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차 회귀자는 살고 싶다
43화
“덕분에 잘 도착했습니다.”
“나중에 또 인연이 닿으면 잘 부탁드려요.”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연신 고마워하는 파티원과 헤어진 후, 데보라 마을에 있는 제일 큰 여관으로 갔다.
일단 여기서 짐을 풀고 희도부터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내 짐을 전부 유세림에게 떠넘기며 적당한 방을 잡으라고 했다.
그리고 뒤돌던 찰나, 유세림에게 뒷덜미가 잡혔다.
“어딜 가십니까?”
“이거 안 놔?”
“저랑 항상 함께 다니셔야 합니다.”
“……젠장.”
나는 이전의 기억 때문에 되도록 유세림이 백희도를 못 만나게 하거나, 부득이한 상황이라면 최대한 시기를 늦추고 싶었다. 뭔가 둘이 만나면 그때의 끔찍했던 일이 다시 반복될 것 같다는 혼자만의 트라우마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 내 속도 모르면서 유세림은 특유의 밋밋한 얼굴로 나를 질질 끌고 와선 기어코 함께 방을 잡았다.
“큰 방 하나 있습니까?”
여관 주인은 친절하게 물었다.
“네. 두 분이서 쓰실 건가요?”
“네.”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유세림이 방을 하나만 잡으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발작하듯이 쏘아붙였다.
“뭐? 방 두 개 잡아!”
그러자 유세림은 짐짓 성훈이 형의 명령 때문이라는 듯이 말했다.
“항상 같이 다니라고, 한성훈 님이 저한테 부탁하셨습니다.”
“같이 자라곤 안 했잖아!”
“다른 방에서 지내면 경호하는 입장에선 여러모로 성가셔집니다.”
“너 지금 나더러 성가시다고 했냐?”
유세림은 입을 다물었다.
“…….”
그때, 우리의 실랑이를 보고 있던 여관 주인이 난감한 듯이 재차 물었다.
“저어……. 그럼, 방은…….”
“한 개입니다.”
“두 개요!”
그러자 유세림이 쐐기를 박듯 내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지갑은 저한테 있습니다, 한솔 씨.”
“이익!”
어쩔 수 없이 큰 방 한 개를 쓸 수밖에 없었다. 나는 기분이 저조해져서 신경질적으로 짐을 옮겼는데, 다행히 방에는 침대가 두 개였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유세림이 이상하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한솔 씨는 대체 왜 저를 경계하시는 겁니까?”
“뭐?”
“저는 한솔 씨를 경호하는 임무를 맡은 것뿐이지, 한솔 씨에겐 별 관심 없습니다.”
그 말을 듣자 왠지 모르게 얼굴이 빨개지면서 민망해졌다. 동시에 나만 알고 있는 이전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눈앞의 유세림에게는 말할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그때는 그렇게 싫다고 해도 억지로 해 대던 새끼가…….
“누, 누가 뭐래?”
“제가 조금만 닿아도 경기 일으키듯 싫어하시고, 방금도 같은 방에 머무는 것뿐인데 몹시 경계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저는 굳이 따지자면 여성이 더 취향이니, 걱정하지 마시고 앞으로는 저를 그런 쪽으로 몰아가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유세림은 짐짓 불쾌하다는 듯 말했지만, 나는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스무 살의 유세림과 스물다섯의 유세림은 정말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나는 아랫입술만 깨물고 서 있다가, 하기 싫은 사과를 할 뻔했다. 하지만 간신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사과는 무슨 사과야. 나는…….’
놈에게 영원히 받을 수 없는 사과를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하는데.
“…….”
“…….”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대치하다가, 결국 서로 어색하게 방을 나왔다.
유세림은 내가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고 생각한 건지 뭔지 그 뒤부터는 입을 꾹 다물었는데, 내게는 차라리 그가 침묵해 주는 게 기꺼웠다. 더 말을 걸어왔으면 참지 못하고 폭언을 마구 퍼부어 댔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또, 이렇게 어색하고 불쾌한 상황이 이어질수록 희도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백희도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황을 유쾌하게 만들고 웃기는 재주가 있었는데.
“혹시 이 여관에 머리카락이 길고…… 아니, 단발머리에 얼굴이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애가 있진 않나요?”
“저, 손님들 정보는 저희가 따로 말씀드리기 어려워서…….”
“아, 네…….”
이후 여관 카운터로 내려가서 희도의 인상착의 등을 말하며 수소문해 보려 했는데, 역시나 쉽지 않았다.
그래서 실망하며 돌아서려는 순간, 누군가 내게 말했다.
“나 찾는 건가?”
“……!”
조금 낯설면서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삐딱하게 선 채로 경계의 눈으로 나를 훑어보고 있는, 열아홉 살의 희도가 서 있었다.
