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3/104)

22화

나는 찐한 사이라면서 테이블 아래로 허벅지를 턱 짚는 백희도의 손등을 꼬집었으나, 녀석은 꿈쩍도 안 했다. 되레 내 무릎 위쪽을 더 꽉 쥐었을 뿐이다.

“무슨 사인데? 한솔 씨가 설명해 주시죠.”

“무슨 사이긴. 너 같은 결벽증 새끼는 평생 못 할 짓 다 한 사이라는 거지.”

“…….”

“…….”

나는 유세림에게 결벽증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 말을 못 했고, 유세림은 아마 백희도가 한 말에 놀라 입을 다문 것 같았다.

하지만 백희도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왜 이 시간에 같이 호텔에서 밥을 먹는지 잘 생각해 봐, 세림아.”

그 말에 유세림의 표정은 본 적 없을 만큼 일그러졌다. 그는 약간은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나와 백희도를 번갈아 쳐다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당장이라도 변명하고 싶었지만, 유세림의 일그러진 표정을 떠올리니 갑자기 마음 한편에서 은밀하게 즐거운 감정이 솟아났다. 그래서 찬바람이 불 정도로 뒤돌아서는 그를 부르지 않았다. 이 오해가 어떤 방향으로 나를 몰고 가게 될 줄은 모르고 말이다.

나는 레스토랑을 나서는 유세림을 확인하고, 백희도에게 말했다. 

“……이제 허벅지에서 손 떼라.”

“큭큭큭……. 야, 유세림 표정 가관 아니었냐?”

백희도는 부드럽게 허벅지에서 손을 떼며 물었고, 나는 녀석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심정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세림의 열 받은 표정을 보고 백희도랑 게이인 척을 하다니……. 내가 미쳤지.

“저 파티에서 짤리면 어쩔 거야, 이제.”

나는 볼멘소리로 말했고, 백희도는 그런 나를 보며 히죽 웃었다.

“너도 참 눈치가 없다.”

“뭐?”

“유세림은 너 못 잘라.”

“왜?”

“그걸 모르니까, 네가 눈치가 없는 거지.”

백희도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고는 내 등을 팡팡 내리쳤다. 

나는 백희도를 째려봤지만, 놈이 저녁을 계산하러 일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만히 있었다.

* * *.

[한솔요이! 기다렸다구요이!]

“한솔 씨!”

나는 파티원의 (그래 봤자 안화영과 성규림 씨뿐이었지만) 환대를 받으며 2주간의 휴가 끝에 ‘저쪽’ 세상으로 복귀했다.

그동안은 백희도가 장기로 머무는 호텔에 있었다. ‘저쪽’에서는 잠자리도 불편하고 침구도 수준이 떨어지는데, ‘이쪽’의 호텔은 편안하고 안락했으니 말이다. 

백희도는 내가 제 방을 이용하는 걸 딱히 신경 쓰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호캉스를 한껏 누리다가 복귀 시점에 돌아왔다. 

그리고 놀랍게도 백희도가 장담한 것처럼 여전히 나는 유세림의 파티원 상태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

물론, 유세림의 태도는 냉랭했지만 말이다.

놈은 나까지 모이자 간단히 던전까지 가는 길만 설명한 후, 앞서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핑―!]

핑이 그런 유세림의 정수리에 앉아 몸통을 비볐음에도 놈은 가만히 있었다.

‘무슨 사이긴. 너 같은 결벽증 새끼는 평생 못 할 짓 다 한 사이라는 거지.’

나는 유세림이 결벽증이라던 백희도의 말을 떠올리다가 그의 손을 바라봤다. 얇은 면사포 같은 장갑을 낀 모습이 오늘따라 새삼스레 눈에 들어왔다.

‘맨살은 닿기 싫은 건가…….’

그러다 잠깐 뒤를 돌아본 유세림과 눈이 마주쳤는데, 금방 앞을 다시 보리라는 예상과 달리 유세림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놈의 시선에서 약간의 불쾌함과 기묘함을 느꼈다. 

