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차 회귀자는 살고 싶다
90화
“……알겠습니다.”
나는 내 허리춤을 감싼 유세림의 손아귀 힘이 강해진 것을 느꼈다.
유세림은 선선히 그렇게 대답한 뒤에 나를 더욱 끌어안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이에레의 지시대로 채찍을 강하게 휘둘렀다.
그러자, 울룩불룩하게 치솟아 있던 땅에 동그란 선이 생겨났다.
그리고 다시.
펑―!
폭죽 같은 게 터지는 소리와 함께 땅이 움푹 꺼졌다.
[끄에에엑―!]
그러자 누런 흙 사이로 검은 뱀 꼬리들이 몇 개 보이다 곧 사라졌다.
‘…….’
나는 유세림의 채찍질 한 번에 푹 파인 골을 보곤 놈의 팔뚝을 다시 쳐다봤다. 예쁘장한 얼굴에 비해 굵은 편이긴 한데, 저 팔에서 이 정도 힘이 나오는 게 말이 되는 건가?
“세림아. 너, 쓸 만한 검 하나 있지?”
“……있습니다.”
“그럼 나한테 한 자루만 주라. 응?”
“……알겠습니다.”
그리고 나…… 아니, 이에레는 아무리 봐도 교태롭다고밖에 표현이 안 되는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유세림을 꼬드기고 있었다.
‘젠장, 이에레! 내가 언제 유세림한테 그딴 표정이랑 말투로 말했냐고!’
나는 내 몸에 갇힌 채 분한 마음으로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지만, 이에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화를 내면 낼수록 내 몸을 유세림에게 밀착해 비비적거릴 뿐이었다. 나는 분노를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곧, 유세림은 아이템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좋은 검을 하나 인벤토리에서 꺼내 주었다.
[귀살검 무영
―스킬1: 그림자 밟기 (MP 소모)
―스킬2: 귀겁 (MP 소모)
―스킬3: 무영검 (MP 소모, 그림자 일부 소모)]
‘옵션이 끝내주잖아?’
저주 아이템 외에는 별로 관심 없던 나조차 눈이 돌아갈 정도로 좋은 아이템을 준 것이었다.
이에레는 내 얼굴 가죽을 이용하여 좋은 아이템을 얻어 내 놓고선 여봐란듯이 내 눈앞에서 검을 흔들거렸다. 다 제 덕분이라는 양 말이다.
그러고는 내가 싫어할 것을 알면서도 유세림에게 일부러 감사 인사를 덧붙였다.
“고마워, 세림아.”
“……네.”
유세림의 귀 끝이 약간 더 붉어졌다.
나는 유세림의 열렬한 시선에 토가 나올 것 같았지만, 그래도 꾹 참았다. 어쨌든 (원치는 않았으나) 이에레의 방식으로 아이템을 얻어 낸 것은 사실이었던 데다가―.
챙, 챙―!
땅에서 튀어나온 급작스러운 공격에 유연하게 맞서 싸우는 것도, 결국 내 몸을 조종하고 있는 이에레의 능력이었으니 말이다.
이에레는 허리를 유연하게 써서 뱀의 수직 공격에 대응했는데, 더 놀라운 것은 유세림을 방패로 쓰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는 점이다.
뱀 꼬리가 자신의 발목을 잡을 것 같다 싶으면 곧장 유세림의 등 뒤로 튀어 올라, 뱀 꼬리들이 유세림을 공격하도록 유도했다.
퍼퍼퍽―!
그리고 유세림은 이에레가 뱀 꼬리들을 몰아올 때마다 채찍질로 토막 내 버렸다.
그 패턴이 몇 번 반복되자, 우리 주변에 있던 몬스터는 깨끗이 정리되었다.
‘젠장.’
빌어먹게도 유세림과 이에레는 손발이 잘 맞았다. 그러니까…… 남들이 보면 엄청 궁합이 잘 맞는 파티로 보였을 것이란 얘기다.
“대단하군요.”
근처에서 희도와 함께 뱀 꼬리를 정리하고 있던 정원 님이 나를 보며 감탄하셨다.
“이제 원을 정확히 사용하게 되었네요.”
‘……뭐라고?’
알 수 없는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보기엔 그냥 이에레가 몬스터를 잔뜩 끌어다 유세림에게 가져다 바치는 걸로만 보였는데 말이다.
다행히 정원 님은 이에레의 속에 갇혀 있는 내 의문을 알아차리신 것처럼 친절히 설명해 주셨다.
“특히나 전방에 원을 만들어 내서 몬스터를 갈퀴처럼 긁어모아 오는 기법은 아주 신선했습니다.”
‘……그런 거였나.’
나는 그제야 눈에 힘을 줘 집중해서 이에레의 움직임을 따라잡아 보려고 했다.
