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유세림의 장담한 대로 페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스킨십은 마치 가죽이나 고무가 볼에 닿는 것 같은 거북함이 들었으나, 머릿속은 꼭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폭죽이 펑펑 터지고 있었다.
“달다, 한솔아. 진짜 달아.”
내 눈물을 핥은 백희도가 변태처럼 중얼거렸을 때, 나는 이미 입을 벌리고 있었다. 키스라기보다는 고무에 혀가 눌리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마음은 그 어떤 때보다도 벅차올랐다.
백희도가 나를 원하고 있다. 페어가 가로막은 강제적인 흥분이 못내 아쉬운 만큼 나는 백희도에게 매달렸다. 백희도는 그런 나를 거부하지 않았다.
“하. 씨발, 유세림…….”
“백희도…….”
“죽여 버릴 거야.”
몇 번이나 그렇게 중얼거리던 백희도는 전혀 흥분할 기색이 없는 내 몸을 만지면서 흥분했다. 나는 백희도가 이런 상태의 나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흥분했다는 것이 신기해 놈을 빤히 쳐다봤다.
하지만 역시 아무렇지 않았던 건 아닌 모양이다. 백희도가 내게 질투심 가득한 질문을 했다.
“유세림이 만질 땐 어땠어?”
“……역겨웠어.”
“나는?”
“……넌 좋아.”
하지만 사실이었다. 아무리 내가 유세림의 손길에만 반응한다고 해도, 그것은 언제나 혐오와 함께 일어나는 행위일 뿐 정신적인 쾌락은 전무했다.
하지만 백희도와의 스킨십은 나를 들뜨게 하고 고양되게 만든다. 비록 몸은 아무런 반응도 못 하고 있지만,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흐르는 눈물이 그런 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백희도는 그런 나를 너른 품으로 안아 주었다.
* * *
쾅―!
백희도의 품에서 잠들어 있을 때였다. 밖에서 엄청난 소리가 들리면서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몰려오던 잠이 싹 달아나는 것을 느끼며 이미 일어나 있는 희도에게 물었다.
“설마…….”
“옷 입자.”
“…….”
그 짧은 말로도 상황 설명은 충분했다. 미친놈, 유세림이 기어이 여기를 찾아온 것이다. 페어끼리는 서로가 있는 곳을 알 수 있다더니, 아무래도 나 때문에 발각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이전에도 몇 번 떠올렸던, 목의 살점을 도려내 볼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당장은 그럴 때가 아니었으니까.
백희도의 겉옷을 대충 입고 그가 건넨, 내게는 좀 큰 신을 신은 뒤에 우리는 재빨리 하산할 준비를 했다. 게이트를 열고 ‘이쪽’ 세계로 가는 것도 생각해 봤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백희도가 고개를 저었다.
“이 마법진으로 우리 위치를 숨긴 거야. 여기서 게이트를 열면 1초 만에 찾아올 테니까 위험해.”
“아……. 알았어.”
백희도는 마법진에 적힌 숫자를 몇 개 바꿔 놓고는 그 위에 놓인 보석의 위치도 한 칸씩 옮겼다. 그런 뒤, 나를 등에 업은 채 산을 내려갔다.
그런 와중에도 펑―! 펑―! 하고 뭔가 터지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으나 백희도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백희도의 등이 땀으로 젖기 시작한 것을 눈치챘다. 그가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화르르륵.
“……어?”
그런데 산을 거의 다 내려올 때쯤, 갑자기 여러 사람이 횃불을 들고 마치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 서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그들의 옷 색을 보고 옅은 신음을 흘렸다.
“젠장……. 화령교잖아.”
‘어째서 화령교가 여기에?’라는 의문을 입 밖에 내기도 전이었다. 누군가 씩 웃으면서 화교인들을 가르고 앞서 나왔다.
화령 궁주 이홍의 동생인 이혜였다. 이혜는 살기 가득한 얼굴로 백희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붉은 손 역시 날카롭게 빛났다.
“어이, 일전에 못다 한 결전을 마저 치러 보자고.”
이혜의 도발에 백희도는 짜증스럽게 답했다.
“그때 한번 패했으면 닥치고 꺼지지그래?”
“그럴 수는 없지요.”
설상가상으로 그 뒤를 이홍이 예의 그 징그러운 괴물을 탄 채로 등장하면서 말했다.
“우린 엄연히 초대를 받고 온 거라.”
“초대?”
내 의문에 대답해 준 것은 이혜였다.
“그래. 너, 주술사. 너 때문에 백희도가 나한테 비겁하게 이긴 거잖아. 그때부터 찾고 있었는데, 마침 유세림이 우리에게 네가 여기 있을 거라고 말해 주던데?”
“……뭐?”
