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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95/104)

2회차 회귀자는 살고 싶다

94화

바스락.

포장지는 한쪽은 투명하고 한쪽은 불투명해서 내부가 거의 보이는 디자인이었다. 한마디로 희도가 내게 건네지 않았음에도 어느 정도 안에 든 물건이 보였다는 뜻이다.

포장지로 감싼 액세서리는 작은 진주 두 알이 걸쇠 부분을 장식하고 있고, 나머지는 검은 비단으로 된 아주 심플한 천 팔찌였다.

나는 그것을 확인한 순간부터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나에게 주려는 건…….

하지만 내게 오는 희도의 굳은 듯 긴장한 표정도 그렇고, 이에레의 음흉한 미소도 그렇고……. 나는 얼굴이 점차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희도는 내게 성큼 다가오자마자 포장지를 금방 뜯어내더니 내가 본 팔찌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내 오른 손목을 붙잡았다.

“……!”

“주인, 입이 귀까지 찢어졌어.”

‘조, 조용히 햇!’

나는 이에레에게 닥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욕이 나오질 않았다.

희도가 진중한 표정으로, 끝내 내 손목에 팔찌의 걸쇠 부분을 채워 주었기 때문이다. 그 광경을 코앞에서 보고 있는데 욕이 나오려야 나올 수가 없었다.

두근, 두근.

그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희도가, 왜 나한테 팔찌를……?’

“됐다.”

희도는 열심히 채워 준 것치고는 냉담하게 말한 후 뜨거워진 손목을 휙 내팽개쳐 버렸지만, 귀 끝은 빨개져 있었다.

“던전에서의 보답이야. 내 목숨을 한 번 구해 줬으니까.”

‘이에레, 사실이야?’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이에레를 추궁했다. 이에레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주인, 목숨을 구해 줬는데 이런 앙증맞은 선물을 하는 남자 새끼가 어디 있어? 당연히 핑계지. 얘는 그냥…… 이제 주인한테 슬슬 침 묻히고 싶은 발정 난 수컷일 뿐인걸.”

‘미친놈아!’

나는 노골적인 말에 경악했지만, 희도가 내 표정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을 의식하면서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고, 고마워.”

나는 팔찌보다는 희도의 손끝이 닿았던 손목을 매만지면서 수줍게 말했다.

희도는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아까보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마음에 드냐?”

“응.”

나는 곧장 대답했다. 이에레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혀를 쯧쯧 찼다.

“주인, 밀고 당겨야 한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어쩌라고.’

나는 이에레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면서 희도의 곁으로 갔다.

희도는 내가 쓱 다가오자 조금 긴장한 것 같았지만, 곧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풀고 말없이 곁에 서 있어 주었다.

‘헤헤헤…….’

나는 속으로 웃었다. 희도가 내가 곁에 왔을 때 구박도 안 하고, 선물도 준 일은 이번 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미치겠다……. 너무 행복해.’

발걸음이 저절로 둥실둥실 가벼워진다고 할까.

이번에도 희도가 나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자꾸 힐끔힐끔 옆을 쳐다보게 된다.

희도는 그런 내 시선을 묵묵히 받으면서 간혹 도도하게 나를 내려다보고는 했다. 그 시선 역시 전처럼 싸늘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이에레는 그런 우리를 보면서 뒤에서 혀를 찼다.

“참나. 주인은 이게 다 내 덕분이라는 걸 아나 몰라?”

나는 이에레의 말을 씹었다. 그저 참을 수 없이 간지럽게 느껴지는 팔찌의 사그락거림에 팔목을 긁지 않고자 애써 참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데이트(?)스러운 느낌으로 마켓을 거닐고 있을 때였다.

“이봐요! 같은 가격이면서 다른 곳이랑 왜 함량이 다른 포션을 판 거냐고 묻잖아요!”

귀에 익은 뾰족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주게 되었다. 그리고, 소란의 중심에 선 여자를 보고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내뱉었다.

“표, 표유정……?”

“아는 여자야?”

“……어?”

내 중얼거림을 들은 희도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여기서 표유정을 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모른다고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어서 당혹스러운 심정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미 희도에게 이름을 부르는 걸 들켜 버린 상태라,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예전에 내가…… 그러니까, 일방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 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 근데 저 여자, 지금 좀 곤란에 처한 것 같은데.”

희도의 말이 맞았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표유정은 열 받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들이받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같은 파티로서 곤란했던 적이 꽤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시비를 걸거나 시비가 걸리면 절대로 물러나는 법이 없어서, 보통은 유세림이 나설 때까지 대거리가 끝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표유정이랑 나는 아무런 관련도 없고, 유세림이랑 표유정도 별다른 연관도 없으니까…… 지켜보는 게 맞나?’

하지만 표유정이 쌈닭이 된 데엔 또 그만한 이유가 있긴 했다.

표유정은 그녀가 잘못해서 시비가 걸리는 경우보다는 대부분 그냥저냥 좋은 게 좋은 거, 하고 넘어가거나 상대가 더 강력해서 어쩔 수 없이 비굴하게 넘어가게 되는 일에 자신이 연관되면 결코 참지 않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성훈 형처럼 정의롭다는 게 아니라,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파티의 이익이 결부되는 일이 생기면 물러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당시 나는 그런 표유정의 성격이 좀 피곤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가끔은 그녀의 그런 성격 덕분에 반사적인 이익을 보기도 했었다.

