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5/104)

24화

“백희도가 무엇을 약속했건 아니면 백희도에게…… 설령 마음을 주었다고 해도 그를 믿지 마세요. 상대가 누구든 웃으면서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바로, 내 눈앞에 있는 유세림.

과거, 유세림에게 내가 얼마나 헌신하고 그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했던가. 그러나 유세림은 나를 던전의 제물로써 내버렸고, 나는 죽고 나서야 그간 내가 해 왔던 모든 행동이 한낱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모욕감을 참지 못한 나는 유세림에게 물었다.

“당신은 뭐 다릅니까?”

“네?”

“유세림, 넌 뭐 다르냐고.”

“…….”

내 질문에 유세림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했으나, 이내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악문 나에게 손을 뻗어 왔다.

그는 꽤 거친 손길로 내 어깨를 돌려세웠다.

“당신은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봅니까?”

한참을 참았다가 묻는 것 같은 울분이 그의 말속에 녹아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유세림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가끔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것, 모를 줄 알았나요?”

“…….”

“백희도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나 본데, 나는…….”

“백희도랑은 상관없어!”

나는 그렇게 말하며 유세림의 손을 거칠게 떼어 냈다. 놈의 손이 닿는 곳마다 소름이 쫙 끼쳤기 때문이다.

“…….”

유세림은 내 거친 반항에 잠시 허공에 손을 멈춰 두었다. 

그리고 나는 잠시 씨근덕거리다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을 느끼며 이마를 한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옛날에 당신하고 비슷한 사람을 좋아했던 적이 있었어요.”

“무슨…….”

“그 사람은 내가 저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고, 마치 다 받아 줄 것처럼 굴다가 결국 나를 버렸죠.”

유세림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지만, 나는 과거 유세림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이제 당신이 싫어.”

“…….”

“파티는…… 마음대로 해요. 아무튼 나는 당신을 보면 그 남자가 생각나서 고통스러우니까.”

그렇게 말한 후 게이트를 연 나를, 유세림은 붙잡지 못했다. 그는 우두커니 서서 내가 백희도의 호텔 방에 들어서는 것을 가만히 쳐다봤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 시선을 느끼면서 게이트를 닫았다.

* * *.

“뭐냐?”

백희도는 씻고 나와서 제 침대에 엎드려 있는 나를 보곤 퉁명스레 물었다. 나는 퀘스트 아이템이 들어 있는 통을 백희도의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던졌다.

“어쭈? 아빠랑은 말 안 해요, 뭐 중2병 컨셉이냐?”

“…….”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얼굴을 들어 백희도를 쳐다봤다. 그러자 백희도는 눈물로 흐려진 내 얼굴을 보더니 말없이 다가왔다. 습한 냄새가 먼저 밀려왔다.

“유세림이 지랄했어?”

“비슷해…….”

“근데 왜 처울어. 잘하는 저주나 내리지.”

“…….”

“탈모나 발기 부전 되는 저주는 없냐? 그 두 개가 남자한텐 직빵인데.”

“하…….”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조금 웃었고, 백희도는 그런 내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줬다.

그건, 뭐랄까…… 너무 개인적인 위로처럼 느껴졌다. 지금의 나는 너무 약해져 있어서 그 정도의 접촉만으로도 마음이 울렁거렸다.

나는 추태를 부리기 싫어서 백희도에게 말했다.

“하지 마…….”

“뭘?”

“이런 거.”

“왜?”

하지만 백희도는 그렇게 말하며 내 침대에 걸터앉았고, 내 얼굴을 양손으로 붙들었다. 나는 흐려진 얼굴 사이로 백희도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달래 달라고 우는 거 아니었어?”

녀석은 그렇게 묻더니 내 눈가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뭐…….”

나는 너무 놀라서 창백하게 굳었다. 눈물도 언제 흘렸냐는 양 쏙 들어갔다.

하지만 백희도는 눈가에 입술을 쪽쪽 맞추고, 기어이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혀를 넣진 않았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방금 닦은 치약의 향이 났다.

“……왜?”

나는 입술을 떼고 나서야 멍하니 물었고, 백희도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너 우는 게 좀 그렇다고 했잖아.”

“그…… 그게 뭔데?”

“정말 몰라서 물어?”

나는 백희도의 눈빛에서 나를 낱낱이 벗겨 먹을 듯한 정염을 읽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고, 백희도는 굳이 쫓아오진 않았다.

하지만 눈빛은 끝까지 나를 훑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괴상한 무드는 백희도의 실실 웃는 미소로 인해 파삭 깨졌다.

“네가 약해 보이면 나도 흔들려, 주술사.”

“뭐, 뭐라는 거야!”

“한번 하게 해 줄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나는 그 말에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놈에게 욕을 했다.

“미친놈 아냐!”

“미친놈이 아니라, 원래 남자들은 다 좀 그래.”

