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차 회귀자는 살고 싶다
97화
‘포기하지 마, 주술사. 난 안 했으니까.’
어떤 꿈에서 나는, 한 남자에게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두근― 두근―.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알고 있다.
분명히, 이번에 나는 죽는다. 찌를 듯한 살기가 느껴진다. 이길 수 없는 상대……. 나는 틈 없이 선 은발의 남자를 보며 아득한 격차를 느꼈다.
하지만, 등 뒤에 둔 남자에게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왜냐면.
‘아.’
질 수 없는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죽으면, 내 뒤에 있는 이 남자는…….
“……하.”
나는 오늘도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 악몽을 꾸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었다.
이번에도 분투했지만 졌다. 일어나면 내가 열심히 싸웠던 기억만 있고, 누구와 싸웠는지는 기억에 남지 않았다.
꼭 기억을 잃은 것 같은 찝찝함이 들어, 신경질적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이 꿈을 꾼 날이면 몸은 왠지 무겁고 기분도 묘하게 가라앉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혹시 이 여관에 머리카락이 길고…… 아니, 단발머리에 얼굴이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애가 있진 않나요?”
묘하게 익숙한 뒷모습과 마치 나를 찾는 듯한 묘사에 끌려 다가갔다.
그리고 부르자마자 뒤돌아선 그 얼굴에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남자는 처음 보는 것이 분명한데도 나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나 역시…….
‘어째서지?’
무방비하게 달려 내게 안겨드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밀쳐내지 못했다. 꽈악. 온 힘을 다해 내 몸을 끌어안은 가느다란 팔에 나도 모르게 온몸이 떨려서.
‘이상하잖아……!’
휙―!
결국, 그를 밀쳐 냈다.
“나, 나는 한솔이라고 해. 내 형은 한성훈이고. 드, 들어 봤을 거야…….”
그제야 남자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자신을 소개했다.
“……한성훈?”
익숙한 이름에 반문하니, 어째선지 시무룩해졌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익숙하고 유명한 한성훈이라는 이름보다 한솔이라는 그 남자의 이름이 더 거슬렸다. 귓속에서 돌멩이가 갉작거리는 것처럼 계속, 계속 마음에 남아서…… 그를 경계했다.
그런데 한솔이라는 남자를 만나고 나서부터 꿈이 변화했다. 시리도록 차가운 설원에서 이길 수 없는 적에게 난도질당하는 악몽이 아니라…….
‘―――이 만질 땐 어땠어?’
‘……역겨웠어.’
‘나는?’
‘……넌 좋아.’
반쯤 벗겨진 옷 틈새로 하얀 살결이 보였다. 나는 그 위로 게걸스럽게 입을 맞추면서 물었다. 한솔은 슬프게 웃었지만,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그래. 그 순간 나는 승리자였다.
그날부터 나는 그런 꿈을 자주 꿨다.
한솔과 입을 맞추는 꿈, 내 방에서 그를 품에 안고 잠드는 꿈, 마켓에서 산 허리띠를 둘러 주면서 너무 말랐다고 생각하는 꿈 등등…….
어이없을 만큼 달콤하고 눈을 뜰 때마다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 이상한, 그런 꿈들 말이다.
“대체 뭐지?”
절박하고 잔인한 꿈이 왜 한솔과 데이트하는 것으로 바뀌었을까. 설마, 한솔이라는 남자 때문에 이렇게 된 건가 싶어 나는 그에게 더 날을 세웠다.
이후 한성훈의 파티에 합류하게 되고, 함께 훈련을 받으면서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왜냐면 한솔은 나를 정말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오랫동안 짝사랑이라도 해 온 것처럼.
그 사실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젠장…….”
나는 오늘도 꿈에 나온 한솔 때문에 난감해하면서 옷을 정돈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겉으로는 한솔을 밀어내고 있지만, 매일 매일 그가 나오는 꿈을 꾸고 있다는 걸 들킨다면…….
“…….”
역시, 첫눈에 반한 걸까?
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한솔이 곁에 있으면 전혀 집중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였다. 원을 그리는 것도, 한솔이 곁에 있어서 그런지 셋 중에서 내가 가장 늦되었다.
수련에서 남들보다 두각을 나타냈으면 나타냈지, 못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첫 만남부터 묘하게 기분 나빴던 유세림, 놈보다 한 발짝 뒤처진다는 게 가장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화풀이를 괜한 한솔에게 했던 것 같다. 한솔을 밀어내고, 또 밀어내면서 지금은 훈련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나 스스로를 설득해 왔는데…….
“한솔이…… 마검을 봉인하느라 의식을 잃었다고요?”
