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차 회귀자는 살고 싶다
86화
“물론, 주인에게 강요하는 건 아니야.”
마검은 얄밉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강요는 아니라고 하지만, 어디를 봐도 마검의 제안을 수용하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마검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았다. 나는 마검이 어떤 말을 꺼내기 전, 놈에게 확인을 받듯 재차 물었다.
“……정말 네가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거야? 다른 사람들의 희생 없이?”
“응. 모두 구할 수 있어. 주인이 끔찍하게 아끼는 형, 그리고 저 검은 단발머리, 그리고 유세림까지도.”
나로서는 선뜻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으나, 마검은 자신만만했다.
“나는 주인이 생기면 강력한 힘을 낼 수 있거든. 한성훈, 저 괴물보다도 더. 제약이 거의 사라지니까.”
“내가 죽은 후에 내 영혼을 먹는다는 건 뭔데?”
“내가 무슨 악마인 줄 아는가 본데, 주인이 뭘 상상하든 그런 끔찍한 게 아니야.”
마검은 내가 거의 다 넘어왔다는 것을 깨달은 듯 입가에 띤 미소가 더 진해졌다.
“확실하게 처리해 줄게. 나만 믿어.”
“…….”
“약속해. 주인에게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거야.”
입에 발린 말이라는 것쯤은 안다. 하지만 이게 아니라면 성훈이 형과 희도, 그리고 유세림을 구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마검의 발밑에서 새까만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폭풍 같은 바람이 마검과 나를 감싸 올렸는데, 옷자락이 미친 듯이 펄럭이는 와중에도 마검의 목소리만큼은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럼, [계약을 체결한다]. 계약자는 [한솔], 계약 기간은 [한솔]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계약 조건은 내가 [한솔]의 적을 해치우며, 모든 위험으로부터 [한솔]을 보호하는 것. 그 대가로 [한솔]은 내게 이름을 지어 주도록 한다. 그리고 [한솔]은 죽음 이후, 나에게 [한솔]의 영혼을 준다.”
나 역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나 싶어 고민했으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마검의 손이 내 오른손을 깍지 끼듯 붙잡자 마법진에서 기괴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승인. 인증. 완료. 서식이 다운로드 되고 있습니다. 허가받은 대상입니다.]
“좋아. 그럼, 내 계약자를 [인지]하였는가?”
[인지하였습니다. 이 계약은 승인된 계약임을 협회가 공인합니다.]
“주인, 계약에 동의한다면 고개를 끄덕여 줘.”
“…….”
나는 기실 지금 순간에도 고민했지만,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 속에서 나를 또렷이 쳐다보고 있는 마검의 두 눈동자를 쳐다보자 마치 홀린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고개를 끄덕였다.
마검이 기쁜 듯이 속삭였다.
“그럼, 이제 내 이름을 지어 줘.”
“……지금 당장?”
“응. 무엇이든 좋으니까.”
갑작스러운 요청에 막막해졌지만, 곧 마검의 발밑에서 읽을 수 없는 여러 문자가 밝게 빛나며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개중에서도 내가 읽을 수 있는 것이 몇 개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 에…… 레?”
“이에레라. 좋아.”
“어? ……이, 이걸로 좋은 거야?”
“그게 아마 이번에 내게 ‘부여된’ 이름일 거야. 앞으로 내 힘을 사용하고 싶을 때, 그 이름을 부르도록 해.”
마검은 간단히 말했고, 동시에 내 오른손 위에는 이에레의 이름으로 보이는 정체불명의 문자가 손목 위에 새겨졌다.
이어, 잠시 숨이 막히는 듯한 밝은 빛이 우리를 감쌌다. 나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
“이제 내 이름을 불러, 주인.”
그렇게 우리는 그 기묘한 공간에서 빠져나와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되었다.
마법진도, 폭풍우 같던 바람도, 기묘한 목소리도, 읽을 수는 없었지만 발음할 수 있었던 문자들도 전부 사라진 상태.
그리고 지금 내 곁에는 이상하게 전보다 반짝거리는 마검이 곁에 서 있었다. 이젠 ‘이에레’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마검이 말이다.
‘……괜찮을까.’
하지만, 고민은 오래지 않았다. 나는 권태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오만한 [눈의 여왕]을 올려다보았다.
저 몬스터를 죽여야 한다. 그래야, 그 발아래 있는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이에레].”
지킬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마검의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갑작스럽게 시야가 암전했다.
* * *
뚝. 뚝.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렸다. 고인 물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소리 말이다. 동시에 한기가 밀려들었다.