“나도 남자야, 이 또라이야!”

그렇게 말하며 잡히는 대로 베개를 퍽! 집어 던졌지만 백희도는 훌쩍 피하곤 감흥 없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앞으로도 속상한 일 있으면 훌쩍거리면서 오라고. 그땐 오늘처럼 공짜로 달래 주진 않을 거지만.”

나는 그 말을 듣자 정말 있는 정 없는 정 오만 정이 다 떨어진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했다. 평소였으면 머릿속을 온통 점령했을 유세림에 관한 생각이 지금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백희도는 아침엔 호텔 룸서비스를 시켜 먹는 부르주아 작자였다. 

나는 하품을 하면서 팬케이크를 썰었고, 백희도는 내가 썬 팬케이크를 홀라당 집어서 제 입에 넣었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내 돈도 아니고, 저놈 돈으로 산 음식이라 별말을 못 했다.

그렇게 시중 아닌 시중을 들고 나니 어느새 오전 열한 시가 넘었고, 백희도는 제 검을 들고는 게이트를 열었다. 

“한 이틀 걸려.”

“던전 가게?”

“어.”

“나도 갈까?”

백희도는 그 말이 뜻밖이라는 듯 나를 쳐다봤다.

사실 나로서도 백희도랑 꼭 던전을 가고 싶은 건 아니었다. 다만, 백희도는 현재 화령교와 척을 진 사이였기 때문에, 혹시나 화령교의 추적에 목숨을 잃거나 운신이 힘들 만큼 다칠 수도 있어서 그것을 방지하고 싶었다. 뇌령검 사태야 흐지부지됐다지만, 그렇다고 백희도가 무적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니 말이다.

“그럼 옷 빨리 갈아입어.”

다행히 백희도는 별말 없이 나와 동행하기로 했고, 나는 아티팩트들을 챙긴 후 유세림의 파티원 복장을 입었다.

백희도는 그 옷을 입자 살짝 미간을 찌푸리긴 했지만, 이번에도 별말 없이 게이트 경계에 서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저쪽’으로 왔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이 세상에 온 건 처음이었다.

“어느 던전을 갈 거야?”

“동서쪽에 최근 몬스터가 많이 출몰하고 기승을 부린다는 소문을 접했어. 거기에 던전이 새로 생겼을 확률이 커 보여서 가 보려고.”

“새로운 던전?”

그럼 위험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백희도는 내 우려를 읽어 낸 듯 짤막하게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던전이 생겼는데, A등급 일곱 명이 도전했다가 네 명이 중상을 입고 공략을 포기했다고 해. 보스까지는 갔다고 하더라.”

나는 그 말에 인상을 썼으나, 백희도는 오히려 기대된다는 듯 입꼬리를 씩 끌어 올렸다.

“보통 첫 공략 때는 아티팩트가 뜨는 거, 알고 있지?”

“뭐?”

몰랐던 사실이기에 눈이 동그래져서 묻자, 백희도는 ‘넌 아는 게 뭐냐’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 표정에 욱하긴 했지만, 정말 처음 듣는 말이라 백희도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어떤 던전이든 처음 깨면 아티팩트가 무조건 나온다는 거야?”

“밝혀진 건 아니니까 100퍼센트라고 할 순 없지만, 그럴 확률이 매우 커. 내 경우엔 거의 그랬으니까.”

경험에서 나온 말이기에 신뢰도가 확 올라갔다. 백희도가 특히 아티팩트에 목숨을 거는 성격이라는 걸 알아서 더 그랬다. 

뇌령검 때도 완전히 무모하게 굴지 않았나. 그 덕분에 혈갑의 설계도를 얻게 되긴 했지만…….

‘하지만 A등급이 네 명이나 중상을 입은 던전이라면, 내가 버틸 수 있을지가 관건인데…….’

백희도가 과연 나를 서포트 하면서 던전을 깨려고 할까?

그때, 녀석이 내게 말했다.

“나 정도 되면 너 하나쯤은 커버 가능하니까, 쫄지 말고 와라.”

“누가 쫄았다고!”

“표정만 봐도 알겠구만.”

민망한 마음에 백희도를 노려봤지만, 내심 안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백희도의 뒤를 따라가면서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형 생각이 났다. 왠지 성훈이 형이 있으면, 날 이렇게 데리고 다녔을 것 같다는 생각?

‘나보다 두 살 어린놈한테 이런 생각이 들다니…….’

나도 참 웃기는 놈이다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가, 문득 길게 자란 백희도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해서, 백희도에게 물었다.

“야, 백희도.”

“왜?”

“넌 머리 왜 기르냐?”

보통 남자들은 머리를 길게 기르진 않으니까 말이다. 잘 어울리긴 한다만…….

“드디어 내게 관심이 생기셨나?”

“뭐래.”

하지만 백희도는 히죽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