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페어요이? 그게 뭐예요이?]
“페어!?”
“페어라니…… 마, 말도 안 돼!”
“…….”
나는 이 자리에서 곧장 도망쳐 버리고 싶었지만, 유세림은 그런 내 생각을 읽은 듯 팔을 꽉 붙들었다. 그러곤 웃으면서 말했다.
“네. 그래서 앞으로 한솔 씨는 제 가까이서 파티를 수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성규림 씨였다.
“축하드려요……!”
“…….”
[축하한다요이! 뭔지는 모르겠지만요이?]
“……신기하군.”
나는 원치 않는 축하 세례 속에서 툭 치면 눈물이 한가득 떨어질 것 같은 표유정과 눈을 마주쳤다.
“어, 어떻게 페어가…… 되신 거죠?”
가느다란 떨림이 묻은 표유정의 물음에 성규림 씨는 ‘앗차’ 싶은 얼굴로 뒤늦게 입을 다물었고, 나 역시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오직 유세림만이 태연했다. 놈은 그간 표유정이 저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제가 페어를 요청했고, 한솔 씨가 수락했습니다.”
‘……강제로 말이지.’
나는 놈의 교묘한 화법에 치를 떨며 주먹을 꽉 쥐었지만, 다른 파티원 눈에는 보이지 않은 것 같았다. 다만 김재호가 뭔가 마땅찮은 듯 나와 유세림을 쳐다보긴 했으나 끼어들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하지만, 하지만…… 세림 님! 저는……!”
표유정은 끝내 눈물을 보였고, 그녀의 눈에 서린 원망과 슬픔은 내가 아닌 유세림에게 닿았다.
하지만 유세림은 이번에도 태연하게 말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
그 말에 표유정은 충격 받은 얼굴로 유세림을 쳐다봤고, 다른 파티원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그간 표유정은 확실하게 자신의 마음을 유세림에게 표현해 왔다. 그런데 갑자기 나와 페어를 맺었다고 하니 그녀는 물론 모두가 거북함을 느끼는 것이다.
‘쓰레기 새끼.’
나는 속으로만 유세림을 욕하면서 마찬가지로 같이 쓰레기가 되어 버린 내 처지를 비관했다.
2주간 유세림은 내가 반항하면 할수록 자신이 어떤 짓까지 할 수 있는지를 충분히 알려 줬고, 나는 지금 학습된 고통으로 인해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고 있는 차였다.
그런 처지가 굴욕적이었으며, 동시에 나 자신에게 답답함을 느꼈다. 다른 이들에게 유세림의 페어로서 소개 받고 있는 이 상황 역시 끔찍했고 말이다.
“아, 닙니다…….”
그래서 표유정의 얼굴이 멍해졌다가 급격히 어두워지며 느릿하게 대답했을 때는 나도 모르게 한발 앞서나가 해명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읏……!”
딱 그 타이밍에 유세림이 내 목에 남긴 페어 인장을 힘주어 꾹 누른 것이다.
어젯밤 내내 놈이 깨물어 댄 곳이라 즉각적으로 신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나는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유세림의 팔을 최대한 밀어냈다. 놈은 그제야 내 팔뚝을 놓아주었다.
“…….”
표유정은 그런 나를 무표정하게 쳐다봤는데, 그녀의 얼굴은 나를 쳐다볼 때 잠시 일그러졌다가 다시 밋밋해졌다.
나는 그녀가 한 가닥 흘린 눈물을 소매로 닦고, 유세림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을 멍청히 쳐다봤다.
유세림은 그런 내게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어딜 보고 있습니까?”
“…….”
“나와 있을 땐 나에게 집중하세요, 한솔 씨.”
‘좆까.’
나는 이번에도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놈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어쩔 수 없이 곁으로 다가갔다.
유세림은 일단 내가 곁에 다가온 것만으로 만족했는지 더는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 * *.
촤악―!
이후, 던전으로 이동하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나는 원치 않았지만 어쨌든 유세림과 경험치가 공유되었기에 급속도로 성장했다.
[플레이어: 한솔
레벨: 80
직업: 디버퍼
등급: C
스킬:
―무거운 걸음 (위력 30/31)
―어두워진 눈동자 (위력 30/31)
―뒤집어쓴 가죽 (위력 30/31)
―? (위력 1/20)]
물음표를 제외한 최대 총량도 1씩이나마 늘어났다. 유세림은 내 몸놀림이 미세하게 빨라진 것을 눈치채곤 나에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레벨이 많이 오르지 않았습니까?”
“…….”
쩔 해 줬다고 생색이라도 내겠다는 건가 싶어 인상을 찌푸리자, 유세림은 두 마리 몬스터를 그대로 목을 꺾어 부수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가까이 와서 지껄인 소리가 가관이었다.
