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윈드 실드].”
그녀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내가 말한 대로 다리에 실드를 쳤고, 그러자마자 쨍―! 하고 낫과 실드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그제야 표유정도 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다.
“흐, 흐윽……. 손, 놓지 마요!”
“……빨리 끌어당길 거야.”
나는 얇디얇은 그녀의 손을 있는 힘껏 부여잡으며 그녀를 달랬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이 몹시 불안정해 보였기 때문이다.
촤악.
다행히 내 손이 미끄러지기 전, 유세림의 채찍이 나와 표유정을 모두 발 디딜 틈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왔다.
“헉, 허억…….”
표유정은 눈물 범벅으로 다가오는 유세림을 바라봤고, 나는 부러진 갈비뼈를 부여잡은 채 고통을 애써 삼키고 있었다.
“미쳤습니까!?”
그리고 유세림은 난생처음 보는 창백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항상 차분히 말하던 놈이었기에 파티원 전원이 얼어붙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유세림의 이중인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태연히 놈의 눈을 쳐다볼 수 있었다.
“그럼 파티원이 떨어지는데 가만두고 보기만 하나요?”
“진짜로 넌 목숨이 여러 개쯤 되나 보지?”
기실 펜던트의 기능을 알게 된 이후로 몸을 사리지 않게 된 것은 사실이다. 나는 그런 점은 굳이 말하지 않고, 유세림에게 손을 벌리기만 했다.
“구해 줬다는 칭찬은 바라지도 않으니까, 포션이나 줘. 너 때문에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거든.”
“……하.”
유세림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나를 쳐다봤지만, 결국은 깊게 한숨을 내쉬고 품에서 고급 포션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 그걸 화풀이하듯이 던졌다.
나는 그 포션을 뜯어 마시며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될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표유정은 그런 나를 보면서 뭔가 말하려고 하다가, 끝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 * *
그 뒤부터의 던전 공략은 수월했다.
표유정은 마치 뒤늦게 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파티원에게 열심히 실드를 쳐 주었고, 거기에 예외는 없었다. 그녀를 살려 준 나에게도 스킬을 걸어 주었기 때문에 나도 편안하게 던전을 클리어 할 수 있었다.
[까아아아악―!]
라몬. 이 용암의 주인이자 거대한 까마귀처럼 생긴 보스 몬스터는 김재호의 도끼날에 머리가 반으로 갈려 죽었다. 날개 두 쪽 모두 유세림에게 부러져 날지 못하게 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약간 긴장하고 있었다. 내가 끼고 있는 ‘라몬의 저주 반지’가 바로 이 던전에서 나온 아티팩트였기 때문이다. 다시금 이 반지가 뜰지, 아니면 다른 게 뜰지 궁금해졌다.
“이번에 뜬 아티팩트는…… ‘라몬의 황금 목걸이’로군요. 마력을 높여 주는 목걸이니, 성규림 씨가 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머, 감사해요.”
그리고 나는 새롭게 뜬 보상을 보면서 안심했다. 충분히 다른 미래를 향해 갈 수 있다고, 누군가 확고히 말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던전에서 뜬 아이템을 배분하고 마을로 돌아왔다. 그런데, 내내 조용하던 표유정이 유세림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 파티를 탈퇴하려고 해요.”
“유정 씨!”
“…….”
[요이!?]
“…….”
이전과 다른 아티팩트가 뜬 것처럼 변한 상황으로 인해 내가 모르는 전개가 펼쳐졌다.
나는 표유정의 결단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유세림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졌다. 표유정은 희귀한 치유사 및 버프 계열의 A등급 각성자다. 그간 겪어 본 바로는 전투 센스 역시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이 정도의 각성자를 파티원으로 구하는 건 하늘에 별 따기 수준이다. 그래서 그녀의 말에 다른 파티원도 놀라고 우려스러워하며 표유정과 유세림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유세림의 리더십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걸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기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바라봤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유세림도 웃기는 놈이었다. 표유정을 이렇게 순순히 놓아주다니.
표유정 역시 유세림이 자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놓아줬다는 점에서 두 번째 상처를 받은 듯 표정이 어두워졌다. 보다 못한 성규림 씨가 나설 정도였다.
“세림 님. 유정 씨랑 대화 정도는 나누어 보셔야 하지 않나요?”
“필요하지 않습니다. 유정 씨가 원하는 걸, 제가 들어드릴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
“……흑.”
결국 표유정은 눈물을 터트렸고, 김재호는 짧게 한숨을 쉬고는 먼저 게이트를 열어 ‘이쪽’으로 가 버렸다.
