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차 회귀자는 살고 싶다
92화
지익―.
“실수로라도 눈을 뜨면 또 환각에 사로잡히고, 불필요한 전투가 생기니까 말이야.”
이에레가 옷자락을 뜯어 그것을 두 사람에게 건네며 말했다. 둘은 잠시 멈칫했지만, 결국 순순히 옷자락을 건네받아 눈 위에 둘렀다.
둘 다 얌전히 눈을 감고, 그 위로 내 옷을 싸매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게다가, 이 둘을 이끌고 나가는 게 나라니.
‘어색해…….’
손에서 땀이 날 것 같은 기분. 아니, 실제로 살짝 미끈했다. 양손에 각각 희도와 유세림을 잡고 정글을 헤치고 걸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게다가, 때마침 이에레가 나에게 뜬금없이 말을 걸어오는 게 아닌가.
“기분이 어때, 주인?”
‘갑자기 혼잣말하면 어떡해?’
나로서는 희도와 유세림이 들을까 봐 걱정했는데, 이에레는 태연했다.
“이 둘 귀에는 발걸음 소리 말곤 안 들려. 이미 홀려 있는 상태라.”
‘뭐?’
“내가 말했잖아. 주인 말고는 여기서 제대로 길을 찾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믿기 힘들었으나 유세림과 희도가 둘 다 별반 반응이 없자, 그제야 이에레가 한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레가 짓궂게 물었다.
“이대로 유세림 손을 놓으면, 손쉽게 놈을 처리할 수 있어.”
‘……뭐, 뭐라고?’
“정말이야. 평생 이곳을 혼자 떠돌아다니며 헤매게 할 수 있다고.”
‘…….’
“주인은 유세림을 싫어하잖아.”
나는 그 말에 잠시 유세림을 쳐다봤다.
유세림은 마치 눈이 먼 것처럼 내가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손을 놓으면 금방이라도 저가 보고 있는 쪽으로 갈 것처럼 말이다.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 역시 위태로운 데다 이에레가 빈말하는 성격은 아니니, 아마 맞는 말이겠지.
‘이 손만 놓으면…….’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이 삼켜졌다. 이 한 번의 행동으로 놈과의 악연을 정리할 수 있다니. 당연히 유혹적이었다.
유세림은 몰라도 나는 유세림에게 당한 게 많았으니까. 특히, 그 전 회차의 기억들은…….
꾸욱.
나도 모르게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자, 유세림이 잠시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벌렸다.
“…….”
하지만, 놈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
“놓지 않는 거야?”
그러나, 나는 결국 유세림을 놓지 않았다.
이에레가 다시 확인하듯이 물었을 때도 대답하는 대신, 유세림의 긴 손가락을 단단히 쥐었다.
“왜?”
‘……그냥, 비겁하게는 싫어.’
다른 의미는 없다. 그것뿐이다.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일 때 등을 떠미는 건…… 처음, 나를 던전에 던져 놓고 수장시켰던 그때의 놈과 다른 게 뭘까 싶어서.
“우와. 그런 짓을 당하고도 똑같이 되갚아 주지는 않는다고? 내 주인은 고고하구나…….”
‘그렇게 대단히 고아한 문제로 봐주고 있는 거 아니야! 바보 취급하지 마.’
다만…….
나는 다른 한 손, 사심을 담아 깍지를 끼고 있는 희도를 바라보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가 희대의 못된 놈이라고 해도, 그리고 희도가 아무리 눈을 가리고 있다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그런 비열한 짓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헤에…….”
이에레는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지만, 그래도 내가 희도에게 깍지를 끼고 있다는 걸 놀려 먹지는 않았다.
“주인. 나는 역시 주인이 좋아.”
‘뭐? 뜬금없기는.’
“하하……. 주인의 이런 점이 좋다니까.”
그 뒤 이에레는 마치 놀리듯 알 수 없는 소리를 했고, 나는 희도도 유세림도 놓지 않은 채 무사히 정글을 빠져나왔다.
* * *
“저, 저리 꺼져! 다 죽여 버린다!”
정글을 거의 빠져나왔을 무렵, 익숙하면서도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주승!?’
바로 윤주승이었다.
놈은 무기를 휘둘러 주변 사람들을 마구 위협하고 있었는데, 눈가에 힘줄이 서 있고 눈을 허옇게 뒤집은 것으로 보아 환각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문제는, 놈이 파티원 중 한 명에게 꽤 큰 상처를 입혔다는 점이었다.
“쯧쯧. 이미 환각의 영향권은 벗어났는데도 심마에 들었군.”
‘……심마?’
“마음이 악에 물들었다는 거야. 심약한 정신은 홀리기 쉽지.”
내가 본 윤주승은 심약하기보다는 화를 잘 내고 욱하는 성질머리를 가진 남자였지만…….
