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차 회귀자는 살고 싶다
77화
“…….”
“괜찮아, 주인. 잘 어울려.”
“닥쳐.”
마검이 내 꼬락서니를 보면서 비웃었다. 나는 놈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렇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요정 여왕의 드레스를 입게 되었다.
희도가 “그럼 계속 알몸으로 다닐래?”라고 묻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실제로 이것 말고는 현재 입을 수 있는 옷이 없었기 때문이다.
“…….”
나는 피부에 스치는 부드러운 드레스를 당장 내던지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짐짓 태연한 척했다. 희도와 유세림, 이 두 녀석이 놀리는 데 휘둘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두는 왜 안 신습니까?”
하지만, 다짐이 무색하리만큼 유세림이 희도의 손바닥 위에 크림색 하이힐을 살포시 놓아두면서 묻는 말에 입술이 저절로 앙다물어졌다.
“…….”
희도가 그런 내 표정을 보곤 웃음을 참는 듯한 말투로 대꾸했다.
“뭐, 얘가 따로 걸어 다닐 일은 없잖아.”
“드레스랑 세트인데요.”
“사이즈가 안 맞나 보지.”
“들어갈 것 같은데.”
“절대 안 신을 거니까, 당장 치워!”
결국 폭발해서 구두를 발로 차 버리자, 유세림이 아쉽단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러곤 긴 손가락을 뻗어선 내 볼을 슬쩍 문질렀다.
“삐졌습니까?”
“만지지 말라고!”
아까 옷을 갈아입혀 줄 때도 그렇고, 이 새끼가 너무 스스럼없이 구는 게 안 그래도 짜증 났던 터다.
그런데 유세림은 이번만큼은 내 말에 얌전히 따르지 않았다. 놈은 내 머리를 문지르면서 큭큭거리고 웃었다. 놈에게는 작은 소리여도 내게는 크게 울렸기 때문에, 그 비웃음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너……!”
“인형엔 큰 관심 없었는데……. 이런 재미로 수집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눈초리를 휘며 웃는데, 나는 분하고 어처구니없는 상황과는 별개로 유세림이 저렇게 웃는 얼굴은 처음 봐서 좀 얼떨떨했다.
“야, 그만 놀려.”
그리고 희도는…… 옆에서 실컷 웃거나 유세림을 한껏 부추겨 놓고는 이제 와서 나를 제 손에 꾹 감싸 쥐는 등 내 편을 들어 주는 척했다.
나는 가증스러운 희도를 올려다보면서 미간을 구겼다.
“너도 똑같아…….”
그러자 희도가 한마디 하려는 것처럼 입을 열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불쾌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몬스터 특유의 체취였다.
“이건…….”
“소매에 들어가 있어.”
희도 역시 그 움직임을 눈치챘는지 나를 제 소매 틈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유세림은 이미 채찍을 허리에서 끄른 상태였다.
“시간을 너무 지체한 것 같네요.”
유세림은 마치 즐겁게 놀았다는 양 말했다. 나는 발끈할 뻔했지만, 허공을 찢는 채찍 소리가 들리자마자 입이 저절로 꾹 다물어졌다.
그때, 등을 쿡 찌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마검이었다.
“주인. 드레스에 달린 날개, 움직일 수 있는 거야?”
“못해. 그리고 할 수 있어도 안 할 거야. 젠장…… 내가 무슨 잠자리인 줄 알아?”
애꿎은 신경질은 눈치 없는 마검을 향해 퍼부어졌다. 물론, 마검 녀석은 개의치 않았지만.
퍽―!
서걱.
곧, 몬스터와의 전투가 이어졌다.
유세림 쪽은 모르겠는데, 희도는 왠지 설렁설렁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아까보다 훨씬 멀미가 덜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 10분 정도가 지났다.
피 냄새와 몬스터의 체취가 뒤섞여서 약간 토할 것 같을 때쯤, 동굴 안을 기어 다니던 소리가 전부 사라지고 희도도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나는 소매를 슬쩍 걷고 안을 쳐다보는 희도와 눈이 마주쳤다.
“괜찮아?”
“어.”
그리고 뒤늦게 다가와 같이 나를 내려다보는 유세림의 시선과도 마주쳤다.
“일단, 파티에 다시 합류부터 하도록 하죠.”
놈은 제멋대로 희도의 소매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더니, 내 머리를 콕콕 찌르며 말했다.
나는 유세림이 불쾌하게 찝쩍거리는 게 아주 못마땅하여 놈의 손가락을 깨물기도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움찔 놀라는 것도 잠시, 어째 계속 찔러 대는 것이다. 마치 한 번 더 물어 달라는 것처럼…….
“아오, 짜증 나!”
결국, 나는 똥은 더러워서 피한다는 마음으로 소매 구석을 향해 더 기어들어 갔다. 희도가 움찔하는 것 같긴 했지만, 막지 않기에 나는 유세림이 손을 넣지 못하는 깊이까지 희도의 팔을 타고 올라갔다.
