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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26/104)

25화

나는 백희도가 일부러 대답을 안 하는 건지, 아니면 무심한 건지 알 수 없어서 한 발 더 가까이 가서 다시 물었다.

“머리카락 길게 기르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

“예쁘잖아.”

“뭐?”

“예뻐서 기른다고.”

나는 그 대답을 듣고서야 백희도가 기르는 이유를 말해 주는 걸 회피한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뻔뻔하게 예뻐서 기른다는 놈의 대답이 우스워 손을 뻗어 보았다. 백희도는 내가 제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만지는 걸 힐끗 쳐다보기만 하곤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의외로 얌전한 그의 태도에 당황한 건 나였다.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이렇게 머리 만지는 거.”

“만지지 말라고 손목이라도 잘라, 그럼?”

“아니…….”

“만지고 싶으면 만져. 음흉하긴.”

“……이익! 됐어!”

사실, 신경이 쓰여서 그랬다. 어제의 여파를 채 떨쳐 내지 못한 건 나뿐인 걸까?

나는 눈가에 조심스레 내려앉았던 입술의 감촉과 내 입술을 물던 부드럽고 따뜻한 접촉에 지금까지도 머릿속이 복잡하단 말이다. 

하지만 너무 태연한 놈의 태도 때문에 결국 어제의 일은 나 혼자만의 일인 것처럼 덩그러니 남아 마음속을 굴러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저 얼굴로 몇 명을 꼬드겼을까…….’

분명히 처음은 아니었겠지. 어쩌면 백희도는 그냥 별생각 없이, 한번 던져 본 미끼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하게도 그 행동에 나는……. 

‘아, 씨. 생각하지 마!’

나는 괜히 백희도의 머리카락 끝을 잔뜩 헝클어 두곤 손을 뗐다. 백희도는 그저 웃기만 했다.

* ♟ *

“넌 몸뚱어리도 유리 같으면서 실드 아티팩트가 하나도 없냐?”

“그게 필요하다고 뚝딱 생기는 건 줄 알아? 되면 나도 바로 샀지!”

백희도는 제멋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지금도 도통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나를 타박하는데, 사실 C등급이 나 정도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는 것만 해도 대단한 수준이다. 그런데 이젠 실드가 없다고 뭐라고 하고 있다.

내가 저처럼 R등급이면 당연히 온몸에 아티팩트를 주렁주렁 달고 다녔을 것이다. 그런 차이도 생각을 안 하고 말하는 저 무심함에 속이 팍 상했다.

나는 그 타박이 마치 내 능력 부족에 대한 비난처럼 들려서 백희도에게 짜증을 부렸다. 그런데 백희도는 화를 내는 나를 보면서 되레 투덜거렸다.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이럴 땐 그냥 하나 사 달라고 조르면 되지.”

“뭐?”

“넌 좀만 사근사근하면 될걸, 매번 독 오른 고양이처럼 군단 말이야.”

그러면서 백희도는 내 손목을 잡더니 “잡화상 열기.”라는 이상한 말을 외쳤다.

“……어?”

그러자 허공에서 마치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것처럼 처음 보는 색의 게이트가 생겼다. 

나는 그 게이트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이, 이건 뭐야?”

“엄청 좋은 수준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쓸 만한 아티팩트를 파는 곳이지. 아마 이 게이트를 여는 건 A등급부터 가능한 걸로 알아.”

……아니, 등급이 높으면 이런 혜택도 있다고?

나는 입을 떡 벌린 채 게이트를 넘는 백희도의 손에 이끌려, [잡화 상점]이라 쓰인 널따란 시장에 도착했다.

그곳엔 누가 봐도 몬스터로 보이는 수상한 자들이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곤 좌판을 연 채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무기를 더 날카롭게! 샤프클로 9강을 단돈 250골드에!]

[자아, 전투 중에 사악한 힘을 한 번 빌릴 수 있는 마술 램프를 500골드에 팝니다!]

[힘을 50퍼센트 증폭해 주는 1회용 버서커 증폭 스크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한 장씩 가지고 있는 건 어떨까요? 한 장에 50골드! 열 장을 사시면 한 장을 무료로 드립니다!]

“어, 어떻게 이런…….”

“이곳 몬스터들은 인간들과 교류하고, 여기서 통용되는 화폐를 사용하지. 게임으로 치면 일종의 상점 NPC라고 볼 수 있어.”

나는 백희도의 설명을 들으며 끝없이 이어진 듯 보이는 시장을 눈으로 훑었다.

딱 보기에도 파는 이도 많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아이템을 구매하려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내 생각보다 A등급 이상의 각성자가 많다는 얘기였다.

“…….”

나는 입을 벌리고 있다가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 입을 꾹 다물었다. 백희도는 그런 나를 내려다보곤 픽 웃더니, 여전히 나를 붙잡은 채 거침없이 어딘가로 향했다.

