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1/104)
  • 2회차 회귀자는 살고 싶다

    50화

    다만 희도와 유세림은 그날, 끝내 나처럼 명상하여 그린 원을 보여 주는 데 실패했다.

    그 뒤, 일주일 동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희도가 좀 더 낫기는 했다. 수업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흐물흐물한 선이나마 머리 위로 띄우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나는 흐물흐물 찌그러진 선을 그렸던 희도와 일주일 내내 잠잠하기만 했던 유세림을 보면서 처음으로 우월감을 느꼈다.

    “야, 변태.”

    “뭐?”

    그리고 8일째 되던 날. 수업을 마치고 각자 방으로 돌아가려는 그때, 갑자기 희도가 나를 불렀다. 하지만 부르는 호칭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내가 왜 변태야!”

    나는 소심하게 변태라는 호칭을 정정해 주길 바라며 항의했지만, 희도는 그런 내 의견을 싹 무시한 채로 입을 열었다.

    “처음 만났을 땐 대뜸 끌어안더니, 못하게 하니까 이젠 맨날 힐끔거리는 거 모르는 줄 알아?”

    “뭐…… 뭐?”

    “그리고 맨날 남의 방 앞에서 얼쩡얼쩡하는 것도 다 알거든?”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 그건…….”

    너무 억울했지만,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진 않았다. 진짜 그랬으니까.

    하지만 일주일 이상 같이 수업을 받고 있음에도 희도는 항상 거리를 두고 나를 무시해 왔다. 그러다 오늘 ‘변태’라는 모멸적인 호칭으로 나를 부른 것이다. 

    나는 그게 서러웠지만, 상대가 희도이기 때문에 화를 낼 수가 없어서 입술만 꽉 깨물었다. 희도는 그런 나를 보면서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러나 그 비웃음도 아주 찰나였다.

    “됐고. 너, 저 선생이랑 처음 만난 거 맞냐?”

    희도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 당연히 처음이지.”

    “근데 어떻게 C등급인 네가 R등급인 나보다 빨리 성공한 건데.”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대꾸했다.

    “집중력이랑 등급이 무슨 상관인데?”

    “당연히 상관있지. R등급이 좆으로 보이냐?”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나랑 정원 님이 짜고 친다고까지 생각하는 건 심하지 않아? 나는 왈칵 화를 내려다가 씩씩거리면서도 꾹 눌러 참았다.

    “……머릿속에 잡생각이 많은가 보지, 네가.”

    내 퉁명스러운 대답에 희도는 눈가를 찌푸리면서 무어라 말하려고 했다.

    “너 사실, 등급…….”

    “그만들 하시죠.”

    유세림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는 명상하고 나서 되레 머릿속이 더 복잡해진 것처럼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나 보였는데, 우리가 그 앞에서 떠들기까지 하니 더는 참을 수 없게 된 것 같았다.

    나는 유세림이 수업하는 동안 희도가 만든 찌글거리는 선조차도 띄우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입을 다물었다. 녀석이 싫은 것과는 별개로 이토록 집중 못 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기 때문에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정원 님은 ‘원래 처음엔 다 실패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말했지만, 유세림은 뭔가 그보다 더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심지어 날이 갈수록 더욱 집중을 못 해서 오늘은 정원 님이 유세림의 어깨를 짚은 채 ‘초조해하지 마세요.’라고 말하기도 하셨다.

    희도는 그런 유세림을 보면서 이죽거렸다.

    “제일 잡생각이 많은 유세림,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그쪽이 닥쳐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입니다.”

    유세림은 그렇게 일갈한 뒤, 제 방에 들어가다 말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나는 그 시선의 의미를 알 수 없어서 인상을 찌푸렸다.

    유세림은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무어라 작게 중얼거렸다.

    “……할 수가 없어.”

    나와 달리, 그 말을 제대로 들은 듯 보이는 희도가 고개를 휙 돌리며 다시 물었다.

    “뭐?”

    “그쪽한테 한 말 아닙니다.”

    “그럼…….”

    그런데 그 말을 들은 희도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희도는 나와 유세림을 번갈아 쳐다본 뒤에 인상을 팍 쓰면서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제 방으로 쿵쿵 걸어 들어가선 문을 쾅! 닫았다.

    “…….”

    “…….”

    해서 남겨진 나와 유세림 사이엔 싸늘한 공기가 흘렀다. 나는 갑자기 자리를 피한 희도가 몹시 신경 쓰여서 유세림에게 물었다.

    “너 방금 뭐라고 했어?”

    “…….”

