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8/104)

2회차 회귀자는 살고 싶다

87화

“일단 내려 줘, 형.”

나는 한차례 마검을 째려본 뒤, 계속 불편하게 안겨 있을 수는 없기에 형에게 내려 달라고 말했다. 형은 못 미더운 듯했으나 결국 나를 땅에 내려 주었다.

정원 님은 내가 땅에 발을 딛자마자 인벤토리에서 희고 투명한 돌을 하나 꺼내셨다. 크기는 주먹만 했는데, 그 돌을 보자마자 성훈 형이 신경질을 냈다.

“지금 당장 검사부터 하겠다고?”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

“후훗. 이제 와서 검사기를 들이대 봤자 별 소용 없을 텐데.”

마검이 옆에서 장난스러운 얼굴로 히죽히죽 웃었기 때문에, 나는 정원 님이 꺼낸 것이 바로 그 ‘정밀 검사’임을 깨달았지만 잠자코 있었다. 마검의 말에서 짚이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많이 걱정되진 않았기 때문이다. 

정원 님은 그 검사기를 나에게 건네주셨다. 돌은 생각보다 무척 가벼웠다.

“그걸 쥐고 가만히 집중해서 ‘원’을 만들어 보세요.”

“……‘원’ 말인가요?”

“네.”

나는 더는 묻지 않고 정원 님이 하라는 대로 원을 만들었다.

원은 수월히 만들어졌다. 그리고 돌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에 형은 안도했고, 정원 님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이럴 리가…….”

“것봐, 내가 말했잖아. 솔이는 마검에 홀린 상태가 아니라니까.”

“하지만……!”

나는 손에 쥔 흰 돌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마검은 검사기를 보면서 실실 웃었다.

나는 뭘까 싶어 별다른 생각 없이 투명한 돌을 슬쩍 들어 마검을 비추어 보았는데, 놈의 몸이 빨갛게 보였다.

‘어쩌면…… 마검이 돌에 닿으면 색이 붉게 변하는 것일지도?’

내 생각이 맞는지, 마검은 장난스레 웃으면서도 절대로 손을 뻗어 오진 않았다.

“……한 번만 더 원을 만들어 보겠습니까?”

“얼마나 더 의심할 생각인 거야?”

성훈 형은 이제 신경질을 냈지만, 나는 정원 님을 안심시켜 드리기 위해 능숙히 원을 만들어 내었다. 

예상대로 검사기는 변화가 없었다. 정원 님도 이제야 의심을 거두셨는지, 매서웠던 기세를 거두고 꼿꼿하게 폈던 자세도 허무셨다.

“하아…….”

이어 힘 빠진 한숨을 내쉰 뒤, 나를 바라보시곤 사과를 건네시는 게 아닌가.

“미안합니다, 한솔 군. 마검에 관한 일이라 좀 예민해져서…….”

“아, 아닙니다.”

사실 정원 님이 헛짚으신 건 아니니까……. 오히려 내 쪽에서 속이고 있는 셈이라, 나는 정원 님이 사과를 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정원 님은 의심해서 미안하다며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거듭 사과를 하셨다.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한솔 군이 갑자기 인격이 달라진 것처럼 움직임이 변했기 때문에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놀라긴 했습니다. 방금 전 보여 줬던 그 검술은…… 대체 무엇이었죠?”

“그, 그건…….”

하지만 마검 의심(?)을 넘어서도 이후 둘러댈 변명이 조악하면 금방 들통날 일이었다.

나는 눈알을 굴리다가 마검, 이에레를 쳐다봤다. 하지만 마검은 내 필사적인 표정에도 딴청만 피우고 있었다.

‘이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라는 거냐?’

나는 약이 올라 놈을 노려봤으나, 모두가 쳐다보는 와중이기에 보이지도 않을 녀석에게 호통을 칠 수는 없었다.

“내가 최후까지 숨기라고 가르친 비기라, 미처 너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거야.”

“……어?”

그때, 갑자기 뒤에서 형이 나를 끌어안았다. 형은 그렇게 말하곤 나에게만 들릴 것 같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가만히 있어.”

“……!”

그제야 나는 형이 내가 거짓말한 걸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감싸 주려고 한다는 것도 말이다. 

경직된 내 옆에서 “과연…….” 하고 감탄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정원 님을 보니 더더욱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러니 자꾸 설명해 달라고 조르지 마. 너희들도 최후의 한 수쯤은 가지고 있잖아.”

“그건 그렇죠…….”

‘……그런 게 다들 있었던 거야?’

나로서는 납득하기 힘들었으나, 정원 님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그 정도의 설명으로도 괜찮은 듯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다.

주변에 몰려 있던 다른 사람들 역시 감탄한 듯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다.

“과연, 한성훈의 동생……!”

“대단하군.”

“형제가 둘 다 엄청난 실력자였어.”

“하긴 성훈이가 R등급인데 동생이 C등급이라니…… 난 애초에 믿지도 않았다고.”

‘윽, 왠지 이상한 오해가…….’

요상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약간 닭살이 돋을 것 같았다. 이래서야 정체를 숨기고 약한 사람 코스프레를 한 것 같잖아.

“네놈, 여태 우릴 속인 거였냐!”