“안 들렸습니다. 뭐라고 했죠?”
“아무 말도 안 했어.”
“앞으론 꼭 대답해 주세요.”
“…….”
“목소리가 듣고 싶습니다.”
놈은 그 말을 하면서 딱히 목소리를 낮추거나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아마 파티원에게 다 들렸을 것이다.
“……그래.”
나는 어금니를 으득 물면서 하는 수 없이 대답했고, 유세림은 내 반응이 흡족한 듯 다시 입꼬리를 올렸다.
‘무슨 파티가 제 연애 놀음하는 곳인가.’
나는 속으로만 빈정거리면서 유세림이 내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주변에 저주를 남발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마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왜냐면 내게 다가오는 몬스터는 애초에 유세림이 잡아서 모조리 죽여 버렸고, 던전을 도는 내내 놈은 온통 내게만 초점을 맞춰서 쓰잘머리 없는 헛소리만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놈은 이제 내가 스킬을 날리는 방식까지도 통제하려고 들었다.
“저주 반지는 이제 쓰지 마세요. 빈혈이 온 것 같습니다.”
나는 그 말에 대번에 정색하며 대꾸했다.
“이 정도로는 빈혈이 오지 않아.”
그러자 유세림은 가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느릿하게 말했다.
“안색이 창백해져서 걱정됩니다.”
“괜찮다고 말했어.”
“계속 고집을 부리실 겁니까?”
“…….”
‘개새끼!’
나는 놈의 입에서 ‘고집’이라는 단어가 나오거나 하면 놈이 기분이 상했다는 걸 학습한 상태였다.
“…….”
굴욕감이 들었지만, 더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기분을 거스르지 말 것. 그러지 않으면 던전 공략이 끝나고 유세림이 내게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공포와 굴욕으로 입을 다문 나를 유세림은 마치 개새끼 다루듯 머리를 쓰다듬었고, 내 분노는 차곡차곡 더해졌다.
나를 제 액세서리처럼 데리고 다니려고 하려는 게 아닐까 싶었던 내 예상은 애석하게도 적중했다. 나는 그때부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오직 유세림의 발끝만 쳐다봤다.
‘언제쯤이면 이 새끼가 나에게 질리게 될까?’
내 손발을 묶고 통제하려는 이 모습을 언제쯤이면 안 봐도 되는 걸까. 유세림을 어떻게 해야 죽일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놈을 따라 절벽 길을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었다.
후두둑―.
우리가 걷는 길 아래론 용암이 흐르고 있었고, 위로는 라몬의 부하들인 ‘심판자들’이 크고 기다란 낫을 휘두르는 판국이었다.
당연히 발 디딜 틈 없는 곳에서 운신의 폭이 자유롭지 않은 우리는 수비하면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즉, 파티원에게 방어막을 쳐 주는 표유정의 스킬이 무척 중요했다.
하지만 표유정은 나에게 아무런 방어막도 쳐 주지 않았다. 그녀의 죽은 눈을 보면서 내게는 왜 실드를 쳐 주지 않냐고 닦달할 수도 없었기에 나는 그저 답답한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파티가 개 같은 건 개 같은 거고, 일단 여기서 살아남고자 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 말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실드가 필요 없기도 했다. 유세림이 내게 접근하는 심판자들을 전부 죽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튀어 오르는 용암만 주의하며 천천히 이동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꺄아악!”
갑자기 뒤에서 표유정의 비명이 들렸다.
나는 그녀가 심판자들에게 발밑을 공격당해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몸을 날려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
표유정은 당황스럽다는 양 눈을 크게 떴고, 그리고 내 허리에는 예상대로 유세림의 채찍이 감겨 있었다.
그 유세림에게도 갑작스러운 상황인 모양인지 힘 조절이 여의치 않은 듯, 채찍이 휘감기자마자 갈비뼈가 두 대는 부러진 것 같은 고통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표유정을 잡은 손을 놓지는 않았다. 그녀가 울면서 나에게 말했다.
“어째서…… 어째서 당신이야!”
“으윽……. 너, 발이나 조심해. 발에 빨리 실드를 걸어!”
나는 표유정의 감상적인 말에 대답해 줄 여유는 없었다. 다만 그녀가 이 던전, [라몬의 연옥]에서 다리를 잃고 유세림에게 버림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녀에게 다리에 실드를 걸라고 말했다.
표유정은 내 말에 처음엔 반감을 품은 듯했으나, 곧 아래에 커다란 낫을 들고 다니는 심판자들을 보고는 겁에 질린 듯 표정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