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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86/104)

2회차 회귀자는 살고 싶다

85화

그렇게 말한 후, 마검은 잠시 내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투명한 끈 같은 것이 나와 내 복제품들의 머리 위에서 길게 늘어나 여왕의 왼손 다섯 손가락에 하나씩 매여 있는 것이 보였다.

여왕은 그 손가락을 마치 피아노 건반을 치듯이 허공에 톡톡 두드리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복제품들이 몸을 움직이면서 형과 유세림, 그리고 희도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나는 내 머리 위에 늘어진 끈을 어떻게든 떼어 내려고 애썼지만, 끈은 하늘하늘하게 움직일 뿐 떨어지긴커녕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마검이 내게 그것을 보여 주며 속삭였다.

“보이지?”

“이 끈, 끊어 낼 방법은 없어?”

“보이면 자를 수 있지.”

“그럼, 네가 세 사람에게 이걸 보여 주면…….”

“나를 볼 수 있는 건 주인뿐이야.”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속이 답답해져 왔다.

쨍강―!

사실, 여왕이 부리는 복제품들의 공격은 등급이 낮은 내가 보기에도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그러니 평소 같았으면 금방 제압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끈 때문에 내가 저 복제품들과 통각이 공유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성훈 형도, 유세림도, 희도도 복제품이 날뛰는 것을 간간이 막기만 할 뿐 전전긍긍했다. 공격이 아니라, 비무를 하는 판국이었다.

나는 속이 갑갑해져서 가슴을 퍽퍽 쳤다.

“네놈들 장난하는 거야, 뭐야!”

그때, 그런 모습을 참지 못하고 나선 사람이 있었다. 나는 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봤다가, 이내 인상을 찡그렸다.

윤주승이었다.

‘저 새끼가 왜…….’

놈은 언제 슬그머니 정신을 차린 건지, 지치지도 않고 나타나 또다시 주도권을 쥐려고 하는 꼬락서니를 보여 줬다.

내 예상대로 윤주승은 형을 비난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려 했다.

“빨리 끝내지 않고 뭐 하는 거냐, 한성훈! 몬스터랑 노닥거리려고 왔어?!”

‘젠장…….’

나는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수습하려고 애썼다.

그건 셋도 마찬가지였는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정신을 차린 윤주승은 그렇게 무시를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위인이 아니었다.

놈은 세 사람이 아니라, 물러서 있는 다른 파티원 들으라는 듯이 제 가슴을 팡팡 두드리면서 큰소리를 쳤다.

“별것도 아닌 몬스터 하나 못 잡고, 시간만 끌고 있는 거 보라고!”

“그, 그건 그래…….”

“왜 저러고 있는 거지?”

위험한 적을 앞둔 상황이라서일까. 윤주승의 말은 사람들에게 잘 먹혀들어 갔다.

[눈의 여왕]이 불러낸 복제품의 얼굴이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으나, 각자의 자리에서 무기를 들고 대기 중이던 그들의 표정에 슬슬 의아함과 불만이 떠오른 것이다. 

윤주승은 그렇게 분위기를 잡으면서 보란 듯이 제 무기인 기다란 봉을 들고 복제품을 후려쳤다.

퍽―!

나는 곧 닥쳐올 고통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지만, 예상했던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백희도? 네놈…… 커헉!”

희도가 윤주승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더구나 희도는 윤주승을 막아선 것에서 그치지 않고, 놈의 목을 붙잡기까지 했다.

“저, 저 녀석 지금 뭐 하는 거야!”

“같은 파티원끼리…….”

하지만, 그런 행동은 아무리 윤주승이 먼저 선을 넘었다 하더라도 전투 중에는 용납할 수 없는 짓이었다.

그러나 희도는 주변의 술렁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눈을 번뜩이며 기어이 윤주승이 기절할 때까지 목을 졸랐다.

“꽥!”

윤주승은 추한 비명을 내지르며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희도는 그런 윤주승을 마치 쓰레기라도 치우듯 땅바닥에 던져 버리고는 주변을 쓱 훑어봤다. 또 윤주승처럼 막무가내로 달라붙는 자가 있다면, 제 손으로 처리하겠다는 무언의 압박을 한 것이었다.

‘이 바보가……!’

나는 그런 희도가 고마우면서도 파티원으로부터 느껴지는 흉흉해진 시선들에 속이 갑갑해져 갔다.

챙! 챙! 챙!

또한, 점점 매서워지는 복제품들의 공격 때문에 신경도 더욱 곤두섰다.

“이런, 여왕이 슬슬 지겨워지나 본데.”

“……뭐?”

그런데 마검의 의미심장한 중얼거림 이후, 여왕이 가만히 서 있던 자세를 바꾸며 입을 열었다.

[지루하구나. 변주를 좀 줘 볼까.]

이어, 그녀는 마치 실뜨기를 하듯 양손 손가락을 포개었다.

그러자, 세 개의 복제품들이 한데 모여 뭉쳐지기 시작했다. 크기가 커진 것은 아니었으나, 세 개가 하나가 되자 느껴지는 기세가 더욱 강력해졌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세 개의 복제품은 온전히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내’ 모습을 한 그것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스피드로 빠르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합쳐졌다고 더 강력해졌다는 거야?’