그때 나의 이런 우려를 정확히 짚어 낸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뒤에서 우렁차게 들려왔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윤주승이었다. 놈은 엄청나게 열 받은 얼굴로 쿵쿵거리며 다가와서는 나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

“어쩐지 꾸역꾸역 데리고 온다 싶더니! 말도 안 되는 핑계까지 대 가며……!”

“…….”

나는 여기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흥분한 윤주승을 이길 수 없을 것을 알기에 침묵했다.

다행히 형도 나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듯 어깨를 툭툭 치는 신호를 보낸 후, 나를 뒤로 보낸 채 윤주승과 내 사이에 섰다.

“동생을 일부러 데리고 온 건 아니었다고 몇 번을 말합니까.”

“웃기지 마! 이렇게 타이밍 좋게 나선다고? 누가 봐도 뻔한 핑계를 대고 있잖아!”

윤주승은 우기기 시작했지만, 그 전까지 놈의 편을 들던 사람들도 전부 윤주승을 외면했다. 분위기가 윤주승의 편을 들 분위기가 아닌 것이다.

나는 왜 이렇게 흐름이 변했는지 대충 눈치챘다.

‘나랑 형 쪽이 확실히 강자로 보이니까 나서지 못하는 거겠지.’

게다가 [눈의 여왕]은 중간 보스다. 던전을 다 끝마친 것도 아닌 셈. 이 와중에 확실한 강자인 성훈 형의 눈 밖에 난다면 던전 클리어를 포기하든가 아니면 목숨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철저한 약육강식의 논리 때문에 결국 윤주승은 고립되어 버렸다. 놈도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이렇게 발악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결국, 윤주승은 한마디 더 하려 했으나 이번엔 성훈 형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보다, 제 동생 덕분에 목숨 구하셨으면 감사 인사가 먼저 아닐까요?”

“뭐, 뭐라고!?”

“그리고 이번 눈의 여왕을 잡아서 나온 아이템 배분도 동생이 우선권을 가지는 것에 불만은 없으시겠죠.”

“이, 이게…….”

“불만이 있으시면 여기서 확실하게 말해 주세요. 저도 더는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파티원분들 의견도 듣고, 다수결로 명백하게 가린 뒤에 던전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

결국, 윤주승은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형에게 반기를 든 멤버 중 가장 목소리가 크던 놈이 입을 다물자 파티는 한층 쾌적해졌다. 

단, 모든 것이 완전히 내게 좋게만 흘러간 것은 아니었다.

* * *

“잠깐 얘기 좀 해야지?”

윤주승을 제압한 뒤, 형은 나에게 무게를 잡고 단둘이서 얘기하자며 따로 파티에서 떨어져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갔다.

다행히 정말 단둘은 아니었다. 별로 도움 안 되는 마검, 이에레 녀석과 나 그리고 형 이렇게 셋이서 삼자대면을 하게 된 것이다.

이에레는 헤죽거리면서 나와 형을 번갈아 쳐다보는 등, 구경자 모드로 사람 열 받게 하고 있었다. 

나는 형 몰래 이에레에게 주먹을 흔들어 보였으나…….

“어떻게 된 거야?”

“……그게.”

형의 질문에 곧장 긴장하고 말았다.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한단 말인가. 사실대로 다 털어놓고 형에게 의견을 구할까, 하는 생각도 문득 해 보았으나 그런 내 속마음을 읽었는지 이에레가 곧장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주인이 솔직하게 말하자마자 저 괴물은 나를 파괴하려고 할걸? 일이 복잡해질 거야.”

‘그럼 뭐 어쩌라고.’

“우연히 얻은 스킬이라고 해. 그게 가장 나아. 성훈…… 저 녀석도 고대의 스킬에 대해서는 잘 모를 테니까.”

그래서 나는 마검의 조언에 따라 ‘일전에 마검을 봉인하다 얻은 스킬’이라고 형에게 둘러댔다. 

“그 스킬 이름이 뭔데?”

“그……. 이, 이에레.”

“이에레?”

“헤헤, 간지럽당.”

“으응…….”

나는 형의 눈을 피하며 대충 둘러댔고, 마검은 제 이름이 불리는 게 간지럽다면서 몸을 배배 꼬았다.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모습이었지만, 어쨌든 성훈 형은 내가 하는 말을 반신반의하긴 해도 믿어는 주었다. (사실 거의 안 믿는 것 같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어서 믿어 주려 애쓰는 것 같았다.)

형이 한참 침묵하다가 나에게 말했다.

“혼자 쌓아 두지 말고, 곤란한 일 생기면 꼭 말해.”

“…….”

그 말에 울컥할 뻔했지만, 결국 나는 다시 눈을 피했다. 

과거를 두 번 반복했으며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걸 어차피 말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말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래서 위험한 일 따위 하지 말고, 그냥 내 옆에 살아만 있어 달라고 하고 싶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형은 그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그 스킬, 뭔가 부작용은 없는 거야?”

형은 나에게 이에레, 즉 마검의 스킬 부작용에 관해 물었다.

나는 대답하기 전, 마검을 쳐다봤다. 마검이 씩 웃으면서 말했다.

“강한 적을 만나면 주인의 의식을 내가 통제하게 돼.”

“……뭐?”

그런 말은 없었잖아!

나는 나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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