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형, 오늘은 내가 장 봐 와서 유부 초밥도 만들었고…… 아! 맞아. 형, 내가 싸 준 도시락 잘 먹었어?”
“잘 먹었지. 형 파티원이 자꾸 뺏어 먹을라고 해서 사수하느라 혼났다.”
“좀 더 싸 줄걸 그랬나?”
“뭘 더 싸 줘. 각자 알아서 먹는 거지.”
한성훈은 오늘 자신을 으쓱하게 만들었던 동생표 도시락을 떠올리면서 흐뭇하게 웃었다. 한솔도 한성훈의 미소를 보면서 웃었다.
그러나 오늘도 안부를 물으며 한성훈의 일상을 탐색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형, 오늘은 뭐 했어?”
“어디 보자, 오늘은…… 공중 정원이라는 던전에 갔는데…….”
한성훈은 별다른 긴장감 없이 한솔에게 오늘 다녀온 던전 얘기라든가 다른 사람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아직 ‘몬스터 침공’이 발생하기 한 달 전이니만큼 한솔은 계속해서 이런 질문을 하며 한성훈에게서 백희도의 이야기가 나올까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도 백희도의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내가 각성자. 그것도 C등급이라고 하면 형은 뭐라고 할까. 아마 분명히 따라오지 말고 집에서 있으라고 하겠지? 형은 가끔 날 여전히 어린애라고 생각하니까…….’
사실 C등급이 아니라 R등급이라고 해도 형이 내가 ‘저쪽’에 가는 걸 허락해 줄지는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형에게 일단 내가 각성자라는 것을 숨겼다.
말하기 전엔 각성자인지 서로 잘 모르는 경우도 많아서 형도 나를 의심하고 있진 않았다.
하지만 형이 게이트를 열고 나가면 나는 한 시간쯤 기다렸다가 게이트를 열고 나가, 열아홉 살의 백희도를 찾아다니곤 했다. 하지만 백희도는 어디서 뭘 하는지 도통 소식을 알 수 없었다.
‘전에 희도랑 같이 있었을 때, 좀만 더 자세히 과거를 물어볼걸.’
오늘도 나는 내가 백희도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것만 통감하면서 우리가 마지막에 머물렀던 설원에 갔다.
처음 게이트를 열었을 때도 설원이었기에 이곳은 이제 눈 감고도 다닐 수 있을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순간, 방심해 버린 것은.
[그와아아아!]
‘젠장, 설원 눈 도깨비잖아!’
‘설원 눈 도깨비’는 생긴 건 오크와 비슷한데 피부가 눈처럼 하얀 하급 몬스터였다. 문제는 지금의 나는 하급 몬스터에도 대항할 만한 스킬이 없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현재 내 상태 창은 이런 상태였다.
[플레이어: 한솔
레벨: 80
직업: 디버퍼
등급: C
스킬:
―무거운 걸음 (위력 30/31)
―어두워진 눈동자 (위력 30/31)
―뒤집어쓴 가죽 (위력 30/31)
―? (위력 2/20)]
2회차 회귀 후 물음표의 위력이 하나 더 늘어나기는 했으나 그게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상태라 사용하기는 요원했고, 나머지 디버프들은 실제 공격할 수 있는 디버프는 없었기 때문에 설원 눈 도깨비 한 마리조차 죽일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어억!]
[그억 그억!]
설원 눈 도깨비들은 혼자 다니지도 않고 무리를 지어 다니는 무리형 몬스터였던 것이다.
몬스터가 각성자를 적대시한 상태(어그로)에서는 게이트가 열리지도 않기 때문에, 나로서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나 마찬가지였다.
펜던트로 다시 한번 돌아오면서 라몬의 저주 반지 따위가 있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이번에 나는 완전히 맨몸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지닌 아티팩트도 없었다.
‘……젠장.’
나는 내가 너무 안일하게 ‘저쪽’을 돌아다녔다는 것을 자각하곤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일단 여기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부터 하게 되었다.
“[무거운 걸음]!”
다행히 설원 눈 도깨비들은 마법 저항이 나보다 약한 상대라 디버프가 잘 먹히는 편이었다.
나는 놈들의 움직임을 느리게 하는 버프를 걸고, 최대한 몸을 숨길 수 있는 동굴을 찾았다. 동굴 안에서 또다시 몬스터가 나오면 곤란하기 때문에 이번엔 동굴 안으로 돌 따위를 던져 보고는 안전한 걸 확인한 후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동굴에 들어서자마자 당황하고 말았다. 왜냐면 그 안에는…….
“솔아?”
“……서, 성훈이 형.”
‘저쪽’에서는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나의 형, 한성훈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성훈이 형은 제 눈을 의심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솔아, 네가 여기에 왜…….”
“…….”
“왜겠냐. 각성자라서겠지.”
성훈이 형의 동료로 보이는 사람들은 충격 받은 형의 표정을 보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네가 한솔이구나. 얘긴 많이 들었다.”
“한성훈 말만 들었을 땐 완전 꼬맹인 줄 알았는데, 훤칠하게 생겼네.”
“안녕.”
“……한솔. 너 이리 와 봐.”