‘차가워…….’
개중 어디가 가장 차갑냐면, 바로 발이었다. 지금 나는 뭔가 눈 같은 것을 밟고 있는 것 같았는데, 발가락 사이사이가 시리고 이는 저절로 딱딱 떨렸다.
번뜩.
그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싶었다. 뭔가 시야가 높았기 때문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균형을 잡기 위해 다리를 넓게 벌렸다. 그러자 휘청하던 몸이 다시 단단히 자리를 잡나 싶었지만…….
퍼서석―!
발밑이 훅 꺼지면서 그것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내가 밟고 있었던 것은 녹아내리는 눈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나는 어쩔 도리 없이 추락했다.
“윽……!”
다행히도 추락하는 나를 밑에서 붙잡아 준 사람이 있었다.
단단한 품속으로 떨어져 내리면서 얼굴을 확인해 보았더니 성훈이 형이었다. 그런데, 형의 얼굴은 충격으로 굳어 있었다.
나 역시 성훈이 형이 왜 돌연 내 밑에서 나를 받아 주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놀라고 말았다.
“……형?”
형은 반사적으로 나를 받아 준 것인지 조금 휘청거렸다. 그리고, 안아 주면서도 무섭게 추궁해 왔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
“방금 네가 보여 준, 그 무위는…….”
“……뭐, 뭐라고?”
내가 무위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성훈이 형만 아니라, 내 곁에 다가온 사람이 또 있었는데…….
“정원 님?”
“…….”
정원 님이 무섭게 굳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계셨다.
“역시 마검을…… 완전히 봉인하는 데 성공하진 못한 것 같군요.”
“네?”
게다가 마검 이야기를 꺼내신 게 아닌가.
나는 그제야 성훈이 형과 정원 님이 굳은 표정으로 나를 보는 이유를 깨닫고는 탄성을 내뱉었다.
“……아.”
마검이 무슨 짓을 했구나!
그러면서 뒤를 돌아봤는데…….
“헉…….”
그곳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만한 표정으로 서 있던 [눈의 여왕]의 머리가 반쯤 녹은 채 잘려 있었다.
조금 전 나는 저 [눈의 여왕]의 뺨 위에 서 있다가 그것이 녹으면서 추락해, 형의 품속으로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너, 끝내주던데.”
그리고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내게 미소를 보내 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건 내 곁에 훌쩍 다가온 희도였다. 희도는 방금 전까지도 내 옆에 있었던 듯, 눈으로 젖은 어깨를 털어 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성훈이 형의 곁에 바짝 섰다. 나에게 말을 걸기 위함인 것 같았다. 나는 영문을 모른 채 희도를 쳐다봤다.
“그런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거냐.”
“아. 그, 그건…….”
나는 그제야 희도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를 깨닫고는 얼굴을 붉히며 설명하려고 했다.
“한솔 군의 실력이 아닙니다. 마검의 농간이죠.”
그때, 정원 님이 우리 사이로 끼어들며 더더욱 싸늘한 눈빛을 보내셨다.
성훈이 형이 그런 정원 님을 만류했다.
“마검에 홀린 게 아니야.”
정원 님은 형의 말에 발끈하신 듯 허리춤에 찬 검으로 손을 옮기셨다. 드물게 감정적인 느낌이 들었고,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아니라고? 하지만…… 너도 봤잖아. 확연히 다른 움직임도, 힘도. 네 동생이어서 감싸고 싶은 마음은 백번 이해하지만…….”
성훈이 형은 그런 정원 님과 조금 거리를 유지한 채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내 동생이어서 감싸는 게 아니야. 지금 한솔이한테서 마검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아.”
정원 님은 가느다란 눈으로 나를 살펴보셨다. 나는 저절로 긴장되어 정원 님의 시선이 훑는 자리마다 몸에 바짝 힘을 주게 되었다.
그런데…….
“마음에 들어, 주인님?”
“으악!”
갑자기 귓가에 마검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당연히 나는 펄쩍 뛰었고, 정원 님은 의심스러운 시선을 거두지 않으셨다.
“뭐야?”
“한솔아, 왜 그래?”
“……정밀 검사를 하기 전까진 마검에 홀리지 않았다는 말을 믿을 순 없을 것 같구나, 성훈아.”
나는 원망스러운 시선을 마검, 이에레에게 보냈으나 놈은 그저 히죽히죽 웃을 뿐이었다. 그 여전한 행태를 보면서 나는 안도인지 짜증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