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혜…… 야?”
툭―. 데구루루…….
이홍이 이혜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그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안, 안 돼…….”
이홍은 신음하듯 작은 소리로 허우적거리다가 괴물의 등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비틀거리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이혜의 머리를 붙잡았다.
철컥.
그리고 그사이, 백희도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이홍의 목에 대고 차갑게 말했다.
“모두 물러서.”
이홍은 제 목숨이 위협당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양 이혜의 목만 끌어안은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슬금슬금 물러서는 화교인들을 보고 나서야 비틀거리면서 백희도에게로 뛰어갔다.
“백희도…… 포션부터 부어, 빨리.”
“괜찮아. 다친 덴 없냐?”
“없어! 없다고!”
내 히스테릭한 고함에 백희도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품에서 포션을 꺼냈다. 그리고 제 눈 위로 부었다.
포션의 성능이 뛰어나긴 하지만 만병통치약은 아니기에 백희도의 시력이 정상적으로 회복될까 두려운 마음으로 녀석을 바라봤는데, 갑자기 백희도가 사나운 표정이 되어 나를 황급히 제 뒤로 물러나게 했다.
“왜 그래?”
“…….”
하지만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백희도가 아닌, 먼 곳에서 들려온 채찍 소리로 대신되었다.
휘익― 착.
나 역시 굳어서 흰 점처럼 다가오고 있는 유세림을 바라봤다.
유세림은 하얀 옷을 입고 평소와 똑같은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느꼈다. 유세림의 질시와 분노를.
“지금이라도 내게 오면…….”
“…….”
“저 남자를 편히 죽여 주죠.”
유세림은 돌아 있었다. 내가 놈을 버리고 떠난 것을, 그리고 도망친 대상이 백희도라는 것에 대해서.
한마디로 완전히 꼭지가 돈 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유세림에게 가지 않고 백희도의 등 뒤로 더 숨었다.
이미 나는 이전과 다르게 마음에 확신이 있는 상태였다. 그전까진 혼자만의 마음이었다면, 어제 백희도와 나는 서로 마음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절대로, 죽어도 유세림에게 가고 싶지 않았다.
백희도는 숨 막히는 살기 속에서도 비웃으면서 대꾸했다.
“너랑 있는 순간순간이 역겨워서 못 있겠다는데, 좀 놔주지 그러냐.”
“셋 셀 때까지 오지 않으면 제가 가도록 하겠습니다.”
“와라. 언젠간 이런 날이 올 것 같긴 했어. 뭐, 남자 때문에 시작될 줄은 몰랐지만.”
“……하나.”
“내가 갈까?”
챙―!
백희도는 기다리지 않고 돌격했다. 그리고 유세림은 백희도는 쳐다도 보지 않은 채 검을 막아 내면서도 나를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섬뜩하고 끔찍한 시선으로 말이다.
“오지 않았으므로 백희도를 살려 둘 겁니다. 두고두고 후회하게 해 드리죠.”
“……!”
“걱정하지 마. 난 널 살려 둘 생각 없으니까.”
그런데 백희도가 화교인들에게 협박하고자 목에 칼을 대고 있던 이홍이 뒤늦게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놈은 조용히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붉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제 동생의 수급을 챙겨 화교인들에게 넘겼다. 그리고 눈을 감은 후, 버프를 외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 버프가 유세림에게 향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고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백희도! 이홍이 버프를 시작했어. 조심……!”
쾅―!
그러나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유세림의 손짓 한 번에 백희도가 날아가서 처박히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백희도는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승산은 없어 보였다.
원래도 유세림이 더 우세했던 승부였다. 그런데 지금 백희도는 부상을 입은 상태이며, 유세림은 이홍의 버프까지 받은 채로 백희도를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안 돼…….”
“포기하지 마, 주술사. 난 안 했으니까.”
하지만 백희도는 입가에 흘러나온 피를 쓱 닦으면서 울기 시작한 나를 달랬다. 나는 그 모습에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챙, 챙, 챙, 쾅―!
백희도는 분투했지만, 유세림의 볼에 미세한 흉터를 남기는 것에 그쳤다. 그러는 도중 백희도의 상태는 완전히 최악에 이르렀다. 검을 잡지 않은 왼손이…… 날아가 있었으니까.
나는 눈밭에 떨어져 있는 석궁 화살의 날카로운 촉을 보고 그것을 손에 쥐었다.
주르륵―.
그사이 백희도의 혀까지 자르고야 만 유세림이 보라는 듯 내 앞에 그걸 던졌다.
“…….”