그러나 그렇게 인사해 주면서 분위기를 풀어 주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R등급 중에서도 초월자라 불렸던 형의 가라앉은 목소리는 그것만으로도 공간을 장악했고, 나는 쭈뼛거리면서 형 앞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운도 지지리도 없지. 하필이면 설원 눈 도깨비한테 간신히 도망쳐선 형이 쉬고 있는 캠프로 오다니…….
“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속일 생각은 아니었어.”
“언제부터 각성자가 된 건데?”
“며칠 안 됐어.”
“며칠 안 됐다고?”
“응.”
“그럼, 게이트는 어떻게 열었어?”
나는 여기서 형의 눈치를 보다가 조금은 거짓말을 섞어서 대답했다.
“형…… 보고 싶다고 생각하니까 열리던데.”
“……뭐?”
내 예상대로 형은 화난 얼굴에서 약간 당황한 얼굴로 바뀌었다. 그리고 내 말을 의심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쌍방 브라콤인가…….”
“좋겠네, 성훈이 형.”
“입 헤벌쭉 안 벌리려고 턱에 힘주는 거 봐라.”
파티원들은 그런 성훈이 형을 놀렸고 말이다.
하지만 성훈이 형은 그런 야유에도 불구하고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내 팔을 붙들고는 바로 게이트를 열어 버렸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다시 ‘이쪽’으로 넘어와 집에 왔다. 성훈이 형은 집에 나를 데리고 와선 식탁에 앉으라고 명령조로 말했다.
“나 안 만났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거기가 몬스터가 얼마나 많은 구역인 줄 알아?”
“……미, 미안해.”
“너, 설원 눈 도깨비 만났지? 하얀 오크처럼 생긴 놈들.”
“…….”
“그놈들 날뛰는 소리가 들리기에 누가 왔나 보다 했는데, 그게 내 동생인 줄 알았으면 당장 튀어 나갔을 거야. 무심했다가 널 잃었었다면 내가 얼마나 자책하고 힘들어했을지 상상은 해 봤어?”
“미안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형에게 싹싹 비는 방법뿐이었다. 성훈이 형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내 비굴한 사과를 보다가, 문득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부쩍 나한테 ‘저쪽’ 얘기 많이 물어본 것도 각성해서 그랬던 거냐?”
“아냐! 그건 아니야! 그건 진짜 형 어떻게 지내나, 뭐 하고 있나 궁금해서 물어봤던 거였어.”
“…….”
“믿어 줘.”
형은 아직 완전히 의심을 걷진 않았으나, 내가 정색하면서 부정하자 날카로운 기세가 한층 누그러들었다.
하지만 이어 형이 내게 등급을 물었을 땐, 정말로 그냥 도망치고 싶어졌다.
“너 등급 몇이야.”
“……C등급이야.”
“앞으로 절대로, 형 없을 때 게이트 열고 다니지 마라. 알겠어?”
“……알겠어.”
역시나 형은 내 등급을 듣자마자 내가 혼자 힘으로 뭔가 할 수 없을 거라고 여긴 것 같았다.
그 점이 씁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형에게 전혀 의지되지 않는 동생이라는 뜻이니까. 나는 형에게 의지가 되고 싶었는데…….
“……하.”
내 표정이 우울해지자 형은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내게 물었다.
“한솔이 너, ‘저쪽’ 세계로 넘어가 보고 싶은 거야?”
“……응.”
“‘저쪽’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멋지고 그런 거 아니야. 게임처럼 생각하고 왔던 애들, 다 며칠 못 버티고 돌아갔어.”
나는 형이 나를 설득하려 한다는 걸 알고는 어쩔 수 없이 내 현재 상황을 터놓고 설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게 아니야. 차, 찾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래.”
“찾고 싶은 사람?”
“응.”
“누군데?”
“백희도…… 라고, 혹시 알아?”
“백희도?”
형은 처음 듣는다는 얼굴이었지만, 나에게 퍽 진지하게 물었다.
“그 사람은 왜 찾는 건데?”
“……그건…… 일단 찾은 다음에 말해 줄게.”
아무리 형이라고 해도 미래에 나랑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는 남자 친구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긴 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내 태도가 형에겐 퍽 서운하게 다가온 것 같았다.
“형 능력 못 믿냐? 각성자라면 어지간한 놈들은 다 알고 있어. 지금은 몰라도 며칠이면 찾을 놈은 다 찾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이것만 묻자. 걔를 좋은 의미로 찾는 거야, 아니면 나쁜 의미로 찾는 거야?”
“좋은 의미야! 나쁘게 대하면 안 돼, 형.”
“……점점 맘에 안 드는데.”
형은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입으로는 “백희도, 백희도…….” 하고 몇 번 중얼거리면서 이름을 외웠다.
찾아 주겠다는 신호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나는 형의 마음이 고맙게 느껴졌다.
“형 고마워.”
“아직 찾아 주겠다고 말 안 했다.”
“그래도…… 형 능력이면 금방 찾을 거 아냐.”
“하, 참 나. 누가 찾아 주겠다고 말이나 했냐? 너무 기대하지 마. 찾아도 영 이상한 놈이면 너랑 평생 못 만나게 할 거니까.”
“좋은 애야…….”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약간 울컥하는 마음을 심호흡하며 다스렸다.
“……정말, 좋은 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