한솔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것도, 마검을 봉인한다는 황당한 명목으로 말이다.
그 이후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남들 모르게 매일 한 시간씩 한솔이 있는 방에 들어가, 녀석의 작은 손을 꽉 틀어쥐었다.
나는 그제야 자각했다.
이 감정은, 정말 위험하다고.
어떻게 다뤄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이대로 한솔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캄캄해져서 머릿속이 텅 비었다.
그래서 그냥 깨어났으면 하는 마음으로 손만 잡고 있었다. 그렇게 손을 잡으면서 느낀 건데, 한솔은 정말 모든 게 나보다 작았다. 키도, 손도…….
“한솔아.”
나는 한솔의 손을 잡은 채 귓가에 속삭였다.
간지러운지 눈꺼풀을 움찔 떨면서도 절대 깨어나지는 않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한솔이에게 속삭였다.
만약, 이대로 깨어나지 않으면…….
“…….”
입술을 맞대자마자 한솔의 방에 들어서는 유세림을 쳐다봤다. 유세림은 경악하는 기색 없이 고요히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이상하게도 들켜서 놀랐다거나 뻘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유세림 앞에서는 오직 본능처럼 오소소 돋는 경계심이 우선이었다.
“……한솔 씨를 싫어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몇 분의 침묵 뒤, 유세림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곧장 대답하려다가 유세림도 한솔이 있는 방에 매일 들른다는 걸 기억해 내고는 사납게 눈을 떴다.
유세림은 내 표정을 보곤 무표정하던 입꼬리를 비틀었다.
“저는 당신처럼 무뢰배가 아니라서요.”
“그게 아니라, 네가 하면 정말 추행이잖아. 한솔은 내가 키스한 걸 알면 좋아할걸.”
그 순간 지은 유세림의 표정을 보곤 확신했다. 놈과 나는 서로를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걸 말이다.
유세림은 한솔을 좋아한다. 나에게 비틀린 감정을 가질 만큼.
하지만 나로선 놈이 내게 화내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솔은 언제나 나를 향한 호감을 숨기지 않았으니까.
알면서도 감히 그런 마음을 품다니, 유세림이 더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괘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솔이 너한테 여지라도 준 적 있어? 얜 언제나 나만 좋아했는데.”
“여지를 준 건 당신이죠. 한솔 씨에게 항상 차갑게 대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그 말을 듣고는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턱을 꽉 깨물었다. 내가 냉담한 척하느라 만들어진 한솔과 나 사이의 틈 사이로 유세림이 자리를 잡고 들어왔다는 양 들렸기 때문이다.
하기야, 나는 언제나 한솔에게 퉁명스럽게 굴었다. 그게 오늘처럼 후회된 적은 처음이었다.
유세림은 그런 내 표정을 보고는 뒤돌아서 나갔다. 뭔가 본인이 한 말을 후회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놈의 인기척이 완전히 멀어진 후에,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한솔을 보며 속삭였다.
“다 듣고 있어? 놀리는 게 아니면, 이제 돌아와야지.”
“…….”
“진짜 내가 냉담하게 굴어서, 이제 싫어졌어?”
“…….”
한솔은 바보 같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을 조금 오므렸다가 웅얼거리며 다시 깊은 무의식 속으로 빠져 들어갔을 뿐이었다.
나는 그 이후로도 거리낌 없이 한솔의 방에 들락거렸다. 그리고 유세림 새끼도 종종 마주쳤다. 유세림은 가끔 한솔의 손을 잡고 있던 모습을 나에게 들켰는데, 어쩌면 그 이상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주 불쾌했지만, 내가 아직 한솔과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는 것 때문에 저지할 수는 없었다. 유세림도 비슷한 처지라 우리는 서로를 못 본 체하기 바빴다.
다행히, 이후 한솔은 마검을 무사히 봉인하고 의식을 되찾았다.
“마검인지 뭔지를 봉인하려고 했다며?”
깨어나면 다정하게 대해 주려고 결심했던 것과 달리, 맹한 표정을 보자마자 나는 화가 나서 한솔을 몰아붙이고 말았다.
“으응…….”
한솔은 나를 보면 반사적으로 얼굴을 붉혔다. 의식을 잃기 전과 똑같이 말이다.
그 표정을 보면 화가 풀리려다가도, 저런 얼굴을 다시는 못 볼 뻔했다는 것에 심장이 차가워졌다.
“넌 저 새끼가 시키는 건 그냥 무지성으로 다 하냐? 생각이라는 게 없어?”
내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뱉자마자 아차 싶어서 후회가 들었고, 어두워지는 한솔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나는 결국 자책하면서 별다른 대화다운 대화도 나누지 못한 채 자리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