    유세림은 드물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나를 다시금 쳐다보며 한숨을 한번 깊게 쉬더니, 등을 돌려 제 방으로 들어갔다. 명백한 무시였다.

    “뭐…… 뭐야, 저 녀석들?”

    남겨진 나로서는 황당했으나, 이미 닫힌 두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하아…….”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면서 양쪽 문을 노려봤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아까 유세림처럼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희도는 나를 경계하고, 유세림은 쓸데없이 사람을 신경 쓰이게 만든다.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 * *

    그리고 이튿날, 수업은 이제까지와는 또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정원 님은 마치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싱글싱글 웃으면서 놀리듯 말하셨다.

    “아직 두 분은 머리 위로 원을 띄우지 못했지만, ‘앞서가고 있는’ 한솔 군을 위해서 수업의 난도를 높여 보려고 해요.”

    그 말을 듣자마자 희도는 인상을 찡그렸고, 유세림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너, 저 선생이랑 처음 만난 거 맞냐?’

    나는 어제 희도가 했던 말이 생각나 정원 님의 말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졌으나, 그렇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내 표정을 본 정원 님은 여전히 미소를 띤 채로 내게 부드럽게 말하셨다.

    “한솔 군은 이제 방해를 받는 상황에서 원을 유지하는 훈련을 할 겁니다.”

    “……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방해를 받는 상황에서도 평정을 유지하면서 머리 위로 원을 만들어 보는 것. 그게 이번 주의 숙제입니다.”

    “…….”

    “…….”

    “네…….”

    분위기는 싸늘해졌고, 대답하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러나 정원 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를 보고 활짝 웃으면서…… 괴상한 소리를 하셨다.

    “그럼 세 분, 서로 손을 잡아 볼까요?”

    “네?”

    “뭐?”

    “…….”

    나뿐만 아니라 희도도 놀란 듯 되물었지만, 정원 님은 밀리지 않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더 말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희도 역시 나와 같은 것을 느낀 듯 어처구니없어하면서 말했다.

    “이게 대체 훈련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건데?”

    “인간은 타인의 신체 부위가 닿으면 본능적으로 긴장하게 되죠. 그 압박감을 이겨 내면서도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알겠습니다.”

    유세림은 대답만 잘하곤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렇게 각자 눈치만 보고 있는 와중, 정원 님이 내 옆에 쓰윽 다가와 서시더니 내 손을 잡아끌었다.

    “어…… 어?”

    나는 당황하면서도 순순히 끌려가 강제로(?) 희도와 손이 닿게 되었다. 그런데 희도는 오만상을 찡그리면서도 내 손을 피하진 않았다.

    나는 나와 닿자마자 질색하는 태도에 약간 상처를 받았지만, 그다음 의외로 제 쪽에서 먼저 내 손을 잡아 온 것에 조금 전 받은 상처도 잊고, 목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유세림은 희도가 내 손을 잡고, 내가 부끄러워하기 시작하자 그제야 내 남은 다른 손을 꽉 붙잡았는데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하마터면 ‘악!’ 하고 아픈 티를 낼 뻔했다. 하지만 자존심에 입을 꽉 다물고 아무 소리도 안 냈다.

    이어 희도와 유세림 역시 손을 잡았다. 그렇게 우리는 손을 잡은 채 서로를 마주 봤는데, 어색해서 죽을 것 같았지만 적어도 손을 놓는 사람은 없었다. 

    정원 님은 그런 우리를 보며 후후 웃으셨다.

    “그러고 있으니 세 분 참 귀엽네요.”

    희도가 발끈해서 말했다.

    “뭐라는 거야.”

    역시나 유세림은 말이 없었다.

    “…….”

    그리고 나는…… 희도에게 잡힌 손을 꼼지락거리느라 살짝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정원 님이 다시 손바닥을 짝! 하고 친 후, 말하셨다.

    “자, 그럼 이제 다시 ‘집중’해 볼까요?”

    유세림이 먼저 눈을 감았고, 나도 녀석이 눈을 감는 모습을 보며 얼결에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감각이 좀 더 예민해졌다. 유세림이 잡은 저릿한 오른손과 희도가 느슨하게 잡은 왼손.

    ‘이거…… 진짜 어렵구나.’

    나는 계속 집중해 보려 했지만, 처음처럼 쉽게 원을 떠올리면서 내 의식에만 몰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때, 정원 님의 말이 이어졌다.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을 부정하지 마세요.”

    “…….”

    “부정하는 것도 에너지가 들거든요.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흘려보내는 겁니다.”

    “…….”

    “집중해야 하는 건 오로지 단 하나. 원을 그리는 것이죠.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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