마검이 그런 내 뒤를 따라와서는 기어코 성질을 긁는 말을 했다.
“새끼 고양이한테 물린 기분 아닐까?”
“넌 대체 누구 편이냐? 유세림하고 계약했어?”
내 빈정거림에도 마검은 천진난만하게 대꾸했다.
“아니? 나는 주인하고 계약만 하면 전적으로 주인 편이지. 그리고, 유세림은 주인에 비하면 너무 평범한걸.”
나는 마검의 말을 듣다가 약간 떨떠름한 기분에 되물었다.
“……내가 아니라, 유세림이 평범하다고?”
“응. 둘을 비교하자면 그래.”
마검의 대답을 들을수록 아리송한 기분을 느꼈다.
물론 나는 유세림을 싫어하고, 놈보다야 내가 훨씬 나은 인간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능력치로 따졌을 때는 도무지 정신 승리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 비교 대상이 나라니?
‘마검의 ‘쓸모있는 인간’ 기준은 대체 뭘까?’
나는 내게 찰싹 달라붙어서 볼을 비비려고 드는 마검을 밀어내며 쏘아붙였다.
“유세림 등급이 뭔지는 알고 하는 말이야?”
“전투 능력? 그런 게 왜 중요해?”
“그럼, 던전을 들락거리는데 전투 능력이 안 중요하냐?”
“주인하고 계약하면 전투는 내가 할 테니까, 별로 상관없지.”
마검은 당연하다는 양 그렇게 대꾸했고, 나는 잠시 말문을 잃었다.
‘……이거, 은근히 저가 유세림보다 더 세다는 말 아닌가?’
물론, 마검은 내게 유세림을 압도할 만한 힘을 보여 준 바가 없다. 사실 마검과 계약하지 않는 이유에는 내가 보기에 마검이 그다지 세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마검과 더럽게 얽히기 시작한 동굴에서 보여 준 무력 정도로, 놈이 유세림을 평가할 실력이 되는 걸까?
내가 아는 유세림은…….
‘그 정도 레벨이 아닌데.’
나는 과거, 유세림의 움직임을 떠올리면서 약간 불쾌감을 느꼈다.
왜냐면 전투하는 놈의 모습을 기억해 내면 언제나 희도의 최후까지 기억이 이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희도의 따끈한 체온을 느끼며 머리를 흔들었다.
‘……재수 없는 생각은 그만하자.’
그러는 동안 희도와 유세림은 무사히 파티에 합류한 듯했다.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두 분은 대체 어디에 가셨던 겁니까?”
정원 님이 놀란 듯 물어보고.
“괜찮은 거지? 다친 곳 있나?”
걱정 어린 성훈이 형의 목소리도 들렸다.
“괜찮습니다.”
“괜찮아.”
유세림과 희도는 간단히 대답하고는, 조금 으슥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희도가 이제 밖으로 나와도 된다는 듯 내 몸을 부드럽게 쓸었다.
하여, 나는 팔 틈새로 천천히 기어 나왔다.
아니, 나오려고 했는데…….
“우쭈쭈, 나오세요.”
“너 그건 또 무슨 개짓거리야!”
유세림이 갑자기 혀를 차면서 동물을 꾀어내는 듯한 소리를 낸 것이다.
왈칵 짜증이 나서 유세림의 손가락을 쳐 내려고 했으나, 그보다 유세림이 더 빨랐다. 놈은 나를 그악스레 잡아서는 제 손에 옮겼다. 희도가 미처 제지하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였다.
“싫어하잖아. 놔둬.”
희도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하지만, 눈치 없는 유세림 새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 싫어하는 거죠? 아프게 잡지 않았습니다만.”
“네가 싫다고!”
나는 유세림의 손 위에서 놈에게 마구 화를 냈고, 유세림은 그런 나를 보면서도 꾸역꾸역 내 머리에 손을 올렸다.
놈은 진절머리 내는 내게 제 행동을 설명하려고 들었다.
“아까는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화를 낸 겁니다. 지금은 제가 준 드레스를 입어서 방어력도 올라간 상태고…… 또 귀여워요.”
“닥쳐! 너 귀여우라고 입은 거 아니―.”
한껏 화를 내는 순간, 갑자기 머리끝까지 열이 치솟는 느낌이 들었다. 빙글, 시야가 어지럽게 느껴지기 시작했기에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부우욱―.
그러나 내가 미처 어떤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드레스가 쭉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야!”
바로 뒤에 있던 희도가 내 팔을 꽉 붙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나는 삽시간에 내 몸 아래 깔려 버린 유세림을 내려다봤다. 유세림은 약간 충격 받은 얼굴로 나를 멍청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어?”
나 역시 당황스러웠다. 아까까지만 해도 거인 같던 유세림이 내가 알던 평범한 사이즈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즉…… 물약의 효과가 다해 내가 본래 크기로 돌아온 것이다.
“……!”
그것도 알몸으로.
나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입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 유세림은 귀 끝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내 허리를 붙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