나는 손발이 떨렸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실패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이 순간에도 백희도는 마치 곤충처럼 해체되기 시작했고 나는 백희도의 최후를 봤다. 나 때문에 불행해진 남자를. 내가 사랑하는…….
유세림은 10분 만에 백희도를 난자한 뒤,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이 상태로 살아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가능합니까, 이홍 님?”
“어렵지 않은 일이죠.”
이홍은 붉어진 눈가를 쓸며 미소를 지었다.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는 듯이.
푸욱―!
그리고 나는 바로 그때, 화살촉으로 내 목을 찔렀다. 깊숙이, 단 한 번에, 꿰뚫고 나올 수 있도록.
유세림의 손목에 있는 페어 인장이 깜빡이다가 흐려지면서 천천히 사라지는 것이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그때 나는 설핏 웃었던 것 같다. 유세림은…… 글쎄? 모르겠다. 그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따윈 알게 뭐란 말인가. 성큼성큼 뛰어오면서 무어라 외쳤던 것 같긴 한데…….
나는 유세림의 품에서 사랑하는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희도야.”
같이 죽자, 우리.
아니…… 같이 살자.
내가 너의 복수까지 다시 해 줄게. 그러니까, 제발 돌아가 줘. 유세림을 죽일 수 있는 시간으로. 나의 과거로. 이 목숨을 바칠 테니.
이 통탄한 죽음을 무로 돌려서 영원히, 내가 사랑하는 저 남자를 다시 아름답게…… 살아 숨쉴 수 있도록. 설령 그가 나를 사랑했던 기억을 전부 잊는다고 해도.
펜던트가 가슴 위에서 뜨겁게 달궈지기 시작했다.
* * *
형과 나는 열두 살 차이가 난다. 그래서 형은 부모님이 없던 나에게 부모님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에겐 까마득한 어른이었으니까.
‘몬스터 침공’이라 불리는 그날도 그랬다. 성훈이 형은 게이트를 열고 넘어가기 전, 나에게 잔소리를 했었다.
‘빨래 개켜 놓고, 설거지 꼭 해 놔라.’
‘아, 알았다고……! 형, 근데 형 이번엔 언제 오는데?’
‘일주일쯤 걸릴 거야.’
‘…….’
‘최대한 빨리 올게.’
지키지 못한 약속은 그렇게 마음에 남았다.
나는 그날 게이트를 열고 들어가던 형의 얼굴을 안 보고 건성으로 대답했던 것이 계속해서 마음에 남았다.
형의 마지막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냥 보냈던 것이……. 마치 내가 그날 얼굴을 보지 않고 보낸 것 때문에 형이 돌아오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전엔 항상 건성이나마 형의 얼굴을 꼬박꼬박 봐 왔었기 때문일까? 그래서 더 형의 마지막 행적에 집착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각성자가 된 이후부터 형의 행적을 좇으면서 점점 더 형이라는 사람을 모르게 되었다.
‘한성훈 씨? 그분 덕분에 스물다섯 명이나 되는 마을 사람들이 전부 살았지.’
‘한성훈 씨 동생이라고요? 정말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 덕분에 제 동생이 무사히 목숨을 구했어요.’
‘파티 할 때마다 성훈이 형 덕분에 살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넌 성훈이 형 친동생이라고 하니까 부럽다. 형한테 많이 배웠을 거 아니야?’
내가 알던 성훈이 형과 사람들이 말하는 성훈이 형은 많이 달랐다. 너무 달라서 놀라울 정도로 말이다.
형은 존경 받는 R등급 각성자 그 자체였고, 집에서 보이는 느슨한 면도 없었다.
형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무리의 중심에서 사람들을 돕고,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일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폼 잡지 않으면서 말이다.
나한텐 그냥…… 그냥 형이었는데. 설거지 안 한다고 몇 번 혼내고, 게임 좀 적당히 하라고 뭐라 하는 그런 형. 평범한 가정의 부모님 역할을 하는, 그런…….
그래서 형을 찾으면 나는 형에게 이렇게 묻고 싶었다.
형, 얼마나 힘들었어?
형, 외롭진 않았어?
형, 철없는 나 때문에 화난 적은 없었어?
형, 도대체 어떻게 나한테 그렇게 티 한번 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거야?
그 많은 짐을 짊어지고도 살아온 사람이 우리 형이었다니, 부끄럽고도 가슴이 아팠다. 가족으로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다 아니라고, 죽었다고, 미친 짓이라고 해도 형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내가 가족으로서 형을 지켜 주고 싶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