* * *
유세림은 처음부터 한성훈의 파티에 들어갈 생각뿐이었지, C등급의 뒤치다꺼리를 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 C등급은 제 형의 후광을 등에 업고 언제나 제게 안하무인으로 굴었다.
유세림은 인내하고 또 인내했으나 자신의 손이나 몸이 무심코 닿을 때마다 경기를 일으키듯 싫어하는 그의 행동에는 이제 답답함을 넘어 화가 났다.
‘누가 저를 만지고 싶어서 만지는 줄 아는가 보지?’
그래서 일부러 방을 하나만 잡고 한솔에게 그동안 쌓였던 불만을 말했다.
예상대로 무안을 주었더니 한솔은 얼굴이 빨개지고 말문이 막혔지만……. 유세림은 그 모습에 속이 시원해지기는커녕 후회만 늘었다. 비스듬히 자신의 시선을 피해 땅을 내려다보는 한솔의 어두운 눈동자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한성훈에게 나쁘게 말할 것 같아 걱정된 게 아니었다. 유세림은 난생처음으로 누군가를 상처 입혀 놓고 그것을 후회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한솔이 끝내 자신을 돌아봐 주지 않았기 때문에 세림은 사과할 기회도 얻지 못했다.
“혹시 이 여관에 머리카락이 길고…… 아니, 단발머리에 얼굴이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애가 있진 않나요?”
그가 지금까지 제게 대하던 태도와 다르기 때문일까? 세림은 한솔이 누군가를 이렇게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처음 봤기 때문에 잠자코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세림은 충격을 받았다.
“나 찾는 건가?”
등 뒤에서 건방진 말투가 들려왔고, 곧 한솔은 빠르게 뒤를 돌아봤다.
한솔의 곁에서 오직 한솔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던 세림은 그 순간, 한솔의 얼굴에 마치 빛이 돌아오는 것 같은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한솔을 만나고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반짝이는 눈은 조금 글썽이는 것 같기도 했고, 달싹이는 입술은 웃는 듯 혹은 우는 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세림은 알고 있었다. 격렬한 재회의 기쁨과 상대방을 향한 사랑이 가득 담긴 표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각한 순간, 유세림은 자신의 기분이 급격히 저조해짐을 느꼈다.
‘왜?’
유세림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한솔은 왜 저 소년에게…….’
하지만 그 질문은 스스로가 답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 유세림은 나중에 한솔에게 묻기로 마음먹고, 이번엔 스스로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을 꺼냈다.
왜 한솔의 저 표정을 보고 내 기분이 나빠졌지?
‘…….’
한솔이 기뻐해서? 혹은 사랑에 빠진 표정을 보여 줘서? 한솔이 저 소년을 사랑하는 것 같아서?
‘……?’
유세림은 이해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당장이라도 소년에게 튀어 나가려는 듯한 한솔의 어깨를 꽉 쥐었다.
한솔의 깜짝 놀란 얼굴이 자신을 향하고, 곧 적의로 물드는 것을 보았을 때, 유세림은 다시 한번 마음의 격렬한 흔들림을 느꼈다. 물론, 가면을 쓴 듯한 얼굴에는 이렇다 할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왜 잡는 거야?”
“누굽니까?”
“……갑자기 왜 물어?”
그야 당신이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내게는 단 한 번도 허락지 않은 내밀한 얼굴로, 저 소년에게 다가가려 하고 있으니까.
“함부로 다가서기엔 위험해 보입니다. 등급도 높은 것 같은데요.”
“…….”
“제가 먼저 신원을 확인해 봐도 되겠죠?”
그렇게 말하며 채찍을 그러쥐자 한솔은 경직되다 못해 바짝 얼어붙어 버렸다. 단순한 행동에 걸맞지 않은 지나친 반응이라고 생각했지만, 차라리 그가 꼼짝 못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유세림은 흥미롭게 이쪽을 보고 있는 소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너도 나처럼 R등급인가 본데?”
“실례지만, 성함이?”
“백희도. 너는?”
“……유세림입니다.”
유세림은 첫눈에 백희도라는 소년이 싫어졌다. 하지만 밋밋한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백희도는 피식 웃으면서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이때, 유세림은 백희도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걸 눈치챘다.
“희도…… 희도야.”
“응?”
그리고 유세림은 저를 스쳐 지나는 한솔을 부러 붙잡지 않았다. 무엇을 하려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
언제나 제겐 표독스러운 표정만 지어 보였던 한솔이,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뛰어선 얼떨떨해 보이는 백희도 소년의 품을 꽉 끌어안았다. 얼핏 보이는 그의 얼굴은 눈물로 푹 젖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