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차 회귀자는 살고 싶다
78화
흠칫, 놀랄 만큼 강한 힘이었다.
“뭐야? 갑자기 왜……!”
나는 놀라서 유세림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마자 내 머리 위로 옷이 떨어져 내렸다. 희도가 챙겨 온 내 옷이었다.
“갈아입어.”
희도가 싸늘하게 말하면서 내 손을 잡아끌었다. 덕분에 유세림의 몸 위에서 재빨리 내려올 수 있었다.
어느새 마검도 본래 크기로 돌아와 있었는데, 놈은 엉거주춤하게 옷을 챙겨 몸을 가린 나를 보면서 말했다.
“주인, 쇄골까지 빨개졌어…….”
‘어쩌라고, 젠장…….’
너무 쪽팔려서 울적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재빨리 내게 옷을 준 희도 덕분에 싸늘한 기분을 오래 느끼진 않아도 됐다.
‘저 새낀 왜 아직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건데?’
그런데 내가 옷을 다 주워 입을 때까지도 아직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는 유세림을 보니, 눈이 곱게 떠지지 않았다.
“…….”
유세림은 옷을 다 챙겨 입은 나를 보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귀는 여전히 붉었다.
왠지 모르게 내 시선을 피하는 것 같은 낌새가 느껴졌고, 눈이 마주치자 애매하게 고개를 돌리는 태도를 보고는 확신할 수 있었다.
‘기분 나빠.’
나는 있는 힘껏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유세림이 내 얼굴을 똑똑히 보길 바라며 말이다. 하지만, 유세림은 별다른 말 없이 잠자코 있었다.
“왜 갑자기 커진 거지?”
그 와중에 희도는 내가 예상 시간보다 빨리 원상태로 돌아온 걸 의아하게 여기고 있었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약효는 24시간 동안 지속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분명 하루가 지나진 않았는데…….”
“혹시 내가 준 약, 다 마셨어?”
나는 희도의 물음에 약간 당황했다.
“아니? 한 모금만 마셨는데…….”
“그것 때문이었나.”
내 실수라면 실수였기에 곧장 나에게 화내거나 뭔가 한마디 할 줄 알았지만, 희도는 질책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저 좀 난감해 할 뿐이었다.
희도가 턱을 쓰다듬으면서 중얼거렸다.
“이제 널 어떻게 숨기지? 그 물약은 1회성이라, 다신 사용 못 해.”
“그, 그런 거였어?”
그제야 멍하니 있던 유세림이 나를 쳐다봤다.
“어차피…… 이미 던전에 들어온 이상, 성훈 님도 바로 돌려보내진 못할 겁니다.”
유세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리가 있던 곳 뒤에서 어떤 사람이 툭 튀어나왔다.
“유세림 씨, 백희도 씨, 식사하셔야죠? 다들 모여 있는…… 어?”
식사 시간이 되어 둘을 찾으러 온 다른 파티원이었다.
그가 낯선 나를 보고 당혹스러워했다.
“……이, 이분은 누구시죠?”
“…….”
나는 이미 망했구나, 생각했고 둘도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백희도가 나서서 대답했다.
“제 동료입니다.”
“……네?”
파티원은 당연히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희도가 그 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허락을 받지 않고 데려와서…… 말을 못 했어요.”
“허, 허락 없이 데려왔다구요?”
파티원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나와 희도를 번갈아 쳐다봤다. 나는 이 사건을 책임지려는 듯한 희도의 태도에 놀라, 서둘러 앞에 나섰다.
“그, 그게 아니라, 희도는 제가 도와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아까부터 너희만 따로 다니던데, 뭐 재밌는 일이라도 있―?”
그때, 파티원의 뒤에서 불쑥 성훈이 형이 나타났다.
형은 웃는 낯으로 희도와 유세림을 찾으러 왔다가…… 나를 보자마자 그 상태로 굳어 버렸다. 마치 고장 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성훈이 형은 곧 정신을 차리고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었다. 형이 지옥에서 올라온 것 같은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한솔, 너 설마…….”
나는 그런 형의 모습을 보면서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 * *
“……믿을 수가 없네.”
성훈이 형은 취침용으로 만든 텐트에 나와 유세림, 그리고 희도를 불러들이고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두통이 치민다는 듯이.
“…….”
침묵이 감도는 건 이곳뿐만이 아니었다.
밖에서도 허기를 자극하는, 막 끓인 음식 냄새가 났으나 내가 몰래 따라 들어온 초유의 사태 때문인지, 대화 소리는커녕 달그락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텐트 밖의 사람들도 이쪽 사정에 몰래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게 느껴진다고 할까.
“내가 안 된다고 한 말이, 농담 같았어?”
