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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77/104)

2회차 회귀자는 살고 싶다

76화

이대로 떨어지면 최소 뇌진탕이었다.

“주인!”

마검도 놀란 듯 팔을 뻗었지만, 나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탁.

누군가, 나를 쥐었다.

“……!”

단단하긴 했으나 땅바닥처럼 딱딱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큰 충격을 면할 수 있었지만, 어딘가 느낌이 이상했다. 

나는 감았던 눈을 뜨고 내 주위를 둘러봤다.

“이게, 대체 무슨…….”

그리고 나를 쥔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불행히도 나를 구한 사람은 희도가 아니라 유세림이었다. 한쪽 무릎을 꿇어서 가까스로 나를 낚아챈 듯한 유세림은 드물게 눈을 크게 뜨고, 충격 받은 표정을 한 채였다.

뒤늦게 다가온 희도가 나를 빼앗으려 했으나, 유세림은 훌쩍 뒤로 물러서서 나와 희도를 번갈아 쳐다봤다.

“……진짜 한솔 씨입니까?”

“…….”

“이리 내놔.”

나는 대답 대신 입을 다물었고, 희도는 초조한 표정으로 유세림을 닦달했다. 

하지만 유세림은 나를 손에 꽉 쥔 채로 여전히 말이 없었다. 살짝 벌어진 입만이 그의 충격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었다. 

유세림은 몇 초간 나를 빤히 주시하다가 희도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여기가 대체 어디라고 이런 꼴로 한솔 씨를 납치한 겁니까!”

“내가! 내가 데려가 갈라고 조른 거야! 희도가 한 게 아니라……!”

유세림이 희도에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자마자 트라우마가 자극되었다. 놈이 희도를 향해 적의가 담긴 시선을 보내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끼어든 나를 보면서도 유세림의 인상은 펴질 줄 몰랐다.

“해 달라고 한들, 상황도 분간하지 못하는 게 말이 됩니까?”

그 살기 띤 말을 듣고도 희도는 아무렇지 않게 다가왔다. 그러곤 빈정거리듯 말했다.

“어차피 데려온 거, 어쩔 수 없잖아.”

“이러다 죽, 아니, 다치기라도 하면…….”

“네가 지금처럼 계속 터질 듯이 쥐고 있으면 죽을 수도 있긴 하겠지.”

유세림은 희도의 말을 듣고, 그제야 꽉 쥐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여전히 유세림은 나를 희도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내놔.”

희도가 미간을 찡그리면서 손을 뻗었다. 유세림은 그런 희도의 말을 씹고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제야 내가 떨어진 충격 때문에 손수건도 없이, 알몸으로 덜렁 놈의 손에 붙들려 있다는 것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하여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다소곳하게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유세림은 그런 나를 꼭 몬스터 보듯이 훑어봤다. 징그러워하는 건지 경계하는 건지 모를 시선이었다.

게다가 훑어보는 데서 멈추지도 않았다. 유세림이 결심한 듯 말했다.

“한성훈 님께 데려가겠습니다.”

“싫어!”

나는 곧장 발작하듯 소리쳤고, 유세림은 그런 나를 내려다보았다. 짜증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말이다.

“이 꼴로 계속 있겠다는 겁니까? 여기가 어딘지 몰라서 그런 소릴 해요?”

“어차피 조금 있으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그리고, 이 모습을 선택한 건 나라고! 희도가 나를 억지로 이렇게 만든 게 아니란 말이야.”

나는 이게 설득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했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올려다본 유세림의 밝은 눈동자 속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선명한 분노를 마주하며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니까, 대체 왜 이런 짓을 했냐고 묻지 않습니까. 제가 붙잡지 못했으면, 조금 전에 머리 터져 죽었을 거라고요.”

목소리를 한층 낮췄음에도 등골에 소름이 끼친 것은 유세림이 분노를 숨길 생각이 없기 때문이리라.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파들파들 떨었다. 

그때, 마검이 곁에서 종알거렸다.

“이 남자…… 지금 완전 겁먹었네.”

“…….”

뭔 개소리를 하는 거지? 싶었지만 마검은 한가롭게 내 곁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도움은 뒤에서 왔다.

턱―!

희도가 유세림의 손목을 꽉 붙잡은 것이다.

유세림은 희도의 손을 치워 내려고 했지만, 희도가 더 빨랐다. 희도는 서슴없이 다른 한 손으로 유세림의 목을 꽉 붙잡았다.

목이 졸리는 와중에도 유세림은 침착해 보였는데, 나를 쥐고 있던 손아귀의 힘은 서서히 빠지고 있었다.

“희도…… 유세림, 너도 제발 그만…….”

나는 험악해진 분위기에 둘을 만류했고, 희도는 그제야 목을 죄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면서도 재빨리 나를 제 손으로 앗아 가는 것은 잊지 않았다.