한편, 성규림 씨는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유세림을 보다가 표유정의 등을 토닥이며 들리지 않게 무슨 말을 몇 마디 해 주었다.
나는 무너져 가는 파티를 보며 유세림의 세력이 약해지는 것 같아 즐거웠으나, 표유정의 눈물 앞에서는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한쪽에 있던 안화영도 눈치를 보다가 표유정에게 무언가 몇 마디를 건네고는 게이트를 열어 ‘이쪽’으로 갔고, 표유정은 성규림 씨의 달래는 말을 듣고도 몇 번이나 고개를 젓다가 끝내 마을 저편으로 사라졌다.
“…….”
성규림 씨는 표유정이 사라지자 나와 눈이 마주치곤 어두운 표정을 지었는데, 어쨌든 나보단 표유정과 함께한 시간이 많았을 테니 그녀가 누구의 편을 들어주지도 못하고 고뇌하는 것이 이해가 됐다. 그래서 그녀에게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렇게 파티의 분위기를 망쳐 버린 리더, 유세림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태연하게 게이트까지 열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죠.”
“…….”
나는 그 끔찍한 손을 잡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놈이 연 게이트 속으로 들어갔다. 내가 놈을 만지기도, 놈이 나를 만지는 것도 최대한 피하고 싶었으니까.
“……읍!”
하지만 게이트가 닫히자마자 강제로 익숙해진 유세림의 방 안에서 유세림은 마치 오랫동안 참았던 사람처럼 나를 끌어안고 역겨운 키스를 했다.
나는 눈을 감고, 이 끔찍한 시간이 지나기만을 바랐다.
* * *
“가지고 싶거나 원하는 건 없습니까?”
유세림은 씻고 나온 내 머리카락을 말려 주면서 그리 물었다. 나는 “네가 죽는 거.”라고 말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놈은 내가 말하지 않자 멋대로 목에 새겨진 페어 인장에 입술을 대며 할짝였는데, 나는 그 짜증 나는 감촉이 싫어서 어깨로 살짝 밀쳤다.
유세림은 내가 밀치자 그제야 입을 떼고는 다시 웃기지도 않는 질문을 던졌다.
“아니면, 제게 바라는 건?”
나는 이번에도 못 들은 척하려다가 혹시나 싶어 한번 말을 꺼내 봤다.
“따로 자고 싶어.”
“침대가 하나 뿐입니다.”
“그럼 내가 바닥에서 잘게.”
“싫습니다. 한솔 씨는 매번 괴상한 소리만 하는군요.”
그러면서 웃는 이 사이코가 세상 그 누구보다 괴상하다는 데에 내 전 재산을 걸겠다.
이렇게 싫어하는 티를 내는데도 페어를 계속 유지하려는 데는 페어의 버프 때문인가 싶기도 했다. 아니면, 놈이 마신 자백제에 머리가 헤까닥하는 성분이 들어 있던가.
유세림과 함께 있으면 시간은 더럽게도 가지 않는다. 유세림이 뭐라 떠드는 말은 전부 낱낱이 내 귀를 스쳐 지나간다.
요즘의 나는 유세림과 단둘이 있어야 할 때면 피곤하다거나 힘들다는 핑계를 대고 매일 누워 있거나 잠들어 있는다. 잠든 사이에 유세림이 기분 나쁜 짓을 할 때도 있긴 하지만, 보통 유세림은 제 눈이 닿는 곳에 내가 있기만 해도 더는 건드리지 않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유독 징그럽게 들러붙었다. 나는 생각을 거듭하다가 유세림에게 말했다.
“갈비뼈 부러뜨린 것 때문에 이러는 거냐?”
“이러는 거냐는 게 무슨 의미죠?”
“자꾸 짜증 나게……. 됐어.”
“많이 아팠습니까? 저도 놀라서 힘 조절을 약간 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내게는 넙죽넙죽 나오는 미안하다는 말이 표유정에게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던 걸 보면 이 새끼도 참 어디서 칼 맞아 죽기 딱 좋은 성격인 것 같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순간 백희도를 떠올렸다. 백희도를 만나지 못한 지 벌써 한 달이나 되었으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나 같은 건 벌써 잊고, 혈갑 만들기에 몰두하고 있으려나? 아니면…… 혹시라도.
백희도도 나를 생각할까.
나처럼 매일 생각하고 있을까.
하지만 감상적인 생각은 언제나 유세림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이번엔 나를 뒤에서 끌어안고는 숨을 크게 들이마셔서 기분을 더럽게 만든 것이다. 오늘 유세림은 내 갈비뼈를 부러뜨린 일 때문인지 유독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