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6/104)

2회차 회귀자는 살고 싶다

75화

‘만져 보라니? 미쳤어?!’

나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처지가 처지이니만큼 숨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몇 초간 침묵이 흘렀다.

“아뇨. 그냥 꿈지럭거리는 게 거슬려서 물어본 것뿐입니다.”

유세림은 싸늘한 말투로 쏘아붙이고는 희도에게서 멀어진 것 같았다. 희도는 유세림의 발걸음이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미친놈……. 눈치 뭐야?”

“…….”

그러곤 소매를 좀 걷어선 나를 확인했다.

나는 갑갑하던 손에서 벗어나, 희도의 소매 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괜찮냐?”

“으응…….”

손수건을 여미며 말하자, 희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마치 뭔가 찾는 것처럼 훑어보는 시선에 볼이 살짝 상기되었을 때쯤, 희도가 갑자기 내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누군가 접근한 듯했다.

“잘 왔어.”

“……!”

성훈이 형이었다.

다행히 성훈이 형은 유세림과 달리, 희도가 소매 안에 뭔가를 넣어 왔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형은 희도에게 이런저런 던전에 관한 정보를 알려 주고는 마지막으로 당부하듯 말했다.

“최대한 방어력에 집중한 아이템으로 준비해 줘.”

그 말에 희도는 고개를 끄덕인 것 같았다. 용무는 그게 끝이라는 듯 형은 막 뒤돌아 가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한솔이는…… 별말 없었어?”

나는 혹시나 들킨 것일까 봐 숨을 참았고, 희도가 내 머리를 누른 손가락에도 약간 더 힘이 들어갔다.

“별말 없던데…….”

“그래? 이따 보자.”

그렇게 성훈이 형까지 주변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희도는 나를 부드럽게 쥐고는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다. 

희도가 나를 살펴보는 것이 느껴졌다. 녀석은 퉁명스럽지만, 은근히 다정함이 느껴지는 질문을 던졌다.

“목 안 마르냐?”

그 질문을 받고 나니 갑자기 목이 타기 시작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라…….”

“자.”

희도는 생수병 뚜껑에 물을 담아서 내게 주었다. 나는 그것을 두 손으로 들고 마셨다.

마검이 그런 나를 보며 짓궂게 중얼거렸다.

“주인, 가슴이 훤히 보여.”

“컥! 커컥…….”

잘 마시던 중, 마검이 한 말에 동요하여 컥컥거리면서 물을 뱉었다. 하필이면 뚜껑도 놓쳐서 땅바닥에 굴러다니게 됐다.

“물도 제대로 못 마시네.”

희도는 그런 나를 보며 혀를 쯧쯧 차더니 손가락으로 등을 꾹 눌렀다. 나는 코가 빨개진 채로 고개를 흔들었다.

“돼, 됐어…….”

그러면서 옆에서 나를 구경하고 있는 마검을 노려봤다. 마검은 내 살기 어린 눈빛을 받고도 헤실헤실 웃을 뿐이었다.

“더 마실 거야?”

“……아니.”

“배는 안 고프냐?”

“…….”

지금은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지만, 던전에 들어가서도 여유가 있을지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희도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인지 인벤토리를 뒤적거리더니 작은 초콜릿 하나를 꺼내 들었다. 

물론, 희도에게는 한입에 털어 넣을 만큼 작지만, 내게는 쌀가마니처럼 컸다. 희도는 그 초콜릿을 포장지째 부숴서 내게 주었다.

“…….”

문제는 몸이 작아진 만큼 초콜릿의 맛이 너무 강렬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끔찍하게 강한 단맛 때문에 순간 정신을 잃을 뻔했지만, 별수 없었다. 나는 죽을상을 하고 초콜릿 조각을 야금야금 먹었다. 

그리고, 희도는…….

“……왜?”

“뭐?”

“아, 아니……. 계속 쳐다보길래.”

“내가 언제?”

“……미안.”

내가 먹는 모습을 빤히 지켜봤다.

분명히 머리 위에서 무시할 수 없는 시선이 느껴지고 있는데도 희도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고 거짓말했다.

“주인한테서 눈을 못 떼고 있어.”

“…….”

마검 역시 희도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고 알려 왔다. 하지만 따져 물을 용기는 없었기에, 얌전히 초콜릿만 먹었다. 

쪼르륵.

결국 입안이 온통 얼얼한 단맛에 초콜릿을 먹다 내려놓자, 희도는 다시 주워 온 물 뚜껑에 물을 담아 주었다. 나는 그것을 꿀꺽꿀꺽 마셨다.

“엉덩이 보인다.”

“무, 뭐!?”

그러다 뚜껑을 집으려고 손수건 틈에서 일어났더니, 희도가 무심한 말투로 수치스러운 소리를 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다시 주저앉았고, 희도는 누가 봐도 놀리는 게 분명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놀리지 말라고…….”

