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감사합니다.”
“…….”
유세림은 별말 없이 다시 선두로 이동했다.
한편에서 표유정이 죽일 듯이 나를 노려봤지만, 지금의 나는 그녀의 살기 어린 눈빛을 맞받아쳐 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또 민폐 짓거리를 했어.’
1년이나 시간을 벌고, 과거로 돌아왔는데도 달라지지 못했다니. 이게 바로 등급의 차이인가?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결국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게 내 자괴감과 열등감의 스위치를 눌러 버렸다.
나는 이후, 뛰쳐나오는 황금 동상들에게 저주를 내리면서도 내 능력에 비해 다른 파티원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내가 고작 현의 줄을 끊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면 다른 이들은 황금 동상을 전부 죽이거나 녹였는데 그 속도마저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나는…….
‘나는, 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어두운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해 나갔다.
[내 보물을 탐하러 온 어리석은 자들이여…….]
하지만 그런 생각하는 동안에도 마침내, 보스 몬스터 [여왕 엘리자베스]가 눈을 떴다.
온몸이 다이아몬드로 된 여왕 엘리자베스는 거대하고 단단한 몸을 일으켜 보석 지팡이를 짚었다.
쿵―!
동시에 그녀의 시종인 황금 동상들이 나와 우리를 포위했다. 이젠 더는 징징거리면서 등급이니 뭐니 할 여유가 없었다.
‘되는 데까지는 해야 해.’
어차피 여기에 온 것은 내 결정이었다.
나는 전투태세를 마치고 가까이 다가오는 황금 병사들을 일대일로 견제하기보단, 다른 파티원과 보조를 맞춰 해치우는 것으로 포지션을 바꿨다.
깡―!
황금 병사 한 명이 김재호의 무시무시한 힘에 맞섰다. 아무래도 여왕의 보조 군사이니만큼, 일반 황금 동상보다는 강한 힘과 공격력을 가진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고통]!”
나는 반지에 가득 찬 피를 이용하여 황금 병사의 팔꿈치 이음쇠 부분을 노렸다. 김재호는 잠시 삐걱대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그대로 밀어붙여 병사를 쓰러뜨렸다.
퍽―!
[레벨이 증가하였습니다!]
나는 오랜만에 듣는 레벨 업 소식에 내 상태 창을 열어 봤다.
[플레이어: 한 솔
레벨: 71
직업: 디버퍼
등급: C
스킬:
―무거운 걸음 (위력 30/30)
―어두워진 눈동자 (위력 30/30)
―뒤집어쓴 가죽 (위력 30/30)
―? (위력 0/20)]
‘……어? 저 물음표는 뭐지? 새로 생긴 스킬인가? 하지만, 스킬이 새로 생긴다는 건 들어 보지 못했는데…….’
뭔가 굉장히 신경 쓰이는 것이 생겼지만, 지금은 일각을 다투는 전투 중이었다. 그래서 결국 상태 창은 끄고, 전장에 다시 집중했다.
“[불의 장벽]!”
성규림 씨가 다가오는 두 마리의 몬스터에게 불의 장벽을 사용하는 것을 본 나는, 그 몬스터들에게 다시 한번 스킬을 날렸다.
“[무거운 걸음]!”
다행히 [실패]라는 말이 뜨지 않았고, 두 마리 모두 속도가 느려진 채 불의 장벽을 향해서 걸어오기 시작했다.
당연히 불의 장벽에서 받을 대미지는 더 커진 상태. 놈들은 완전히 녹아 흐물흐물해진 상태로 쓰러졌다.
성규림 씨는 폴짝 뛰면서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었다.
“고마워요!”
“벼, 별로…….”
그렇게 잘한 일이라는 생각은 없었기에 좀 쑥스러웠으나, 어쨌든 그녀의 칭찬은 나를 조금 더 열정적으로 움직이게 했다.
나는 디버프를 마구 날리면서 [실패]라는 말이 뜨더라도 기죽지 않고, 계속해서 스킬을 썼다.
지금은 100번 날려서 20번만 성공해도 다행인 수준이니까. 물론 피를 너무 많이 써서 어질어질하긴 했지만, 파티에서 ‘파티원’으로 활약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자 멈출 수가 없었다.
‘나도…… 나도 할 수 있다고, 유세림……!’
물론 유세림은 혼자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어 이쪽은 보지도 않았지만, 나는 놈의 뒷모습을 보면서 괜히 놈에게 나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졌다.
콰아앙―!
그러나 유세림이 압도적인 무력으로 여왕의 목을 채찍으로 끊어 내 쓰러지는 여왕의 등을 밟고 선 모습을 보니 놈에게 나는 얼마나 하찮은 존재일까, 라는 생각도 다시 들게 됐다.
[‘여왕의 다이아몬드 부스러기’ 10개를 획득하셨습니다!]
하여 퀘스트 아이템을 얻고도 그리 기쁘지 않았다. 나는 언젠가 들었던 의문을 오늘도 다시 떠올렸다.
