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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30/104)

29화

나는 나를 계속 주시하는 유세림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차를 한 모금 입안에 담았다. 혀에 닿은 차는 아주 달았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싸한 느낌이 들어 도로 뱉으려던 찰나, 유세림이 내 이름을 불렀다.

“한솔 씨.”

“……네.”

대답해야겠단 생각에 싸한 느낌마저 잊고 꿀꺽 삼킨 후 대답하고 나니, 왠지 모르게 아까까지 곤두서 있던 신경이 조금 누그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유세림은 저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차를 그제야 내려놓고선 가만히 나를 쳐다봤다.

‘망할.’

그 태도와 눈빛을 마주하고서야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놈이, 이 차에 무슨 짓을 한 것이다.

그걸 깨닫자마자 몸에 힘이 풀렸고, 쥐고 있던 찻잔을 놓쳤다.

탁― 데구루루…….

찻잔이 떨어지며 안에 담긴 찻물이 쏟아져 바닥을 엉망으로 만들었으나 유세림도 나도 거기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

나는 멍하니 유세림을 바라봤고, 유세림은 그런 나를 계속 살펴보더니 침대 옆, 아까부터 피워 두었던 향을 입으로 후― 불어서 껐다.

이제 보니 유세림이 준비한 건 차뿐만이 아니었다. 저 향에도 무슨 짓을 한 것이다. 혹시나 내가 차를 마시지 않을 상황을 대비해서…….

“백희도랑 잤습니까?”

그리고 유세림은 나에게 돌아와서 저열한 질문을 했다. 나는 입을 열고 싶지 않았지만, 입이 저절로 벌어지며 솔직한 대답을 내뱉었다.

“아뇨.”

“백희도를 좋아해요?”

“……네.”

“그럼, 나는 어떻게 생각하죠?”

나는 그 말에 인상을 찡그리면서 입을 다물려고 했지만,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저항할 수 없는 힘을 느꼈다. 유세림이 탁자를 톡톡, 두드릴 때마다 빨리 대답해야 한다는 이상한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했기 때문이다.

그치만 말을 하더라도 솔직하게 대답해서는 안 된다는 것 역시 분명했다. 나는 말하고 싶지 않아서 어금니를 사리물었으나, 곧 눈물이 줄줄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보며 유세림이 부드러운 말투로 끔찍한 소리를 했다.

“저항하지 마요. 당신이 마신 건, 자백제니까.”

“아으…….”

“계속 대답하지 않고 버티면 머리가 많이 아플 겁니다.”

“…….”

“나를 왜 피하는지, 또 이따금 너무 익숙한 듯이 나를 대하는 당신의 태도…… 그런 게 거슬려요, 한솔 씨.”

“……하아.”

“그래서 머릿속이 궁금해졌습니다. 대답하세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당신을…….”

나는 최면처럼 머릿속을 맴도는 유세림의 질문에 저항하려 했으나, 놈이 덜덜 떠는 내 손을 꽉 붙잡았을 때 결국 저항하는 것을 멈췄다.

나는 고개를 들고, 눈물을 흘리며 놈에게 말했다.

“사랑했습니다…….”

필사적으로, 지금은 증오한다는 말까지는 내뱉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물었다.

하지만 내가 내뱉은 그 말 한마디가 유세림에게는 어떤 충격을 안겨 준 모양이다. 그가 눈을 크게 뜨고, 나에게 다시 물었다.

“언제부터?”

“……처음, 봤…… 을 때…….”

“…….”

유세림은 심각한 고민에 빠진 것 같았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내 표정을 몇 번이나 살피더니 중얼거리듯이 변명했다.

“나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읽지 못합니다.”

“…….”

“오로지 적의만 감지할 수 있어요. 그래서 나는 당신이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만약 여기서 유세림이 내게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면, 나는 놈에게 내가 과거에서 돌아왔다는 얘기까지 다 하게 내뱉었을 수도 있었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기에, 나는 비명을 지르는 두통을 삼키고 놈에게 주절주절 대답했다.

“나한테…… 관심이 없어서 슬…… 펐어요.”

이것은 과거의 내 생각이니 거짓은 아니었다.

“당, 신과 나의…… 격차에 대해 매, 일 생각, 하면서 좌절…… 했었고…….”

“…….”

“언젠가부터는 당신의 무관심이 미워서…… 죽이…… 고…… 싶…….”

나는 다시 혀를 깨물었고, 유세림은 시뻘게진 내 얼굴을 보고는 마치 숨통을 트여 주듯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더 말하지 않아도 좋아요.”

“하아, 하아, 하아…….”

나는 그제야 머리를 조이는 고통에서 벗어나며 찻물로 축축해진 바닥에 쓰러졌다.

유세림은 그런 나를 한 팔로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내 허리춤을 끌어안다가, 백희도가 내게 준 그 허리띠가 손에 걸리자 잠금장치를 풀었다. 그리고 마치 쓰레기라도 되듯 그것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한솔 씨.”

“…….”

“저도 이 자백제를 마셔 봤습니다. 그리고 계속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봤어요.”