내 작은 항의에 희도는 별말 없이 머리만 톡톡 건드렸다. 물론 휘청일 정도는 아니었으나, 희도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작아져서 더 만만해졌나?’

나는 울컥하는 심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끈으로 좀 묶어 줄까?”

그러던 중 희도가 돌연 상냥한 말투로 나에게 물었다. 손수건을 옷처럼 둘러서 허리춤에 끈을 매어 주겠다는 얘기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윽!”

곧 희도가 찾아낸 끈은 조금 전 먹었던 초콜릿 포장지에 감긴 끈이었다. 아슬아슬하게 허리를 감쌀 만한 길이라, 나는 우스꽝스러운 것을 알면서도 손수건 위로 끈을 동여맸다.

그런데 희도의 눈에는 그게 영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내 허리를 묶었던 리본을 휙 끌어 내린 것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가리려고 애썼다.

“잠깐……!”

“내가 묶는 게 낫겠네.”

그러고는 손수건을 다시 정리해 주는데……. 물론, 지금의 희도는 내 몸에 관심이 없겠지만 나로서는 진짜 굴욕적이었다.

나는 희도가 제발 내 아래쪽에 시선을 주지 않길 바라면서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이게 낫잖아.”

희도는 손수건을 조금 접어서 망토처럼 만들어 내 위에 덮어씌운 뒤, 허리춤에 리본을 매 주었다.

희도 말대로 아까보단 좀 더 나은 느낌이 들긴 했으나…… 손수건이 접힌 만큼 다리 쪽이 더 말려 올라와서 다리 사이가 휑하게 느껴졌다.

‘앉으면 엉덩이가 맨살에 닿을지도…….’

이도 저도 못 하는 와중, 마검이 얄밉게 덧붙였다.

“주인, 치마 입은 거 같아.”

‘닥쳐.’

나는 입 모양으로 욕을 하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희도는 그렇게 나를 이리저리 가지고 놀다가 다시 소매 틈에 넣어 줬다. 누군가 가까이 오고 있었다.

“희도 군, 준비됐으면 이동하죠. 이제 들어갈 겁니다. 희도 군은 세림 군과 같이 후방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정원 님이었다.

“…….”

희도는 또 과묵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몇 분 뒤, 나는 확연히 달라진 공기를 느꼈다.

‘……던전 안에 들어왔어.’

“다들 거리 유지하면서 천천히 이동합니다. 이상한 점이 발견되면 바로 선두에 알려 주세요.”

“네!”

또한 주변에 아까보다 사람들이 밀집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래도 던전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 있는 거니까…….

희도는 다른 사람과 팔이라도 닿을세라 좀 빨리 걷기 시작했고, 나는 또 멀미가 났지만 꾹 참았다.

“주인, 마물이 이쪽으로 오기 시작했어.”

“마물?”

몬스터를 말하는 건가?

내 예상이 맞았다. 그 말과 동시에 시큼하면서도 기름기가 느껴지는, 뭐라 말하기 어려운 불쾌한 냄새가 풍겼기 때문이다. 몇 번을 맡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몬스터 특유의 체취가 진하게 풍겨 왔다.

“꽉 잡아라.”

때마침 희도가 나에게 나직하게 경고했다. 

나는 희도의 말에 그의 소매에 난 작은 단춧구멍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것 말고는 딱히 잡을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휘익―!

그리고, 바람 소리가 들렸다.

[끄아아악―!]

[기긱. 기긱.]

날카로운 무언가가 벽을 타고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것이 벌레형 몬스터임을 확신했다.

촤악―!

퍽!

이어 그것들을 가르는, 익숙한 채찍 소리도 들렸다.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물풍선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역겨운 몬스터의 냄새는 더 진해졌다.

“오랜만이라 그런가, 구경만 해도 엄청 재밌다.”

그 와중에 마검은 천진하게 웃었다. 

나는 녀석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소매에 코를 묻었다. 초콜릿만큼이나 독한 냄새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이런, 씹…….”

갑자기 희도가 불쑥 욕설을 내뱉었고, 내가 있는 소매 윗부분이 쓱 갈라졌다. 몬스터의 공격에 스쳐서 의복이 상한 것이다.

나는 모골이 송연해져서 눈을 부릅떴다. 조금만 더 깊었어도 나까지 베였을 테니까.

“야, 너 괜찮지?”

희도도 그게 걱정되었는지 곧장 물었다. 나는 희도에게 보이지 않을 걸 떠올리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괘, 괜찮……! 우왓!”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손수건이 갑자기 쓰윽 풀어졌고, 미처 뭐라 말하기도 전에 내 몸이 벌어진 소매 틈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희도가 뒤늦게 손을 뻗는 것이 보였지만, 이미 너무 땅이 가까워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