그러자 이에레가 움직이기 직전, 엄지와 검지 사이에 힘을 주어 ‘원’을 만들고 그 ‘원’을 크게 넓혀서 일정 범위 내의 몬스터들을 벽에 가둔 뒤 이쪽으로 끌어오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저렇게 해서 범위를 하나씩 청소해 나가는 거였구나…….’
아무래도 대단위에서는 나보다 화력이 월등히 좋은 유세림에게 몬스터를 몰아주어서 시간을 단축한 것이다.
나는 빠른 판단과 동시에 내 몸으로 전투를 수행하는 이에레에게 조금은 감탄했다.
‘그보다, 하나도 단련하지 않은 내 몸으로 어떻게 이리 뛰고 저리 뛸 수 있는 거지? 호흡도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원’으로 벽을 만들어서 몬스터를 갈퀴째 긁어 오려면 아무래도 저항이 만만치 않을 텐데, 그 저항을 아주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한 것이다.
‘눈이 좋은 건가?’
하지만,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뱀 꼬리의 공격을 고개만 슬쩍 까딱이는 것으로 피하는 이에레를 보고 나서는 그 생각마저도 정정했다.
지금 이에레는 온몸을 ‘원’으로 감싸고 있었다. 내 몸이지만, 이에레가 훨씬 더 운용을 잘했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말이다.
‘원을 사용해서 빈 공간을 만들고 있어…….’
그 공간에 침입한 몬스터를 밀어내고, 찰나의 틈을 만들면 그 안에 공격을 성공시키거나 몬스터의 공격을 피한다.
나로서는 놀라운 발상이었다. 그렇기에 정원 님도 저토록 칭찬하신 거겠지.
“주인이 이제야 내 진가를 알아보는 것 같네.”
이에레가 내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자화자찬을 했다.
‘조용히 해.’
“아무도 못 듣고 있는걸.”
나는 그런 이에레에게 주의를 주었지만, 녀석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여유작작하게 굴었다.
서걱―!
그리고 그때, 갑자기 내 앞에 튀어나왔던 검은 뱀 꼬리가 반토막이 났다. 나는 이것이 이에레가 가른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역시나 뱀 꼬리가 반으로 갈리고 그 앞에 등장한 사람은 희도였다.
나는 환한 안색으로 희도를 맞이하고 싶었지만, 이에레는 희도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다. 유세림을 대할 때와는 정반대로 말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에레에게 희도를 향해 미소를 지어 달라고 했으나, 녀석은 듣지 않았다.
“주인은 밀당이 좀 필요해.”
‘웃기지 마!’
이러다가 희도가 오해라도 하면……!
“이젠 유세림한테 살랑거리기로 한 거냐?”
역시 오해했잖아!
나는 이에레를 원망했다. 하지만, 이에레는 오히려 차갑게 대답했다.
“유세림은 귀엽기라도 하지.”
‘안 귀엽다고!’
“…….”
희도는 어이없는 듯 말문을 잃었고, 나는 방금 이에레가 한 말을 철회하고 싶었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나는 희도의 얼굴에 스민 경멸 어린 표정을 보고는 이에레를 마구 패고 싶어졌다.
‘역시, 마검이었어.’
이딴 계약을 해 버린 내가 역시 경솔했음을 통감하면서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희도는 곧장 등을 돌려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온 게 아닌가.
“고작 검 하나 받았다고 살랑거리면 안 되지.”
그러곤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당혹스러워서 등이 굳었지만, 이에레는 희도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나에게 속삭였다.
“내가 말했잖아, 주인. 당기기만 해서는 안 된다구.”
‘무슨…….’
그러다가 문득, [눈의 여왕]을 죽였을 때 희도가 전과 다르게 나에게 좀 다정히 굴었던 것이 떠올랐다.
‘호, 혹시 희도는 이에레 같은 성격을 좋아하나……?’
새침하고…… 제멋대로의 성격 말이다.
문득 든 생각에 쿵, 하고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충격이 들었다.
그런데, 이에레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순진한 주인님.”
나는 심각한데 저는 혼자 깔깔거리는 것이 짜증 나서 화가 났으나, 이에레는 실실거리면서 여봐란듯이 더 희도 곁을 알짱거렸다.
나는 이에레가 일부러 이런다는 것을 깨닫고는 화가 났다. 이에레는 내가 화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희도의 곁에서 나를 비웃는 짓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 아― 아― 아― ]
이제껏 움직임이 없던 불상 머리들이 덜그럭거리며 땅이 천천히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함정이었어. 뱀으로 일부러 땅을 파게 유도했군.”
성훈 형이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우리가 밟고 있던 땅이 갑자기 아래로 푹 꺼졌다. 그리고, 모든 불상 머리들이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