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차 회귀자는 살고 싶다
65화
결국, 나는 마검에게 부탁해서 아엔이 마구 날뛰지 못하도록 몸을 짓누르게 했다.
아엔은 대체 무슨 망상을 한 건지 격렬하게 반항했으나, 마검이 놈의 손목을 휘어잡자 창백해져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껏 놈이 해 온 짓을 떠올리면 동정심은 들지 않았으나, 나는 최대한 빨리 아엔이 두른 붕대 더미를 풀었다.
“이건…….”
아엔의 맨 가슴엔 화려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또한, 거의 목 끝에서부터 배꼽 위까지 덮을 만큼 커다란 크기였다.
나는 아엔 놈의 눈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건 대체 뭐야?”
“뭐가.”
“네놈 가슴에 그려져 있는 마법진 말이야.”
하지만 아엔은 인상을 찡그릴 뿐, 제대로 된 답을 말해 주지 않았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뭐라고?”
“내 몸에 뭐가 그려져 있다는 말이냐.”
아엔은 뻔히 보이는 마법진을 두고도 헛소리를 했다. 너무 당당한 태도 때문에 순간 헷갈릴 지경이었다.
“야, 마검아. 너도 이거 보이지?”
“응응!”
내 말을 알아듣고 대답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검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면서 긍정했다. 아엔은 끝끝내 부정했지만 말이다.
“이젠 미친 소리를 하는 것까지 장단 맞춰야 하나?”
냉소적으로 중얼거린 놈은 시뻘게진 귀와는 달리, 차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치욕을 줄 생각이라면 마음대로 해라. 무슨 짓을 해도 나에게 들을 수 있는 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
나는 아엔이 매우 화가 나는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오해를 풀기보다는 차라리 이걸 이용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잠시 고민하다가 마검을 향해 턱을 들었다.
“뒤에서 다리 좀 벌려.”
“……!”
아엔은 마음대로 하라던 태도와 다르게 표정이 곧장 창백해졌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놈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낡아 빠진 바지는 건들기만 해도 찢길 것 같은 천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허리춤에 있는 끈을 풀었다. 아엔은 눈을 감으며 어금니를 꽉 깨문 듯한 표정을 지었다.
“뻔히 있는 걸, 왜 못 본 척하는 거야?”
나는 마지막 기회라도 준다는 듯이 아엔을 떠봤다. 놈은 부들부들 떨면서 대꾸했다.
“대체 뭘 말하는 건지, 난 모른다.”
“네 몸에 있는 마법진이 안 보인다고?”
“대체 무슨 마법진이 있다는 거지?”
나는 아엔의 가슴에 그어진 선을 따라 손가락을 미끄러뜨렸지만, 놈은 긴장으로 움츠러들기만 할 뿐 끝내 긍정하지 않았다.
‘진짜 안 보이나?’
거짓말하는 태도라고 보기엔 필사적인 구석이 있었기에, 결국 아엔의 몸에서 손을 뗐다. 이어 마검을 향해서도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은 내 의도를 알아듣고는 순순히 아엔을 풀어 주었다.
아엔은 황급히 가슴팍을 여미면서 고개를 떨궜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욕설을 삼키고 있는 게 역력한 태도였다.
“일어나.”
물론, 나는 아엔이 얼마나 굴욕감을 느끼는지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놈은 나를 죽이려고 했으니까. 더한 짓을 당해도 싸다는 감정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엔은 내 냉정한 말투를 듣고는 비틀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고자 애썼다. 손을 뒤로 묶어서 그런지 균형을 잘 잡지는 못했지만, 마검이 붙들어 일으키자 넘어지지 않고 제자리에 바로 섰다.
“전에 보여 줬던, 마검이 봉인된 곳으로 안내해.”
“…….”
“네가 앞장서. 중간에 허튼짓하는 게 보이면 바로 다리를 부러뜨릴 거야.”
아엔은 대답하는 대신 미간을 찡그렸다. 마검은 아엔을 툭툭 밀었다. 놈은 그제야 할 수 없다는 듯 비틀거리면서 걷기 시작했다.
‘마검 녀석, 말귀는 대충 알아듣는 것 같은데……. 아니, 눈치가 빠른 건가?’
나는 싱글거리며, 마치 양 떼 몰듯 아엔을 몰아가는 마검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마검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아엔을 향해 발길질하던 놈이 내 시선을 느끼자마자 휙 돌아보면서 씩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면…… 그 꿍꿍이가 무엇이든, 나를 해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렇게 누군가를 신뢰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그래. 정신 차리자. 만약 내가 돌아가는 데 저 녀석이 방해된다고 한다면…….’
