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차 회귀자는 살고 싶다
88화
“응?”
“……아, 아니야.”
나는 형에게 동요한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했으나, 이에레는 씩 웃으면서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놀란 걸 알면서도 놈은 전혀 배려하는 법이 없었다.
“적당히 상대할 만한 약한 적이라면 주인의 의식을 살린 채 팔다리만 조종할 수 있지만, 일전에 상대했던 눈의 여왕 등급 정도면 무리야. 주인의 자의식과 충돌하면서까지 사지를 움직일 여유가 없어. 그래서 주인의 의식을 꺼 버리고, 내가 몸을 완전히 통제하는 거야. 그것 외에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으니까, 안심해도 좋아.”
‘맘대로 내 몸을 조종한다는데 어떻게 안심하라는 거야!’
나는 기막힌 변명을 들으면서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형이 여전히 내 앞에 있는 데다가…….
“한솔아, 왜 대답을 못 해? 뭔가 심한 부작용이라도 있는 거야?”
이렇게 묻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그러지는 얼굴을 억지로나마 펴야 했다.
“으, 으응……. 아니, 그런 건 없어. 그냥…… 전투할 때면 완전히 몰입한다고 해야 하나? 그, 그래서…… 주변이 잘 인식이 안 되고 좀 그런 편이야. 그것 외에는 딱히…….”
“아, 그래? 나도 집중하다 보면 주변이 잘 안 들리고 안 보이고 하곤 하지.”
“그, 그렇지…….”
나는 애매하게 말하면서 형의 말에 동조하는 척했다.
성훈 형은 그렇게 답하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하…….”
“……왜, 왜 그래 형?”
“너 지금 거짓말하고 있지?”
“……!”
나는 형의 말에 깜짝 놀랐지만, 곧 이해했다.
나는 원래도 거짓말에 재능이 없을뿐더러 형은 그런 내 표정을 곧잘 읽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형한테 뭔가를 숨길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변명해 보려 했지만,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결국 더듬거리며 변명만을 내뱉었다.
“나는…… 형을, 위해서…….”
하지만, 말을 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어떻게 들어도 형의 입장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얘기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외로 형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비난하거나 나를 구슬려 더 이야기를 들어 보려고도 안 했다.
한참 말이 없던 형은, 수그리고 있던 내 머리 위에서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그래. 알았어.”
“……아, 알았다니?”
오히려 내가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고 형을 쳐다볼 정도였다. 하지만 형은 진지한 태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애초에 내가 따라오지 말라고, 위험하다고까지 경고했는데 몸이 작아지는 물약을 먹기까지 하면서 따라왔을 때부터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했어.”
“그건…….”
“네가 그렇게까지 무리하는 건 보통 나 때문이니까.”
“……!”
나는 형이 그 마음을 알고 있다는 것. 아니, 알아준다는 것에 감동했다.
눈가가 촉촉해지는 나를 보며 이에레가 이죽거렸다.
“나 참. 주인은 왜 성훈, 저 녀석 앞에만 있으면 감정이 널을 뛰는 거람.”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마. 그리고 자꾸 속이려고 하지 말고.”
“……알았어.”
형은 그렇게 말하면서 금방 뒤돌아섰기 때문에 나는 지금 형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수 없었다.
이에레는 형이 지은 표정을 본 것 같았지만, (그리고 그 표정을 본 뒤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 그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았다.
* * *
“포메이션을 변경하겠습니다.”
이튿날 아침. 파티는 [눈의 여왕]을 해치운 자리에서 캠프를 열었다.
보통 이 정도 규모의 몬스터를 해치우면 최소 열흘은 몬스터가 리젠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서 쉴 수 있는 쉼터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치고 지친 사람들을 대신해, 포지셔닝이 변경되기도 했다.
나 역시 포지션이 바뀌었다. 후방에서 전방으로 파격적인 인사 조치가 이루어졌다.
“한솔 씨는 앞으로 별다른 인사 조치가 없는 이상, 전방에서 전투 인력으로 상시 대기 부탁드립니다. 그 대신―.”
형은 공적인 말투로 나에게 부탁하듯 말했지만, 나는 애초에 마검과 계약하면서부터 그럴 생각이었기 때문에 거절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다른 조건을 듣지도 않고 바로 수락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형도 그런 내 마음을 읽은 듯 더는 설명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지시하기 시작했다.
이후 전방 전투 인원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이동하자, 익숙한 사람들이 보였다. 정원 님과 희도, 그리고…… 유세림.
