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차 회귀자는 살고 싶다
81화
파사삭―!
이어, 유세림도 채찍을 휘둘러 성훈이 형의 등 뒤로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설녀를 반토막 냈다.
설녀는 조각나도 마치 얼음처럼 부서져 내리는 터라, 피 튀기는 다른 몬스터들에 비하면 덜 징그러웠다.
[후우…….]
“아아악!”
그러나, 설녀 역시 몬스터는 몬스터였다.
한 사람이 설녀의 입김을 맞자마자 비명을 지르면서 얼굴을 감싸 안고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엔 옅은 성에가 껴 있었다. 눈꺼풀을 감은 채로 얼굴이 굳어서, 찡그리지도 못한 채 비명만 질러 댔다.
“소리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
필구 형이 그런 파티원을 보면서 고함을 질렀다. 고통스러워한다고 그대로 두었다가는 피부가 찢어질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회복].”
파티의 후방에 있던 힐러 직업군이 나선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는 쓰러져 얼어 가는 사람의 곁으로 날듯이 달려와 그를 치유하고, 설녀들이 그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실드 마법이 걸린 듯한 팔찌를 내밀었다.
[후우우…….]
하지만 설녀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실드에 계속 입김을 불어 넣었다. 몬스터들은 본능적으로 약해진 적을 노리기 때문이다.
아티팩트라 할지라도 무적은 아니기 때문에, 실드는 연이은 공격에 깜빡거리면서 표면이 슬슬 갈라지고 있었다.
“빨리, 여기 지원해 주세요!”
힐러가 창백해진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후우우…….]
서걱―!
그때, 계속 입김을 불어 공격하던 설녀의 목이 비스듬하게 썰려 미끄러졌다.
그 뒤에 검을 들고 선 사람은 정원 님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설녀의 머리는 계속해서 입김을 불었으나, 곧 최후의 숨결을 끝으로 땅을 조금 얼린 뒤에 햇빛을 받은 눈처럼 녹아내렸다.
“목이 약점입니다.”
정원 님은 그렇게 말하면서 희도를 쳐다봤다. 희도는 곧장 그의 뒤를 따라 저를 포위하고 있던 설녀 네 마리의 목을 단번에 썰어 냈다.
‘멋지다…….’
나는 초승달처럼 반짝이는 희도의 검의 궤적을 보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휘익―!
유세림 역시 설녀의 목을 붙잡고 채찍으로 깨트렸다. 무기의 특성 때문인지, 유세림이 붙잡은 설녀들의 얼굴은 이리저리 박살이 난 상태였다.
‘본성대로네…….’
사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공격이었지만, 괜히 트집을 잡았다. 저 유세림에게 1초라도 감탄한 게 왠지 분했기 때문이다.
“저 채찍남 말이야, 싸우면서 점점 기량이 늘고 있어. 인간치곤 제법인데?”
이런 내 마음도 모르고, 마검은 내내 구경하고 있던 유세림의 활약을 입에 담았다. 나는 답하는 대신 머리통을 쥐어박으면서 놈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아아…….]
어쨌든, 선두에 선 사람들의 활약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서른이 훌쩍 넘어 보였던 설녀가 모두 쓰러졌다.
“움직이지 말고, 각자 자리에서 대기하세요.”
다만, 성훈이 형은 마지막 설녀가 쓰러진 이후에도 섣부르게 공략을 진행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쓰러진 설녀의 녹아내린 몸 아래에서 새파랗게 빛나는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준보스가 등장할 거 같은데?’
나 역시 다년간의 던전 경험으로 이게 썩 좋은 조짐이 아니라는 걸 파악했다. 유세림은 마법진이 있는 곳을 유심히 보더니, 곧 채찍을 좀 더 제 몸에 바짝 붙였다.
휘이이잉―!
아니나 다를까 몇 초 지나지 않아, 마법진에서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닥에 있던 작은 돌멩이들이 마치 파도에 휩쓸리듯 일정한 간격으로 중심에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 것도 동시였다.