[신기 레플리카]

백희도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이 괴상한 간판이 달린 상점이었다. 

잘 살펴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법한 구석진 상점엔 노인으로 보이는 주름 가득한 몬스터와 먼지가 쌓인 액세서리류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노인 몬스터는 심지어 졸고 있는지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었다.

“어이, 영감. 실드 아이템 하나만 추천해 줘. 여기, 얘가 찰 거야.”

[……또 너냐?]

그런데 잠든 줄 알았던 몬스터가 금방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대답해 왔다. 겉보기에는 오크 같았는데, 목소리에서는 인간과 큰 차이가 없었다.

‘신기하다…….’

[방패나 들어. 여기서 찾지 말고.]

그런데 무슨 상황인지 여기 상점의 주인은 정작 우리에게 자신의 물건을 팔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어떻게 된 거냐는 의미로 백희도를 쳐다봤고, 백희도는…….

“자꾸 이럴 거야? 오늘은 영감 고집 좀 꺾어야겠는데.”

[미친놈. 몇 번을 와도 너한텐 안 판다고 했다.]

“내가 낄 게 아니라, 얘 줄 거라고.”

백희도는 상점 주인과 티격태격하면서 먼지 쌓인 액세서리들을 이리저리 만지고 있었다.

나로서는 먼지가 쌓인 건 둘째 치고 자잘한 흠집이 나 있는 등 물건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는 데다가 대놓고 [레플리카]라고 걸어 놓은 상점에서 뭔가를 사고 싶진 않았지만, 백희도가 저 성질머리에 굳이 이 상점을 고집하는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으리라는 기대가 약간 있었다.

[……어이가 없군.]

“이 허리띠는 얼마야?”

[2만 골드다.]

“……뭐, 뭐?”

“흐음.”

하지만 정말로 이 상점의 주인은 우리를 쫓아낼 생각만 하는 것 같았다.

나는 2만 골드라는 엄청난 금액에 놀라 나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냈고, 백희도는 썩 대단해 보이지도 않는 그 보석 허리띠를 들고는 계속 고민 중이었다. 2만 골드라는 말을 듣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백희도에게 인상을 쓰면서 물었다.

“……야. 설마, 그거 사려는 건 아니지?”

하지만 백희도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허리띠만 만지작거리면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고민 중이야.”

“설마, 나한테 주려고?”

그런데 녀석은 이 질문에는 분명히 답했다.

“어.”

“뭐? 왜?”

“그야……. 넌 실드 아티팩트가 하나도 없으니까.”

“미, 미쳤냐?”

“왜?”

“아니……. 그걸 왜, 네가…….”

“몰라서 물어? 새로운 던전 가고 싶다며?”

“…….”

나는 너무나도 거침없이 치고 들어오는 백희도의 말이 장난인지 진담인지 구별이 안 됐다. 고작 그런 이유로 나에게 2만 골드나 되는 돈을 쓴다고……?

그래서 말문이 막혔는데, 찰나에 백희도는 그 보석 허리띠를 기습적으로 내 허리에 둘러봤다. 그리고 버클을 꽉 조이듯 채웠다.

그 모습을 본 신기 레플리카의 사장이 엄포를 놓듯 말했다.

[2만 골드라고 했다.]

그 말에 백희도가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여기.”

주머니를 받은 오크는 안에 있는 금액을 세어 보더니 의외라는 듯 혼잣말을 했다.

[오늘은 웬일로 고분고분하게 돈을 다 내지?]

녀석이 그간 여기서 어지간히 진상을 부렸던 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하지만 백희도는 당당하게 대꾸했다.

“그럼 가오 상하게 선물 주는 앞에서 흥정이나 해야겠어?”

[흠. 멍청해진 인간 수컷이로군.]

“…….”

나는 그 말에 이상하게 낯이 뜨거워져선 아무 말도 못 한 채 서 있었다. 백희도는 그런 내 얼굴을 보곤 씩 웃으면서 물었다.

“마음에 들어?”

“…….”

나는 외관과 다르게 착용할 때부터 놀랐던, 이 허리띠의 정보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삼계의 허리띠 레플리카

―스킬1: 실드1 (가장 외부의 실드로 공격 및 살기 감지 시 자동으로 몸 주위에 펼쳐짐)

―스킬2: 실드2 (실드1이 파괴되거나 그에 준하는 타격을 입을 시 새로 펼쳐짐)

―스킬3: 실드3 (실드 1, 2가 모두 타격을 입어 부서질 시, 중요 치명 부위에 새로 실드가 생성되며 상처의 20%를 치유함)]

무려 스킬이 세 개나 붙은 데다 스킬이 전부 연계가 되는 대단한 아이템이었다. 박혀 있는 보석들도 어느새 먼지를 날려 보내고, 새것인 양 내 허리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야, 너 근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나는 허리띠를 황홀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백희도에게 물었다. 녀석은 코웃음을 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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