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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31/104)

30화

그러는 와중에 유세림이 나를 돌아봤다. 놈의 창백한 얼굴에는 희미한 기쁨이 감돌고 있었다. 머리로는 그 미소가 역겨웠지만, 가슴은 기분 좋게 뛰기 시작한다.

나는 미칠 것 같은 갑갑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러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유세림이 내 앞에 와 있었다. 

“오래 씻는군요.”

“…….”

“기다리는 동안 아무것도 못 했습니다.”

그러면서 유세림은 뭔가를 더 말하려고 했지만, 나는 놈의 말을 끊고 가장 중요한 질문을 했다.

“……페어를…… 그만두는 방법은 뭐가 있지?”

유세림의 미소가 잠시 사라졌으나 그는 곧 덤덤하게 말했다.

“상호 협의 하에 그만두거나 한쪽이 죽으면 됩니다.”

나는 놈에게 죽어 버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것도 페어의 영향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아 주먹을 꽉 쥐고 최대한 온건히 말을 했다.

“그럼…… 그만두는 게…… 어때?”

“서로 좋아하는데, 왜 그만두어야 하죠?”

“…….”

“페어를 맺으면 장점이 많습니다. 일정 수준의 경험치가 공유되고, 같은 파티에 있으면 공격력도 더 올라가죠. 내내 버프를 받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

“서로의 위치를 공유할 수 있는 데다 상대방이 위급한 경우, 일정 범위 안이면 자신이 있는 위치로 데리고 올 수도 있죠.”

나는 유세림의 말을 곱씹으면서 놈이 왜 강제로 페어를 맺었는지 이해했다. 대단한 버프였으니까. 하지만…… 그럼 이 끔찍한 기분은 대체 누가 보상한다는 말인가.

나는 말을 마친 유세림이 팔을 뻗어 오는 것을 거부하려 했으나, 살짝 밀치는 것에 그치며 끝내 놈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유세림은 젖은 내 머리칼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무엇보다 기분이 좋습니다. 어디에 있든 당신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나는 이쯤에서 유세림의 빌어먹을 착각을 부숴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니야.”

“네?”

“나는 너와 페어가 되는 걸 원한 적 없어.”

이게 얼마나 끔찍한 기분인지, 잇몸에 피가 날 정도로 양치하고 나온 이유에 대해서 최대한 잔인하게 말하고 싶어 입을 열려던 참이었다. 

유세림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내게 말했다.

“페어는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결속 주문 중 하나입니다.”

“뭐……?”

“당신과 페어를 이뤘다는 것 자체가 당신이 내게 사랑 받고 싶다고 생각한다는 뜻이죠.”

나는 충격을 받고 부정했다.

“아니야. 나는 그런…… 그런 적 없어.”

“자백제를 마시게 한 건 미안합니다. 하지만, 자백제 외에 다른 것은 쓴 적 없습니다.”

유세림은 그렇게 말하며 내 뒷덜미를 만졌다. 그러자 짜릿한 감각과 함께 심장의 울림은 더 크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유세림이 그런 내게 사형을 선언하듯 말했다.

“당신이 내게 사랑 받고 싶고, 나를 원한다고 생각해야 페어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페어를 시도해 본 거고요. 당신이 한 말을 좀 더 신뢰하고 싶었기 때문이죠.”

“…….”

“결과적으론 잘된 것 아닌가요? 자백제를 마시게 한 일로 저를 용서할 수 없다고, 억지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나는 그 말을 듣자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어졌다. 그럴 리가 없다고, 내가 왜 너 같은 것을 좋아하느냐며 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림아!’

그때, 네가 나를 되돌아봤다면…….

“어째서 지금이야…….”

“네?”

“어째서…….”

나는 결국 유세림의 멱살을 잡고는 이마를 놈에게 들이받으며 이를 악물었다. 물론 유세림은 미동도 없었지만, 나는 계속해서 주먹으로 놈을 내리쳤다.

“왜 이제 와서야 날 좋아한다는 거냐고!”

유세림은 벌게진 내 눈을 보며 당황한 듯 대답하지 못했다. 

* * *

나는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의외로 유세림은 발작하다 돌연 집 밖으로 나가려는 나를 말리지 않았다. 

‘서로의 위치를 공유할 수 있는 데다 상대방이 위급한 경우, 일정 범위 안이면 자신이 있는 위치로 데리고 올 수도 있죠.’

아마도 서로의 위치를 공유할 수 있다는 저 어처구니없는 기능 때문에 나를 놓아주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나는 이미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니까.

역시나 내 생각대로 유세림은 막 신발을 신는 나를 보더니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열두 시까지는 집에 오세요.”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내 집은 따로 있어.”

“그럼, 제가 거기로 가겠습니다.”

“무슨…….”

“페어는 스킨십을 자주 할수록 안정되고 발전됩니다. 제 생각에 지금 한솔 씨는 조금 불안정한 상태인 것 같아서요.”

한마디로 밤엔 나를 데리고 스킨십을 하겠다는 선포였다. 소름이 끼친 나는, 유세림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너와 하는 스킨십은 기분 나빠. 서툴다는 뜻이 아니야. 너는…….”

야만적이라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으나 이번에도 유세림이 먼저 말했다.

“입술을 뜯었던 건 사과드립니다. 순간적으로 절제하지 못한 건 처음이었습니다. 그래도 앞으로는 점점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진짜 또라이구나.’