나는 주먹을 꾹 쥐면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 * *
달그락.
아엔을 앞세워 한참을 걸었을 때였다. 발길에 차였는지 돌멩이가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마검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왜?”
“크르릉…….”
그러곤 목울대를 울리면서 낮은 소리를 냈다.
나는 그것이 주변을 경계하는 소리라는 걸 깨닫곤 마검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마검은 어느새 아엔의 어깨를 감싸 안으면서 제 쪽으로 붙어 세웠다. 인간 방패라도 되는 듯 말이다.
“……나와.”
그리고 나는 마검과 등을 붙인 채 이제까지 걸어왔던 통로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붕대를 맨 음침한 얼굴들이 하나둘 우리를 에워쌌다.
“아엔 님을 풀어 주면 길을 열도록 하지.”
내 정면에서 한 남자가 활을 겨누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아엔의 부러진 손목을 꽉 붙들었다. 놈은 신음을 참으려고 했으나, 결국 버티지 못하고 끙끙거렸다.
“으윽…….”
“개수작 부리지 말고 두 걸음 물러서. 더 가까이 다가오면, 아엔은 앞으로 숟가락 하나 못 들게 될 테니까.”
나 역시 긴장해서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다행히 버벅거리지 않고 협박할 수 있었다.
먼저 입을 열었던 놈은 내 말에 물러서지 않았는데, 아엔이 고개를 가로젓자 결국 내가 말한 대로 물러났다.
그리고 마검은 완전히 흥분 상태가 되어 눈을 희번덕 뜨고 있었다.
“변태!”
물론, 이상한 소리를 내뱉었지만 말이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마검이 단단히 붙들고 있는 아엔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놈의 귓가에 속삭였다.
“전부 물러나게 해.”
“…….”
“마검이 나서면, 네 목부터 부러뜨리게 할 거야.”
아엔의 귓가에 속삭이긴 했으나 주변이 고요했고, 또 동굴이었기 때문에 내가 한 말은 무리에게도 전달이 되었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물러선 놈들 일부는 움찔거리면서 나를 죽일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물러나라.”
아엔은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내가 하라는 대로 따랐다.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아엔은 무리보다는 본인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상하게 프라이드가 높은 듯한 태도도 그렇고…….
‘무슨 귀족처럼 구네.’
그래도 그러한 특성이 위기를 벗어나게 하는 데는 도움이 됐다.
결국 아엔 무리는 우리가 왔던 길로 좁은 틈을 만들어 냈고, 나와 마검은 아엔을 사이에 둔 채로 길을 지나왔다.
하지만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놈들은 이곳 지리에 빠삭하니, 언제든 우리를 다시 습격할 수 있을 터였다.
‘아엔, 이 새끼도 그 순간을 노리는 거겠지.’
나는 아엔을 노려보다가 놈의 멱살을 붙든 채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아엔은 짜증스러운 건지, 아니면 답답한 건지 모를 한숨을 내쉬곤 순순히 끌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서늘한 기운을 내뿜는 다른 구역으로 들어섰을 때 아엔은 그제야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마검이 마성을 회복하면, 넌 분명히 후회할 거다.”
즉, 자신이 안내하는 장소로 마검을 데리고 가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임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앞서 걷는 마검을 쳐다봤다. 마검 녀석은 이번에도 내 시선을 기민하게 느끼곤 곧장 뒤돌아섰다.
“응?”
“……아냐. 앞서가.”
“지금 보여 주는 모습이 전부라고 착각하지 마. 마검은 네가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아엔은 그런 나를 보며 다시금 설득하려는 듯 굴었지만, 나는 대답 없이 붙든 팔을 잡아끌었다. 어쨌든, 날 죽이려고 했던 놈의 말보다야 모자르지만 착한(?) 마검 쪽이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다만 저번에 아엔 새끼가 나한테 함정을 팠던 것처럼, 마검이 다시 눈알 괴물이 되면 어찌하느냐…… 가 문제인데.’
원래였다면 나도 마검을 따라가는 데 저항감이 들었겠으나, 이제는 내게 원을 다루는 힘이 있었다.
헬 파이어 같은 대단위 마법도 막아 냈으니, 변이된 마검의 공격도 막아 낼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생겼다.
‘여차하면 아엔 놈을 방패로 써 버리던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여전히 나를 쳐다보고 있는 아엔을 힐끔 훑었다.
놈은 내 시선을 느끼곤 눈썹을 꿈틀거렸고, 곧 입을 다물었다. 내가 말릴 수 없는 결심을 했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