‘미친놈…….’

나는 구역질 나는 놈의 목소리에 진절머리를 쳤지만,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유세림은 내 일그러진 표정은 보지 못한 채 나를 양팔로 꽉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저는,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

“하지만, 어떻게 대해야 할지는 모르겠어요.”

자백제를 먹인 미친놈이 내게 사랑을 고했다.

나는 순간 눈물도 그친 채 멍하니 놈을 쳐다봤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짚어 나갈 게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세림은 확고히 말했다.

“당신도 잘 모르는 것이겠죠. 날 사랑한다고 했지만, 백희도가 준 싸구려나 걸치고 오지 않았습니까.”

“…….”

“오늘 집중을 못 한 건 당신뿐만 아니라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이 상태를 더 유지해선 곤란하다고 여겼고요.”

“…….”

“그래도 다행히 당신이 저를 사랑하고, 저도 당신을 좋아하니 최악은 면했군요.”

“…….”

나는 충격으로 몸이 굳었고, 유세림은 그런 내게 고개를 숙였다. 저항하지 못한 채 받아야 하는 키스는 불쾌하고 역겨웠다. 

하지만 나와 달리, 유세림의 얼굴은 점점 상기되어 갔다.

“처음입니다. 이런 행동을 했는데 더럽다고 느끼지 않은 사람은…….”

“…….”

나는 다시 입을 맞추려는 놈을 피해 얼굴을 돌렸지만, 유세림은 집요하게 쫓아왔다. 

내가 입술을 다물자 놈은 내 입술에 피가 날 정도로 찢어 물고, 다시 혀를 넣었다. 지독히 자기 위주의 입맞춤이었다. 

나는 키스를 할수록 차갑게 식어 갔고, 유세림은 짐승처럼 광폭해졌다. 

“……싫어. 하지 마.”

“저흰 이제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아닌가요?”

유세림은 내 옷을 벗기며 그렇게 물었고, 나는 역겨움에 온몸을 떨었다. 놈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상의가 벗겨진 내 맨살을 눈으로 훑었다.

“당신과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

나는 포기했다. 유세림의 팔 하나도 벗어나지 못하는 지금 상태에서 이 미친 새끼가 하는 짓을 다 막아 낼 수는 없는 일이니까. 

다만……. 

‘꼭 죽여 버릴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죽여 버릴 거야…….’

속으로 유세림을 저주하며 이를 갈았다.

그런데 유세림은 힘으로 내 몸을 뒤로 돌린 뒤, 갑작스럽게 내 목을 깨물었다. 나는 놈이 뭔가 내게 굉장히 나쁜 짓을 할 거라는 예감이 들어,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만해!”

유세림은 내 비명에 잠시 목을 물었던 걸 놓고는 대꾸했다.

“나쁜 일이 아닙니다. 당신과 페어를 맺으려는 것뿐이에요.”

“……!”

“긴장하지 마세요. 아프진 않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화끈한 무언가가 내 목 뒤를 지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나는 반항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싫어! 싫다고……! 싫…… 우웁!”

나는 내 입에 물려진 유세림의 팔뚝을 있는 힘껏 물었지만, 유세림은 오히려 흡족한 것 같았다.

“네. 그렇게 무는 겁니다. 잘했습니다.”

“…….”

“끝났어요.”

함정에 걸려든 기분이었다.

‘페어’.

보통은 각성자끼리 사랑에 빠졌을 때 맺는 파티 이상의 강제력이 있는 관계를 뜻한다. 내가 아는 건 그것뿐이었다. 페어 관계의 각성자를 만나 본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나는 유세림에게 페어를 ‘당했다’. 그런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이론으론 알고 있었지만, 그게 정말 가능할 줄은 몰랐다.

* * *

“…….”

나는 목 뒤에 선명히 남은 문신 같은 인장을 보면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욕조 벽에 기댔다.

쏴―.

아무리 목을 씻어도 인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유세림의 억지에 의해 강제로 물었던 놈의 팔목에 나타난 인장 역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몸을 씻었다. 뭔가 더럽고 역겨운 것이 몸에 가득 차오른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씻어도 그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방심의 대가……. 그래, 내가…… 다 방심한 탓이야.’

끼릭.

수전을 잠그고 몸이 퉁퉁 불 때까지 씻었던 것을 수건에 꾹꾹 눌러 닦고 나니 허망한 마음은 더 심해졌다.

문을 열자, 내가 갈아입을 옷이 정갈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여기는 백희도의 호텔 방이 아니다. 나는 지금 유세림에게 끌려와 있는 상태였다.

굴욕적이었지만, 어쨌든 맨몸으로 나갈 순 없기에 놈이 준비한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거실에서 노트북으로 뭔가를 하고 있는 유세림을 발견했다.

두근, 두근.

이전과 다르게 심장이 빠르게 뛰고, 유세림의 외모가 더 아름답게 보인다. 빌어먹을. 페어를 맺으면 사랑의 감정을 극대화하는 효과라도 있는 건지, 유세림을 보는 내 감정을 왜곡하고 또 강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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