유세림은 분을 못 이긴 듯 눈동자가 붉어졌으나,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그의 무기인 채찍 손잡이 위로 한 손을 옮겨 두기는 했다. 여차하면 검을 뽑을 듯한 건 희도도 마찬가지였다.

“……이 던전에, 형만 보낼 수가 없었어.”

나는 그런 유세림을 보면서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놈이 내 말을 듣는 건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형도 클리어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너도 알 거 아니야…… 나, 나한텐 어쩌면 형이랑 마지막으로 보는 걸지도 모르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레 유세림을 쳐다봤다.

살기가 뚝뚝 흐르던 그의 얼굴에서 점차 표정이 지워져 갔다. 나는 그 모습에서 놈이 조금씩 이성을 되찾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최대한 호소하듯 말했다.

“어쩌면, 형한테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어. 아무리 숨어들기 위함이라지만 위험하게 이 꼴로 온 건 인정해. 하지만…….”

“…….”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고.”

유세림은 그 말을 끝으로 천천히 채찍 손잡이에 올려 두었던 제 손을 내렸다. 희도 역시 자세를 풀었다.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유세림을 쳐다보기만 했다. 유세림은 눈을 내리깐 채로 별말이 없었다.

“후…….”

그리고 약 1분 뒤, 짧게 한숨을 내쉰 유세림이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언제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겁니까.”

“내일이면 멀쩡해져.”

그 질문에 답한 사람은 희도였다. 마검은 옆에서 아쉽다는 듯 말했다.

“내일이면 주인의 귀여운 모습을 볼 수 없는 거네.”

나는 대꾸하는 대신, 마검의 허벅지를 꽉 꼬집었다. 마검은 여전히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얼굴로 쿡쿡 웃기만 했다.

“내일까지, 저 끔찍한 모습으로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마검과는 상반된 평가를 내린 유세림이 스산한 얼굴로 나를 훑어봤다. 희도는 그런 내 몸을 제 손으로 가리고는 말했다.

“이게 끔찍해? 좀 귀엽지 않나.”

“……무, 뭐?”

뜻밖의 말에 놀라 올려다보니, 희도는 ‘말실수를 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상황과 맞진 않지만…… 희도가 나를 진심으로 귀엽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자 약간 볼이 빨개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를 가르고 유세림이 단호하게 말했다.

“여차하면 밟혀 죽을 크기인데 당연히 끔찍하죠. 원래 크기여도 모자랄 판 아닙니까.”

실력을 무시하는 듯한 말에 발끈했지만, 유세림의 기준에선 내가 약한 게 맞기 때문에 별수 없었다.

희도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약간 골치 아프다는 식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하긴, 방어구도 입혀 둘 수가 없으니…….”

그러다 내가 현재 알몸이라는 것을 인식했는지 희도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나는 살짝 죽고 싶어졌다.

“……옷…… 같은 거, 없냐?”

“손수건도 아까 잘려서…….”

희도는 말끝을 흐렸고, 나는 절망스러웠다.

“…….”

유세림도 그제야 내 해괴한 꼴이 눈에 들어온 듯했다. 녀석이 내게 성큼 다가왔고, 이번에는 희도도 가만히 있었다.

유세림은 손가락 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제 손을 나에게 들이밀었다. 피하고 싶었지만, 결국 볼에 유세림의 손가락이 닿았다.

“……뭔데?”

“…….”

유세림은 뚱한 표정으로 내 볼을 쿡 찌르다가 이어 머리도 꾹 누르기 시작했다.

나는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으나, 어째선지 희도도 유세림을 방해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마검은 숨죽여서 키득키득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기, 유세림. 장난…… 치는 거야?”

“아뇨.”

유세림은 즉답했지만, 나로서는 놈이 내 머리카락을 슬쩍 당겼을 땐 진짜 짜증이 났다. 있는 힘을 다해 손가락을 쳤으나, 당연히 씨알도 안 먹혔다.

곧, 유세림은 나를 만지는 것을 그만뒀다.

“혹시, 페어리 랜드 물약을 마신 겁니까?”

그러곤 꽤 정확한 추측을 했다.

“너도 다녀와 봤냐?”

희도의 말에 유세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얻은 게 있을 텐데……. 잠시.”

유세림은 인벤토리를 열더니, 뭔가를 검지 손가락과 엄지 손가락 사이에 끼워서 들이밀었다. 

나는 그 천쪼가리를 보고 불길한 예감에 눈을 크게 떴다.

“요정 여왕의 드레스입니다.”

유세림이 뭔가 뿌듯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걸 본 희도는 감탄하듯 말했다.

“괜찮네.”

“안 괜찮다고!”

결국, 나는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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