“중간 보스 출연입니다. 뒤로 물러서세요.”
성훈이 형이 검게 물든 한 손을 앞으로 내밀면서 지시했다.
모두가 그런 형의 지시를 따랐다. 나 역시 선두 쪽 사람들이 뒤로 물러설 만큼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뒤로 갔다.
툭―.
그러다가 내 뒤에 있던 사람과 팔이 살짝 닿고 말았다.
“죄송…….”
“아이, 씨. 뭐야?”
물러서던 나와 닿은 건 윤주승이었다.
놈은 형의 지시를 따르긴커녕 가슴을 쭉 내민 채 제자리에서 버티고 서 있었다. 빤히 선두 쪽 사람들이 물러서는 모습을 보고도 뻗대고 있다가 나와 부딪힌 것이다.
놈은 저가 움직이지 않아 일어난 일임에도 뻔뻔스럽게 나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눈 똑바로 안 뜨냐?”
“물러서라는 말, 못 들었습니까?”
“……하. 이 새끼 말버릇 봐라? 내가 네 형 따까리로 보여?”
“…….”
나는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린 후, 놈을 피해 옆으로 비켜섰다.
윤주승은 그런 나를 보고 비아냥거렸다.
“제 형 믿고 한자리 차지하니까, 앞뒤 분간이 안 되나.”
“……뭐?”
“그만하시죠.”
어느새 다가온 정원 님이 아니었다면 당장 달려가 놈의 멱살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윤주승은 정원 님이 끼어들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죽거렸다.
“성훈이가 시킨 보모 노릇이 마음에 드나 보지?”
“공략 중입니다. 공사는 구별하셔야죠.”
“공사? 애초에 누가 먼저 공사 구별을 못 했을까? 응?”
“잘잘못은 던전 밖에서 따져도 되는 거 아닌가요?”
“내가 싫다면? 난 지금 따지고 싶은데?”
윤주승은 정원 님보다 (얼굴만 보면) 나이를 열 살은 더 먹어 놓고, 말꼬리를 잡으면서 계속 시비를 걸었다.
그러는 동안, 성훈이 형이 정면에서 대치하고 있는 마법진은 이미 범위를 넓혀 텅 빈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처음엔 싸늘하게 느껴지던 바람도, 이젠 입에서 김이 나올 만큼 이 공간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참이었다.
즉, 윤주승과 이따위 같잖은 일로 티격태격할 시간이 없었다는 뜻이다.
정원 님 역시 윤주승의 시비보다는 닥쳐온 몬스터의 소환에 더 주의를 기울이기로 하셨는지, 놈의 마지막 말에는 아예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싸가지 없기는…….”
윤주승은 입을 다문 정원 님의 뒤통수에 대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정원 님은 구태여 뒤돌아보지 않고 무시했다. 지켜보는 나만 속이 상할 뿐이었다.
“흐응, 재밌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검은 싱글벙글했지만 말이다.
“나옵니다.”
그러는 동안 마법진은 결국 완성이 되었고, 유세림과 희도는 성훈이 형의 등 뒤에 바짝 붙었다.
셋이 서 있는 곳이 몬스터가 등장할 때 가장 위험한 자리였다. 나는 새하얀 연기 속에서 거대란 그림자를 드리우는 몬스터를 보며, 울렁거리는 긴장을 참지 못하고 두 손을 꾹 붙잡았다.
‘제발, 다치지 않기를…….’
[누구냐……. 어떤 반역자가 감히 나의 공녀들을 건드린 것이냐.]
곧 안개가 걷히고, 모습을 드러낸 몬스터를 보며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눈의 여왕]
네임드 몬스터였다.
