을 위해서인지…… 점점 모호해지고 있었다.

예전에는 성장하는 스스로를 보는 게 즐거웠는데, 이제는 나보다 반걸음 앞선 유세림을 향한 열등감과 나보다 한참 높은 곳에 있는 한성훈에게 느끼는 질시가 나를 움직이는 것 같다.

‘한솔 때문에…….’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원래 이렇게 추한 건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괴로움이 내 마음을 태우고 있었다.

나는 널뛰는 마음을 차가운 표정 아래에 감추면서 고고한 척 굴었다.

그러다, 미탐사 던전 이야기가 나왔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널 지킬 여력이 되었다면 함께 갔을 거야. 하지만 이번엔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솔아. 내 목숨도 장담하기 힘든 곳인데, 너를 어떻게 사지로 데려갈 수 있겠어.”

복도를 지나치다, 우연히 한솔의 방에서 한성훈의 목소리를 들었다. 둘은 언쟁을 하고 있었다. 

‘눈물겨운 형제애로군.’

나는 냉소하면서 내 방으로 들어왔다.

나로선 한성훈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다. 한솔은 저런 식으로 설득당할 성격이 아니니까. 오히려 불을 지르면 지르겠지.

‘저렇게까지 위험하다고 설득해 봤자, 오히려 저렇게 위험한 곳에 형을 혼자 보낼 순 없다고 생각할걸.’

한솔은 제 형을 끔찍이 아끼니까.

“가끔 보면 나보다 형을 더 좋아하는 거 같기도 하고…….”

나는 내 목소리가 질투로 추하게 얼룩져 있다는 걸 인지했지만, 듣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마음 편히 내뱉었다.

그리고 이후, 나는 뒤뜰에서 한솔과 마주쳤다. 한솔은 우울한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리깐 속눈썹에 드리운 그림자와 한숨……. 참견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처연한 얼굴이었다.

“정원한테 까였냐?”

“……!”

보나마나 부탁했지만 거절당했겠지.

“성훈……. 네 형 때문에 아마 들어주지 않을걸. 몇 번이나 신신당부하던데.”

하지만, 어떻게 한솔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까? 나라면 저 얼굴로 부탁한다면 그게 무엇이든 들어주었을 텐데.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지금, 한솔은 나를 멍하니 보고 있고 거듭된 거절에 속이 상해 있었다.

그리고, 이건…….

‘기회다.’

아무도 없는 지금, 나는 솔직해질 수 있었다. 그때부턴 머리와 심장으로 피가 확 쏠리는 기분이 들었다. 불쑥 긴장도 됐다.

‘뭐든 들어줘.’

‘뭐든 털어놓게 해.’

‘달콤한 말을 해.’

‘절대 실망시키지 마!’

그리고, 나는 영혼이 시키는 대로 했다.

“……너도, 나보고 포기하라는 거야?”

“아니?”

“……뭐?”

“가고 싶으면 가야지. 형이 네 인생 대신 살아 주는 것도 아니고.”

“…….”

“몰래 데려가 줘?”

한솔이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는 것.

내가 데려가 주겠다고 했을 때, 한솔의 얼굴에 잠시 빛이 내려와 앉은 것 같았다.

한솔은 나를 마치 신이라도 보는 양 쳐다봤다. 나는 그 순간 전지전능한 신이 가련한 인간의 찬양 따위에 왜 자신의 권능을 낭비했는지를 이해했다. 아마, 신은 이 맛에 인간을 구원했을 것이다.

나는 신도 아니면서 우쭐해졌고, 가슴이 크게 뛰었으며, 한솔의 신뢰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정말이지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좋아하는구나.’

이 기분을 설명하자면 딱 이것이었다.

그를 좋아하는 것.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 무거워서 쓰고 싶지 않다. 사랑한다는 말은 꿈을 생각나게 해서 싫다.

하지만, 좋아한다는 말은 마음껏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한솔을 좋아한다. 한솔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뻤다.

그렇게 나는 한 가지 꾀를 내어 그에게 물약 하나를 내밀었고, 한솔은 나에게 말했다.

“고, 고마워, 희도야.”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 * *

‘좋아한다고 자각하자마자 이렇게 운이 좋아도 되는 건가.’

좋아하는 사람을 작게 만들어서 주머니에 넣어 데리고 다니고 싶다는 상상을, 나는 현재 실현 중이다.

심지어 알몸도 봤다. 거기에 충격적인 것까지 확인했다.

‘털이 하나도 없었지…….’

말단에 힘이 들어가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자꾸 끊임없이 재생된다.

근데, 어떻게 털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지? 한솔이 애도 아니고……. 목소리가 좀 높긴 하지만, 그래도 2차 성징은 나타날 때가 됐잖아?

다리털이 없는 걸 보고 좀 의심하긴 했지만…… 페어리 물약에 털을 없애 주는 기능은 없으니까. 그렇다면, 원래도 없다는 건데…….

“…….”

“희도 씨! 좀 멍한 거 같은데, 무슨 일 있어요?”

“없어.”

나는 정원의 말에 쌀쌀맞게 대꾸했지만, 빨개진 귀마저 감출 순 없었다.

그리고 유세림은 그런 나의 빈틈을 눈치챈듯 약간 묘한 눈초리를 보냈다. 평소였다면 그 눈빛이 기분 나빠서 같이 야려 줬겠지만…….

‘너무 야한데.’

나는 계속 내 소맷자락에서 꾸물거리는 한솔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 한솔은 내 손수건을 몸에 둘러, 옷처럼 입고 있으니까. 아래가 뻥 뚫린…….

‘더듬으면 티 나려나……. 아니, 안 되지 당연히.’

진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불가항력이다. 나는 손가락에 힘을 주지 않기 위해서 별짓을 다 했다. 

무방비하고,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막을 수 없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

‘아.’

게다가, 나를 좋아하는.

‘내가 그런 짓을 해도 좋아하려나…….’

어쩌면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 때문에 괴로웠다. 

그나마 주의 사항을 말하는 한성훈의 목소리 덕분에 간신히 정신 줄을 잡을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가족 앞에서 그런 짓을 할 순 없으니까.

동시에, 한성훈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게 정신적으로 엄청난 우월감을 줬다.

‘엄청 귀여워…….’

나는 틈틈이 한솔을 슬쩍슬쩍 쳐다보면서 걸었다. 너무 만족스러워서 몬스터가 나와도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방심했던 모양이다. 결국 유세림에게 들켜 버렸지만, 다행히 한솔은 다치지 않았다. 

나는 이 상황에 끼어든 유세림이 짜증 났으나, 한편으로 정신을 차릴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눈의 여왕]이 나타났을 때, 나는 한솔이 내게 숨기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내 알량한 자존심이 박살 나면서도…….

“말해 주지 않았잖아, 너도.”

이제부터는 진심을 보여 줘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됐다.

한솔은 순식간에 [눈의 여왕] 목을 베고는 눈웃음을 치면서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곤 스쳐 지나가면서 나에게 말했다.

“지금은 분명히 너야. 하지만…… 글쎄, 너도 알다시피 난 선택권이 많거든.”

“…….”

“이제부터 헷갈리게 하면, 재미없단 얘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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