성훈이 형은 화가 나면 날수록 차분해지는 편이다. 그런데 지금 형은 아주 소름 끼치게 차분한 태도였고, 그 말인즉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
성훈이 형의 싸늘한 시선을 받은 나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항변한들 형 입장에서는 받아들이지 못할 소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여기서 너 지켜 가면서 탐사할 인력 없어. 나도 무리야. 네가 생각없이 한 행동 한 번에, 지금 파티 분위기가 어떤지 알아?”
성훈이 형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를 강하게 질책했다.
형이 한 말이 어떤 뜻인지 안다. 그리고 민폐를 끼쳤다는 것도 잘 알기 때문에, 잠자코 듣기만 했다. 딱히 마음에 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 말을 같이 듣고 있던 희도가 갑자기 말대꾸했다는 게 문제였다.
“제가 지켜 주면 되잖아요.”
“……뭐?”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희도는 텐트에 들어올 때부터 약간 불만 어린 표정이었는데, 이런 분위기 자체가 탐탁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성훈 형 말은 어느 정도 고분고분 듣던 편 아니었나?
나는 황당한 심정으로 희도와 형의 대립을 지켜봤다. 성훈 형이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짓더니 물었다.
“네가 그렇게 자신할 만한 실력은 되고?”
희도가 미간을 팍 찡그리곤 도전적인 눈빛으로 형을 쏘아봤다.
“처음 데려올 때부터 책임질 생각으로 데려왔다는 뜻인데요.”
초등학생만도 못한 주장을 펼치는 희도를 가만히 쳐다보던 성훈이 형은, 잠시 골이 아픈 듯 눈을 감았다.
“그래……. 한창 개소리하고 다닐 나이긴 하지.”
그 빈정거림에 발끈한 희도가 뭔가 말하려 했지만, 다행히 유세림이 희도를 꽉 붙잡았다. 그리고 형은, 그를 붙든 유세림을 보고도 짜증을 참지 않았다.
“유세림, 그래도 너는 앞뒤 분간쯤은 할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유세림이 당연히 본인은 몰랐던 일이라고 대답할 줄 알았다. 하지만 놈은 고개를 조금 숙이며 순순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한솔 씨는 제가 백희도랑 같이 잘 돌보겠습니다.”
이로써 셋이 짜고 이곳에 들어온 게 확정된 셈이었다.
나는 약간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유세림을 쳐다봤는데, 놈은 죄송하다고 말한 것치곤 꽤 뻔뻔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성훈이 형도 유세림이 전혀 반성하고 있지 않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형은 나와 희도, 그리고 유세림을 한 명씩 쳐다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다시 되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지.”
“…….”
형에겐 미안하지만, 예상대로 돌아가는 상황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이후, 형은 나를 다시 쳐다보면서 냉정히 말했다.
“하지만 내 파티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어야 해. 한솔, 너는 전투에 적합하지 않으니까 앞으로는 후방에서 이동하고 파티의 식사 준비와 그 뒤처리를 도맡도록 해.”
“그…….”
“싫으면 이 장소에 베이스캠프를 만들고, 널 여기에 묶어 둘 생각이야. 이번엔 절대 실수하지 않아. 더는 널 믿지 않으니까.”
나는 성훈이 형의 싸늘한 얼굴을 보며 더는 조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알았어.”
“셋 다 나가.”
형은 그렇게 말한 뒤, 아예 등을 돌려 버렸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튀어 나가는 두 사람을 따라 어색하게 텐트를 나섰다.
“주인, 한성훈이 주인을 무섭게 주시하고 있어. 기감 전부를 주인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 같은데?”
“…….”
마검은 성훈이 형을 몹시 의식해 왔기 때문인지 계속 등 뒤를 힐끔거리면서 나에게 조잘거렸다.
나는 못 들은 척하면서 뒤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했다.
* * *
“결국 따라왔네요.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니.”
다행히 형을 더 의식할 필요 없이, 식사 자리에 계시던 정원 님이 우리를 향해 다가와 말을 걸어 주셨다.
의외로 정원 님은 크게 화난 기색이 아니었다.
“……죄송해요.”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성훈이 말을 안 따른 거지, 내 말을 무시한 게 아닌데.”
정원 님은 기죽은 나를 토닥이면서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희도와 어딘가 멍해 보이는 유세림까지 챙겨 주셨다.
그의 손에 이끌려 식사 테이블에 가까이 다가가자, 파티원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훈이 동생이라고?”
“반가워요.”
“자리 좀 만들어 봐. 좀 더 붙어 앉자고.”
대다수는 그저 내가 성훈 형의 동생이라는 사실 때문에 호의적인 것 같았다. 물론, 형이 원해서 온 게 아니라는 것도 눈치챈 듯싶긴 하지만 말이다.
“……감사합니다.”
“쯧.”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나는 대놓고 혀를 차는 한 사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 사람은…….’
익숙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