나는 가장 먼저 유세림에게 달려드는 복제품을 바라보며 속으로만 불만을 터트렸다.

‘남의 얼굴은 왜 여전히 뻔뻔하게 빌려 쓰고 있는 거냐고!’

하지만, 달라진 것은 능력뿐만이 아니었다.

[네가 싫어, 세림아. 재수 없어.]

“…….”

복제품은 마치 내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투까지 교묘히 따라 했다. 유세림도 그것을 느꼈는지, 일순 혼란을 느끼는 것 같았다. 

유세림이 아주 잠시 머뭇한 동안, 복제품은 유연하게 허리를 꺾어 유세림의 오른쪽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유세림은 아주 가까스로 그를 막아 냈다. 그러나 그다음 공격은 양손을 모두 써서 막아 냈기 때문에 거의 피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쨍강―!

하지만 유세림은 공격당하지 않았고, 복제품이 들고 있던 무기는 땅에 떨어졌다.

[방해하지 마, 형. 유세림이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형은 모르잖아.]

“…….”

복제품이 의미심장하게 중얼댄 말에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입을 다물었다.

복제품이 들고 있는 것은 눈을 단단하게 굳힌 뾰족한 단검이었는데, 그것을 떨구어 낸 사람은 바로 뒤에 있던 성훈이 형이었다.

물론, 형은 유세림보다야 전투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복제품의 말에 일일이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일단 물러서는 게 좋겠다, 세림아.”

“……네.”

[형은 이번에도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선택했구나.]

복제품은 끝까지 이죽거렸으나, 성훈 형은 무시하려는 듯 무표정하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미간이 조금 구겨지는 것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나에게 파렴치한 짓을 한 놈에게까지 관대할 줄은 몰랐어.]

“……뭐?”

“뭐, 뭐라고?!”

“뭐?”

“무슨…….”

복제품이 한 말에 나를 포함한 네 사람은 모두 충격을 받았다.

물론, 나는 저 복제품이 그 일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에 대해 놀랐던 것이고, 나머지 세 사람은 설마 하는 쪽에 가까웠지만…….

성훈이 형은 반사적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듯, 살기 등등한 표정으로 바뀌어선 유세림을 쳐다봤다.

“……너, 내 동생하고 무슨 일이 있었어?”

“무슨 오해를 하시는 겁니까?”

유세림은 그런 오해를 받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는 듯한 어조였으나, 묘하게도 걸리는 게 있는 양 귀 끝을 빨갛게 물들인 채 시선을 피했다.

누가 봐도 수상한 모습이었다. 성훈이 형은 화가 난 표정으로 유세림을 노려봤다. 백희도는 거리가 좀 떨어진 유세림을 추궁하는 대신, 나를 쳐다봤다.

“솔아. 유세림이 너한테 무슨 짓을 했어?”

“……무, 무슨 짓을 했냐니…….”

그때의 일을 내 입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없던 일이기도 하고.

나는 치밀어 오르는 수치심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꾹 닫았다. 희도는 그런 나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으나, 뭐라 묻지 않았다.

내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마검만이 속살거릴 뿐이었다.

“나였으면 마디마디 잘라 버렸을 텐데. 주인은 참 관대해.”

‘저가 뭘 안다고…….’

나는 마검을 발로 툭 밀치고 못 들은 척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 이후로 우리 파티의 손발이 점점 안 맞기 시작한 것이다. 유세림과 성훈 형은 삐걱삐걱하는 듯싶더니, 점점 복제품의 공격을 허용하는 일이 잦아졌다.

나는 유세림의 몸에 차츰 붉은 실선이 늘어 가는 것을 보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이대로 가다간……!’

하지만, 언제나 미워하던 놈이었다. 놈이 수세에 몰리고 있다고 해도 내 입장에서는 초조함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그래. 잘 아는데…….’

그때였다.

휘익―!

갑자기 유세림을 공격하던 복제품이 돌연 단검의 경로를 틀어서 성훈이 형을 향해 검의 궤적을 변경했다.

눈으로 만들어진 몸이라서 그런지 상체를 180도 틀어도 무리가 없는 모양이다. 회심의 한 수였기 때문일까, 형은 거의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안 돼!”

이대로라면 형이 찔리고 만다. 나는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

그 틈을 파고든 사람이 있었다.

유세림이었다.

푹―!

“세림아!”

성훈 형도 당황한 듯 유세림을 불렀다. 

유세림은 오른손으로 얼굴 한쪽을 가렸다. 눈을 찔린 건지, 손 틈새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호오. 맛있는 피구나.]

[눈의 여왕]은 얇은 입술을 할짝대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 유세림을 찌른 복제품은 삽시간에 다시 둘로 나누어져 형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희도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나를 내버려 둔 채 형과 유세림이 있는 쪽을 향해 뛰어들어 갔다.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유세림과 그를 보호해야 하는 성훈이 형을 위해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걸 인지한 것이다.

“…….”

하지만 희도가 간다고 해도, 이 상황이 과연 개선될 수 있을까.

“윽…….”

나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면서 주먹을 꾹 쥐었다.

하필이면 내 얼굴을 한 적에게 찔리고 상처를 입어야 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갚아야 할 빚이 있는 유세림.

그때, 마검이 나에게 말했다.

“오직 주인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야.”

나는 고개를 들어 마검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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