‘진짜 왜 우리랑 같이 다니는 거지?’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도 유세림이 나를 쳐다봤을 땐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이아몬드로 온통 반짝이는 배경 속, 그의 얼굴은 마치 신이 내려온 것 같아서…….
‘이 두근거림은 증오일까?’
나는 확신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유세림을 바라봤다.
* * *
“아티팩트가 떴습니다.”
이후, 유세림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얼굴로 여왕의 시체에서 뭔가를 집어 들었다.
그가 집어 든 것은 자수정이 박힌 은색 반지였다. 나는 그 반지를 쳐다보면서 아까 계속 홀릴 뻔했던 티아라를 떠올리곤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유세림은 그 반지를 쥔 채로 나를 바라봤다.
“감정해 본 결과, 정신 계열 저주에 특화된 반지라 한솔 님이 가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 찬성이에요!”
[나도 찬성이다요이!]
“쳇, 어차피 주술사 말곤 쓸모없잖아요.”
“아티팩트 얻는 운이 좋군.”
나는 반지를 들고 다가오는 유세림을 보며 조금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어쨌든 내가 얻을 아티팩트가 늘어나는 것을 거절할 순 없었다.
“아, 목걸이는 돌려…….”
“제겐 필요 없으니 그냥 쓰세요.”
나는 가까이 다가온 유세림에게 던전에 들어와서 받았던 목걸이를 돌려주려 했지만, 놈은 그런 내 말을 싹둑 잘랐다.
그뿐만 아니라 내 왼손을 잡아 들더니 비어 있는 약지에 이번에 새로 얻은 아티팩트를 직접 끼워 주는 것이 아닌가.
[혼란의 자수정 반지
―스킬1: 혼란 (마력 30 소모)]
그런데 이 자수정 반지는 유세림의 눈동자 색과 비슷해서 한편으로는 받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티팩트를 단순히 기분 때문에 거절할 처지는 아니니까 말이다.
“……감사합니다. 다른 분들께는 죄송하고요.”
“아니에요! 오늘 정말 대단하셨는걸요.”
[화영이는 한솔 요이가 오늘의 MVP라고 생각한다요이!]
나는 믿을 수 없는 후한 평가에 놀라 고개를 들었는데, 성규림 씨와 안화영이 나를 보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들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 내게 조금의 질투마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김재호, 이 무뚝뚝한 남자마저 내게 무심히 말했다.
“확실히 너랑 사냥하면 두 배는 빠르게 잡혀. 네가 자격 없이 아티팩트를 얻는다고 생각하진 않으니까, 인상 좀 펴지그래.”
“……고맙…… 습니다.”
나는 김재호의 말에 약간 충격을 받았다.
몇 달 뒤에 향할 [인어의 보화] 던전에서 나를 제물로 바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가 버리는 사람 중에는 분명 김재호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김재호가 나를 인정하는 듯한 말을 하다니…….
“흥. 실드 범위를 자꾸 벗어나서 얼마나 짜증 났는지 알아요? 몸 좀 사리면서 하라구요! 당신이 다치면, 내 책임이 되잖아.”
또 표유정은 얄밉게 초를 치듯 말했지만, 나는 그녀가 내게 몇 번이나 기습적으로 실드를 쳐 줘서 내가 무사히 다치지 않고 저주를 실현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표유정이 생각보다 프로페셔널 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녀가 다리를 잃게 되는 던전, [라몬의 연옥]에 대해 떠올렸다. 나는 미래를 알고 있으니까. 표유정의 다리를 잃지 않도록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젠장. 정이 너무 들어 버렸어.’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다시금 고뇌에 빠졌다.
* * *
“또 백희도에게 갑니까?”
이번 던전을 끝마친 후, 3주의 휴식 기간을 가지게 되었다. 안화영의 상태가 썩 좋지 않아 병원에 들러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파티원은 모두 ‘이쪽’ 세계로 넘어갈 준비를 하거나 이미 넘어갔다. 나는 넘어갈 준비를 하던 차였다. 유세림이 갑자기 내 숙소에 쳐들어와서 이렇게 묻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무슨…… 소리신지.”
일단은 부정했다. 백희도와 유세림의 관계는 딱 보기에도 서로를 싫어하는 그 이상인 듯했고, 유세림은 나와 백희도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굳이 정정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내가 백희도에게 간다고 하면 유세림이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 수 없어서 긴장되긴 했다.
이런 나의 태도를 보고 유세림은 한숨을 쉬더니, 마치 어린아이에게 불에 가까이 가지 말라는 식으로 또박또박 백희도에 대해 경고하기 시작했다.
“백희도는 주변에 사람을 두지 않습니다. 자신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고, 등급으로 사람을 평가하죠.”
처음 만났을 때 백희도가 등급 운운하며 나를 깔봤던 걸 떠올려 보면 유세림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기에 나는 얌전히 그의 말을 들었다.
유세림은 내가 반박하지 않자 말이 통한다고 느낀 건지, 조금은 부드러운 태도로 계속 말을 이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