나는 놈이 말이 통하지 않는 사이코라는 것을 인식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유세림은 그게 내가 제 말에 순응했다는 뜻으로 알아들은 것인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있는 힘껏 현관문을 쾅! 하고 닫고 나왔다. 

‘어디로 가지……?’

사실 온통 생각나는 건 백희도뿐이었다. 하지만 유세림이 내가 백희도와 있는 걸 알면 또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결국 쓸쓸하게 내 집으로 돌아가서, 핸드폰을 켰다. 그리고 백희도의 번호를 눌렀다.

뚜르르―.

[뭐야, 웬 전화?]

백희도는 딱 한 번의 신호음이 울리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나는 녀석의 껄렁한 목소리에서 이상하게 안도감이 들었다.

울컥 눈물이 솟았지만 닦지도 못하고, 괜히 목소리를 높여서 녀석에게 말했다.

“백희도, 너 혹시 페어라는 게 뭔지 알아?”

[페어? 알긴 알지.]

나는 여기서 애써 이를 악문 채 백희도에게 물었다.

“……그거 깨는 방법을 조사해 줄 수 있냐?”

[……페어를 깨는 방법? 상호 협의하거나 한 명이 죽어야 해.]

그리고 백희도는 유세림이 했던 말을 그대로 했다.

“…….”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절망스러웠기 때문이다.

‘당신이 내게 사랑 받고 싶고, 나를 원한다고 생각해야 페어를 이룰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론 잘된 것 아닌가요? 자백제를 마시게 한 일로 저를 용서할 수 없다고, 억지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무슨 일인데?]

“내가 원한 게 아니야…….”

[…….]

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수화기 너머 백희도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내 마음속에서는 이런 질문이 생겼다. 만약 내가 유세림과 페어를 맺은 걸 알게 되면, 백희도도 그렇게 생각할까? 말로만 유세림을 증오하니 죽이고 싶다고 해 놓고, 실제론 유세림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고…….

그런 한심한 새끼가 나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드니 고통스러워져서 이를 악문 턱이 다 얼얼할 지경이었다.

그때, 백희도가 말했다.

[등급 차이가 심하면 강제할 수도 있겠지.]

“……뭐?”

[페어 말이야. 유세림이 R등급이니까, 네가 저항하지 못할 다른 방법을 써서 결속했을 수도 있겠다고.]

“……!”

[또 울고 있냐? 그러지 말라니까.]

나는 백희도의 눈치에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백희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걱정하지 마.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내가 찾아 줄게.]

“……어떤, 어떻게?”

그러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누군가 내 현관문을 똑똑 두드렸다. 나는 이 시간에 내 집에 찾아올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긴장하며 밖을 쳐다봤다.

“백희도, 잠시만.”

[그래.]

나는 백희도에게 양해를 구하고 천천히 현관문 앞으로 다가갔다.

“누구시죠?”

“접니다. 유세림.”

“…….”

나는 그 말에 현관문 중앙에 뚫려 있는 렌즈를 통해 밖을 봤다. 

거기엔 정말로 유세림이 서 있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손에는 꽃다발까지 들고서 말이다. 잠시 숨통이 트였던 기분은, 꽃다발을 사 들고 온 유세림을 보자마자 산산이 조각났다.

“……돌아가세요.”

욕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페어 효과 때문이었지, 마음속으로는 수없이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세림은 열어 주지도 않은 현관문을 가볍게 부수고 들어왔다.

“이게 뭐 하는 짓……!”

“열두 시까지 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그제야 벽에 걸린 시계를 봤고, 시간이 열두 시 오 분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는 식은땀이 났다.

나는 서둘러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이번엔 백희도로부터 전화가 계속 걸려 왔다.

[♬♪♬♪♬♪♬♪―.]

“백희도입니까?”

유세림은 무표정하게 물었고, 나는 휴대폰을 내 몸 뒤로 감췄다. 하지만 곧바로 다가온 유세림에 의해 핸드폰을 빼앗기고 말았다.

[주술사…….]

“앞으로 내 페어에게 연락하지 마.”

[뭐? 설마 너, 유세림―.]

뚝.

놈은 멋대로 전화를 끊은 걸로도 모자라 핸드폰을 벽을 향해 던져 부셨다. 그래 놓곤 제가 가져온 꽃다발을 테이블 두고, 핸드폰을 빼앗긴 채 주먹을 쥐고 있던 나를 가볍게 침대 위로 쓰러트렸다.

이어 유세림이 내 목에 키스하며 짐승처럼 헐떡일 때, 나는 눈을 감고 필사적으로 놈을 밀어냈다. 물론, 귓가에 닿는 목소리에 곧바로 상처를 입었지만 말이다.

“앞으로는 백희도와 전화도 하지 마세요.”

“……!”

“그를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유세림은 개처럼 헐떡였으나 개는 그가 아니었다. 그건 나였다. 놈이 쥔, 페어라는 목줄에 매인 개.

치를 떨며 뭐라 말하려는 순간 유세림이 내게 키스했고, 머리를 뚫고 치솟던 분노는 극심한 두근거림에 의해 잠잠해졌다.

육체는 정신을 지배한다. 나는 옷을 벗기려는 놈에게 애원해야 했다.

“그만…….”

“기분 좋지 않습니까?”

유세림은 내 아래를 힐끗 보며 그렇게 말했고, 나는 수치심과 절망을 느꼈으나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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