아무튼 이에레는 그렇게 말하더니, 지체하지 않고 희도와 유세림을 잡은 채 뛰었다. 곁에 있던 두 사람은 용케 넘어지지 않고 속도에 맞춰 같이 뛰어들었다.
이에레는 어느 정도 뛰다가 유세림과 희도의 손을 아예 놓아 버렸다.
‘앗!’
“괜찮아. 이제 영향권에서 벗어났으니까.”
내 외침에 이에레는 안심하라는 듯 말을 덧붙이곤 다시 윤주승을 향해 돌진했다.
이어 놈을 포위하고 있던 성훈 형의 무리에 미끄러지듯 다가가더니, 뒤에서 허술하게 무기를 겨누고 있던 한 파티원의 검을 가볍게 빼앗아 들었다.
“어, 어!?”
“잠시 빌릴게요?”
그리고 내 얼굴로 싱글싱글 웃으면서 검을 빼앗아 들었다. 돌연 무기를 빼앗긴 사람은 얼굴을 붉히면서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사람이 화를 내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뒤에서 어깨를 낚아채려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한솔 군!”
“솔아!”
성훈 형과 정원 님이 뒤늦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이에레는 씹었다.
그리고.
스윽―!
“아악!”
검으로 윤주승의 뒤꿈치 부분을 아주 가볍게 그었다. 윤주승은 무기를 들고 설치다가 곧장 고꾸라졌고 말이다.
쨍그랑!
윤주승이 무기를 놓친 채 쓰러지자, 이에레는 굽혔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허옇게 뒤집혔던 놈의 눈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입가에 묻었던 거품도 사라졌지만, 윤주승은 다리가 잘리기라도 한 것처럼 징징거렸다.
“아악―! 다리가! 다리가!”
“아킬레스건을 조금 건드렸어요. 포션 바르고 며칠 누워 있으면 나을 거예요.”
“이, 이 새끼가!”
“그보다, 아무리 홀렸어도 파티원을 공격하면 안 되죠. 안 그래요?”
“윽. 그, 그건……!”
“흐윽…… 아파.”
윤주승에게 공격당한 파티원이 원망스러운 눈초리를 보내 오자, 놈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나, 나도 피해자야!”
하지만 얼마 안 가 본인의 성질머리를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성훈 형과 정원 님은 뒤늦게 달려와서는 상황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윤주승은 반성의 기미가 전혀 없었다. 놈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삿대질을 했다.
“너, 던전 나가면 고소할 거야! 고소할 거라고!”
그래도 다행히 나 덕분에 치명상을 면한 파티원이 욱한 표정으로 윤주승을 향해 나 대신 나서 주었다.
“……그, 그럼 저도 고소할 겁니다!”
“뭐!?”
“먼저 저를 공격하셨잖아요!”
“이, 이것들이 한통속이 되어 가지고!”
이 일로 인해 파티가 나누어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성훈 형도 더 이상 윤주승을 데리고 공략을 속행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습니다. 윤주승 씨, 그리고 윤주승 씨가 데려온 파티 분들은 앞으로 공략을 포기하고, 모든 권리에도 포기하겠다는 각서를 써 주신 뒤에 공략 팀에서 나가 주셔야겠습니다.”
“아니, 그런 법이 어디 어디 있어?!”
“이때까지 우리가 여기에 들인 시간이랑 각종 소비재는…….”
“나 참, 이게 무슨 아마추어 파티도 아니고…….”
윤주승 무리는 당연히 반발했지만, 이번만큼은 성훈 형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윤주승이 파티원을 공격했다는 명분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윤주승 씨처럼 명망 있는 랭커분이 환각에 걸려, 같은 파티원을 공격했다는 게 알려지는 게 더 치명적일 텐데요.”
“크흠…….”
결국, 윤주승네들은 게이트를 열고 밖으로 나갔다. 놈은 시뻘게진 얼굴로 마지막까지 나와 성훈 형을 노려봤다.
왠지, 나중에도 악연으로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어.’
그렇다고 윤주승한테 굽힐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한결 쾌적해진 상황에서 우리는 다음 보스를 향해 나아갔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준보스까지는 살벌했던 것과 다르게 보스 방까지는 아무런 위협이 없었다.
심지어, 보스 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쏴아아―!
거대한 폭포 아래 거대한 불상이 있었고, 그 불상이 바로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보스였는데…….
[불살의 마타라]
“원래였다면 엄청 위험한데…… 놀랍게도 주인, 운이 좋은걸? 불살 모드일 때 도착했어.”
이에레 말대로 보스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그 자리에서 한 시간여를 기다리다가 성훈 형이 폭포 속으로 헤엄을 쳐서 들어갔다.
그리고 형은 마타라의 불상 앞에서 [불살의 반지]라는 걸 얻었고, 그렇게 던전은 허망하게 종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