설마하니 유세림이 화령교까지 끌어들였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홍이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속을 알 수 없는 쪽이라 꺼림칙하긴 하지만, 우리는 은혜든 원수든 반드시 갚는다는 게 신조이니까요.”
“그래. 그러니까―― 죽어라!”
그 말과 함께 이홍은 눈을 감고 버프를 외기 시작했고, 그러자 이혜의 몸에는 붉은 기운이 서리며 안광도 붉어졌다.
백희도는 나를 침착하게 뒤에 내려놓은 뒤, 이혜의 팔에 맞서 발도했다.
챙―!
검과 검이 부딪치는 듯한 파열음이 들려왔고, 이혜는 엄청난 힘으로 백희도를 밀어붙였다. 백희도는 두어 걸음 물러섰지만, 곧 낭창하게 보법을 밟으며 유려한 검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설산연검 제1식].”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백희도의 검 스킬을 보게 되었다.
검이 부드럽게 휘면서 이혜의 강한 힘을 흘려보내고 가볍게 휘몰아치듯 두들기자, 이혜의 팔 위에 살얼음이 끼기 시작했다. 검에 스치기만 해도 베이는 것과 동시에 얼려 버리는 스킬인 것이다.
“이따위 잡기술로……!”
이혜는 광포하게 중얼거리면서 팔에 살얼음이 끼었음에도 멈추지 않고 백희도에게 다가갔다.
파워 게임이라면 이홍에게 버프를 받은 이혜가 백희도보다 더 강력한 상태였다. 이혜는 거대한 한쪽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면서 자신의 스킬을 썼다.
“[레드 헤머]!”
쾅쾅쾅―! 하고 세 번에 걸쳐 못질하듯 주먹을 휘두르는 이혜의 공격에 백희도는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그리고, 그 경합의 승자는…….
주르륵―.
팔꿈치에서부터 피가 흐르는 이혜를 보아하니 백희도의 승리였다.
“젠자아앙!”
하지만 이혜는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멈추지 않은 채 어떻게든 백희도를 붙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때, 갑자기 뒤에 서 있던 화교인들에게서 화살비가 날아왔다. 석궁을 든 자들이 백희도를 향해 화살을 쏘아 낸 것이다.
“백희도! 조심해!”
나는 기겁하며 백희도의 이름을 불렀고, 백희도는 석궁 비를 가볍게 피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석궁이 나를 향해 조준되는 것이 아닌가.
“야, 어딜 한눈팔아? 주술사 너도 조심해야지.”
비웃음 가득한 이혜의 비아냥거림을 끝으로 활시위를 놓는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백희도는 나를 뒤로 끌어당겨 석궁의 범위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촤악―!
이혜의 손톱 공격에는 고스란히 오른쪽 등을 내주고야 말았다.
“안 돼…….”
“이 정도로 그런 표정 짓지 마. 가오 상하니까.”
백희도는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그렇게 말하곤 검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나는 그런 백희도의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설산연검 제2식].”
검 끝에서 눈 폭풍 같은 것이 생기며 점차 그 범위가 퍼져 나갔고, 쏘아진 화살들은 그 바람에 휘말려 모두 기세를 잃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혜였다. 놈은 백희도가 스킬을 발동하는 동안, 갑자기 방향을 바꿔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백희도는 다시 한번 나 때문에 몸이 찢겼다. 이번엔 그 수려한 얼굴의 왼편이었다.
“백희도―!”
“괜찮아.”
시야의 반을 잃었는데도 괜찮다면서 눈을 감는 그를 보니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동시에 계속 저열하게 공격해 오는 화령교, 이 개 같은 새끼들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문제는 내가 지금 아무런 아티팩트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목욕하다가 막무가내로 도망쳐 왔기 때문에 나는 지금 직업 스킬 말고는 쓸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도……!
“[무거운 걸음]!”
[실패.]
“[어두워진 눈동자]!”
[실패.]
나는 이혜를 보며 목이 터져라 디버프를 걸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홍은 그런 나를 보면서 인상을 찡그리더니 뭔가를 더 빠르게 외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디버프에 저항하는 주문을 외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지금 나는 정말로 쓸모없는, 백희도에게 있어 짐덩어리인 것이다.
이혜는 계속 나를 공격하는 척하며 백희도를 상처 입혔고, 나는 점차 이혜를 증오하게 되었다. 백희도의 흰 적삼이 붉게 물들고, 검 끝은 그 자신의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백희도에게 말했다.
“……제발, 더 이상 다치지 마.”
“…….”
백희도는 말없이 검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이혜는 히죽거리면서 다시 한번 방향을 바꿔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서걱―!
백희도의 검이 환하게 빛나더니 검에서 나온 빛이 이혜의 몸을 단박에 꿰뚫은 것이다. 그러자마자 이홍의 얼굴이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