유세림은 내가 다가오자 자리에 앉아 있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녀석은 [눈의 여왕]에게서 성훈 형을 지켜 줬을 당시 깊게 상처를 입었었는지 포션으로 치료한 눈가에 여전히 옅은 상처가 남은 상태였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놈이 돌연 나를 끌어안았는데도 밀어내지 못한 것은.
“…….”
“엇!”
“……두, 둘이 무슨 사이?”
다른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귀가 빨개져서, 결국은 밀쳐 내 버렸지만 말이다.
“비켜!”
“……왜 가만히 있었죠?”
“알 바야?”
나는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정원 님과 희도를 향해 다가갔다.
희도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있었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나에게 말했다.
“어제 너, 진짜 잘하던데.”
“그, 그랬어?”
“내가 본 검객 중에 네가 가장, 뭐랄까…….”
말을 고르는 그 얼굴이 반짝거려서, 나는 넋을 놓고 희도만 쳐다봤다.
“……뭐야? 부담스럽게.”
희도는 그 시선을 느끼고 한걸음 물러나 버렸지만, 그래도 이전처럼 막 면박을 주거나 무안하게 굴지는 않았다.
나는 그 미묘한 차이를 깨닫고는 내 곁에 선 이에레를 바라봤다.
“주인이 강해져서 백희도도 주인을 다시 본 거 아닐까?”
‘……진짜 그런가?’
하긴, 희도는 두 번의 생애에서도 강해지는 것에 꽤 집착해 왔으니까……. 어쩌면 강한 상대에게 끌리는 것일지도?
‘하지만, 그때 나는 강하긴커녕 약했는데.’
좀 악바리 근성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지.
나는 알쏭달쏭한 희도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뭔가 뒤가 좀 무거워져서 돌아보니, 어느새 유세림이 내 등에 슬그머니 기대 끌어안고 있었다.
나는 유세림을 매섭게 떨쳐 내고 싶었으나 그런 내 행동을 눈치챈 듯, 놈이 눈가를 짚고 서 있어서 차마 그러지 못했다.
“윽…….”
“주인,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은 못 하는 거야?”
‘알고 있다고! 내가 그 정도로 둔한 줄 알아!?’
하지만, 알면서도 당하는 게 있는 법이다. 나는 유세림이 당분간은 활개 치든 말든 내버려 두기로 했다.
어차피 마음은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이러다가 어느 순간 빚진 듯한 마음을 귀찮음이 넘어서 버리면 전처럼 매정하게 끊어 낼 수 있겠지.
“이러다 습관되어 버리는 게 먼저가 아니고?”
나는 멋대로 내 마음을 읽어 내리는 이에레를 노려봤다.
‘계약하게 되면서 마음도 읽을 수 있게 된 거야?’
“어느 정도는?”
‘그럼, 읽고 싶을 때만 읽지 말고 좀 도움이 되게 행동하란 말이야.’
“어떻게 행동하는 게 주인에게 도움이 되는 건지 알려 줘야지. 난 인간을 잘 모른다구.”
이에레는 얄밉게 대꾸하고 나서는 그저 내 허리를 감싸고 얼굴을 비비기만 했다. 한마디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자 그럼, 인원 체크와 분배는 끝났고…… 이제 어제 잡은 눈의 여왕에서 나온 아이템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형이 몇 명의 사람들과 함께 인벤토리를 열어 아이템 배분을 시작했다. 어제 잡은 [눈의 여왕]에서 나온 아이템을 기여도에 맞게 배분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물론, 유세림 파티에서 배분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이런 대규모 연합식 파티에서 공로를 인정받은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회귀한 기억도 없는, 완전히 처음 받는 아이템이라 더 마음이 떨렸다.
“먼저 가장 높은 기여도를 올린 사람은 바로…… 한솔 씨입니다.”
“……!”
“이견 있으신 분은 없죠?”
그렇게 말하며 성훈 형은 윤주승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 윤주승은 퉤, 하고 침을 뱉었지만 나서서 반대하지는 못했다.
그러자 형은 인벤토리에서 세 가지 아이템을 꺼냈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시릴 만큼 부신 아름다운 목걸이와 손대자마자 녹아 버릴 것 같은 투명한 검, 그리고 푸르스름한 보석이 촘촘히 박혀 있는 아름다운 반지였다.
“이 중에 한 가지를 고르실 수 있습니다.”
형이 내게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앞서 나가서, 세 가지 아이템의 이름을 훑어봤다.
[눈의 여왕의 눈보라 목걸이]
[눈의 여왕의 고드름 단검]
[눈의 여왕의 천년설 반지(저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