마냥 손가락질당할 만한 사람이라고 보기엔 어려웠다는 의미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표유정을 지켜봤다. 

“제가 함유량을 속였다고요?”

이번에 표유정이 싸우는 상대는 포션 상인이었다.

마켓에서도 꽤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걸 보면 상당한 재력가이자 포션 장사에 뼈가 굵은 사람 같은데, 표유정은 담대하게 그에게 시시비비를 가리러 온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에 쓰여 있는 확신을 보고, 그녀가 이 상인을 모함할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상인은 되레 언성을 높이면서 표유정을 몰아갔다.

“제가 마켓에서 장사한 지가 벌써 몇 년인 줄 아십니까? 포션 함유량을 속였으면 벌써 쫓겨나고도 남았죠. 아가씨, 증거도 없이 이렇게 함부로 말하면 곤란합니다.”

“참 나, 이렇게 강짜 부리는 각성자들 때문에 장사하기 힘들다니까.”

“우리도 랭크는 낮지만, 각성자라 던전 돌고 다 합니다. 목숨이 걸려 있는 걸 뻔히 아는데 희석률 가지고 장난치지는 않아요. 상황을 너무 모르시네…….”

그리고 저 상인을 중심으로 이자와 공동으로 운영하는 듯한 다른 상인들까지 합세해 표유정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표유정은 자신이 포션을 구매한 상인만 상대하려다가, 졸지에 다른 상인들까지 상대해야 할 처지가 되자 적잖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이 광경을 보면서 저 상인들이 항의하러 온 다른 각성자들을 이런 식으로 내쫓은 게 한두 번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이에레도 마찬가지였다.

“이 녀석들, 장난질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나 본데?”

“…….”

나는 잠시 망설였다. 

삿대질당해 얼굴이 토마토처럼 익어 가고 있는 표유정이 새삼 가엾다거나 불쌍하게 여겨져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흐, 흐윽……. 손, 놓지 마요!’

왜 하필 떨어지려는 그녀를 붙잡았을 때가 생각난 걸까.

생각보다 너무 가느다래서 순간 흠칫 놀랐던 그 순간이…….

표유정은 목숨을 구해 줬을 때도 솔직하게 감사하다 말하지도 못했던 여자였지만, 그래도……. 매도당할 만큼, 그녀가 나쁜 사람이었던가?

“저기요.”

결국, 나는 옆에서 쳐다보고 있는 희도를 그대로 둔 채 어쩔 수 없이 표유정의 앞에 나서고 말았다. 이상한 충동심이 이번에도 나를 압도한 것이다.

나는 상인들에게 말했다.

“일단 얘기는 들어 보셔도 될 것 같은데요?”

“……에효. 내 주인은 정말 오지랖이 너무 넓어서 문제야.”

이에레가 투덜거리는 소리에 나도 내심 동의하긴 했으나, 그래도 꿋꿋하게 표유정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표유정에게 향했던 날카로운 눈빛들이 이번에는 나를 향해 쏟아졌다.

“뭐야. 이 아가씨 일행이신가?”

“아무튼, 증거 있어요? 아까 내뱉은 말에 책임지실 수 있으시냐고요.”

상인들의 소란에 지나가던 각성자들도 하나둘 발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다, 당신은 누구예요?”

그리고 표유정은 나를 보며 당황했다. 아무래도 그럴 것이다. 이번 회차에서는 지금 처음 안면을 트는 것이니 말이다. 

나는 그 질문에는 대답 없이, 그녀에게 먼저 속삭여 물었다.

“함유량에 대한 거, 증거는 있어요?”

“……당연히 있죠!”

표유정은 자존심 상했다는 얼굴로 인벤토리에서 포션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여기서 구매한 포션인 듯했고 (이 상점에 진열된 포션들과 병이 똑같았다) 다른 하나는 다른 곳에서 구매한 듯 포션 병 생김새가 달랐다.

그녀는 이 두 개가 같은 등급이라고 말하면서, 가차 없이 제 팔뚝에 단검을 두 번 그었다.

“헉!”

지켜보던 사람들이 다 놀랄 만큼 상처가 깊었는데, 그 위로 포션을 각각 붓자 두 포션은 확실히 치유 속도가 달랐다. 이 상점에서 파는 포션이 상처를 치유하는 속도가 월등히 느렸다.

표유정은 고통 속에서도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면서, 질린 듯한 기색의 상인들을 향해 삿대질하면서 말했다.

“이것 봐요! 둘 다 똑같은 가격으로 함유량 70퍼센트짜리를 샀는데, 왜 치유 속도는 거의 두 배나 차이가 나는 거죠? 난 그 이유를 알려고 찾아온 것뿐이에요. 그랬더니, 갑자기 사람을 몰아세우고 말이야!”

그러면서 나를 힐끔 쳐다보는데, 내가 느끼기엔 내가 자신의 편을 들듯 나서 주었기 때문에 자신감에 힘을 얻은 것 같았다.

나는 약간 울렁거리는 심정으로 그녀의 팔뚝에 사라져 가는 상처를 쳐다봤다. 기분이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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