그녀는 몸체마저 몹시 거대했다. 게다가 대체 언제 공간이 왜곡된 건지, 동굴은 어느새 저 네임드 몬스터의 크기에 맞게 변화한 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마치 달빛처럼 반짝이는 긴 드레스를 입고, 고대 올림픽에서나 볼 법한 전차를 타고 있었다.
전차에 묶인 말은 뿔을 갖춘 얼음 몬스터였다. 저 말 역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윽…….”
“미친.”
“……저게, 뭐야?”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도 공포스러운 점은, 그 말이 얌전히 매여 있는 전차……. 그 전차의 겉을 꾸며 놓은 것들 때문이었다.
수십 마리의 아름다운 설녀. 아니…… 설녀들의 머리가 저 거대한 몬스터가 탄 고대 전차를 치장하고 있었다.
‘……대체 몇 미터지?’
나는 어림으로도 15미터는 훌쩍 넘어 보이는 거대한 크기를 보며 나도 모르게 이를 덜덜 떨었다.
[눈의 여왕]이 소환되며 낮아진 온도 탓인지, 아니면 거대한 몬스터가 주는 본능적인 공포 때문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주인, 진정해. 여차하면 내가 주인을 지켜 줄 테니까.”
마검이 그런 내 몸 상태를 읽은 듯,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손을 꽉 붙잡으면서 말했다. 우습게도 그 말에 조금 진정되긴 했다. 살짝 자존심이 상해서 금세 뿌리쳐 버렸지만 말이다.
“됐어! 누가 너 같은 걸…….”
“근데, 일단 이 자리에서는 벗어나자. 저 몬스터는 좀 위험하거든.”
“……뭐?”
마검의 말대로, 갑자기 확장된 이 공간에서 우리와 [눈의 여왕]의 거리는 지나치게 가까웠다.
성훈이 형 역시 이를 느꼈는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뒤로 물러서고 최대한 흩어져!”
존댓말도 생략된 급박한 외침이었다.
나는 형의 말을 듣자마자 온 힘을 다해 뒤돌아 뛰었다.
[어딜, 감히.]
[눈의 여왕]은 우리들의 움직임을 보곤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아아아…….]
[후우우…….]
동시에 전차에 매달려 있는 설녀들의 표정이 미소로 바뀌었다. 설녀들의 입에서 성에 낀 한숨을 새어 나오며, 전차는 신비한 눈가루에 휩싸였다.
[이랴.]
[눈의 여왕]은 바로 그 시점에서 쥐고 있던 투명한 채찍을 휘둘렀다. 유세림의 것과 생김새는 전혀 달랐으나, 얼음 유니콘들을 움직이게 하기엔 충분했다.
[히이잉!]
등에 채찍을 맞은 유니콘들은 앞발을 높게 치켜들곤 무서운 속도로 달려 나갔다. 크기부터 남다르기 때문인지, 먼저 도망치기 시작한 우리를 금세 따라잡았다.
“으아악!”
“이, 이러다 마차에 깔리겠어!”
그러나 모두가 도망쳐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성훈이 형이었다.
그그그극―!
형이 무슨 능력을 사용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손이 다시금 그림자처럼 새까매지자 여왕의 마차는 마치 투명한 벽에 부딪힌 것처럼 조금도 전진하지 못했다.
휘익!
그리고 두 마리의 유니콘 중 하나의 목에 검은 채찍이 휘감겼다. 유세림이었다.
푹―!
그 옆에 있던 유니콘의 머리 위엔 희도가 서 있었다. 희도는 무자비하게 유니콘의 까만 눈동자에 검을 쑤셔 넣었다.
[캬아아악!]
유니콘은 몬스터다운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마구 흔들었다. 당연히 전차도 비틀거렸다.
“지금이야!”
그런데, 그 뒤를 윤주승이 갑자기 끼어들어 덤비기 시작했다.
성훈이 형이 창백해진 얼굴로 외쳤다.
“안 돼, 아직 2페이즈가……!”
[후후……. 재미있구나.]
[눈의 여왕]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