‘너도 참 눈치가 없다.’

‘유세림은 너 못 잘라.’

그리고, 또 백희도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나는 심호흡하면서 진정하려고 애썼지만, 안타깝게도 잘되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나를 쳐다보고 있던 유세림은 내가 눈을 피하자 그제야 다시 앞을 쳐다보고 걸었다.

[딩, 디리리, 딩]

그때, 아름다운 하프 소리와 선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로 던전, [여왕의 세례] 던전 앞 몬스터들이었다. 

이쪽 몬스터들은 모두 황금 동상으로 되어 있는데, 사람을 현혹하는 음악을 계속해서 연주한다. 하여, 나는 미리 귀에 귀마개를 몰래 끼고 온 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아팠다. 팔찌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지.

“[보이지 않는 고통]!”

나는 황금 동상이 들고 있는 하프의 선 하나를 노리고 공격을 시도했다. 현이 한 줄 끊어지자, 머리를 아프게 하던 음악이 훨씬 덜해졌다.

[이건 먹을 수 없는 것이요이…….]

그리고 안화영의 소환수는 입안에서 씹다 버린 껌처럼 만든 황금 동상을 퉤 뱉어 냈다. 어쨌든 전투 불능으로 만든 것은 마찬가지라 괜찮은 공격이었다.

“하압! [불의 장벽]!”

이어 성규림 씨도 불의 장벽을 소환해 황금 동상들을 지글지글 녹여 버렸다. 

깡―! 깡―!

또, 김재호는 날카로운 도끼로 황금 동상들의 목을 날리거나 손을 잘라 연주를 멈추게 했다.

그리고 유세림은 채찍으로 동상들을 휘휘 감았다가 완전히 박살 낸 뒤에 다시 다른 동상을 감는 식으로 어마어마한 공격력을 보여 줬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던전에 진입하겠습니다.”

어느 정도 던전 앞 몬스터들이 치워졌을 때, 유세림이 말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던전 속은 어마어마한 보석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마치 까르르 웃는 것 같은 금화가 떨어지는 소리, 보석들의 산이 불쑥 솟아오르는 굉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중간중간 시선을 떼기 힘든 귀한 장신구들도 눈에 띄었다. 왕이나 쓸 법한 왕관부터 온통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드레스, 루비가 두 눈에 박힌 귀여운 인형까지.

“후아아아…….”

표유정은 꿈만 같단 표정으로 그 모든 보석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솔직히 내 표정도 그보다 약간 점잖을 뿐이지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애초에 두 번째로 오는 던전임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떼기 힘든 마력이 곳곳에서 나를 유혹하고 있었으니까.

그때, 유세림이 앞서 걸으며 말했다.

“보석에 손이 닿으면 황금 동상으로 변하니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곳곳에 황금 동상들이 숨어 있다 기습하곤 하니, 진열을 흐트러뜨리면 안 됩니다.”

표유정은 그 말에 언제 그랬냐는 듯 다부진 표정을 짓고는 우리 파티에 실드를 걸어 줬다. 

하지만 표유정보다 등급이 낮고, 정신 계열 마법에 저항력이 약한 나는 반 박자 늦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하나? 의지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몽롱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석 더미 중에 아름다운 자수정으로 장식된 티아라를 발견했다. 그 보라색 자수정은, 마치…….

‘위험해…….’

나는 이럴 때를 대비해서 손에 낀 반지의 보석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피가 차오르면서 따끔한 아픔이 들어 조금 제정신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피만 금방 차올랐고, 너무 많은 피를 저장하면 빈혈 때문에 어지럼증이 오기 때문에 나는 다시 왼쪽으로 보석을 돌려 잠글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다시 그 티아라가 아른거렸다. 나는 돌아가려는 고개를 억지로 숙이며 비틀거렸다.

“[보이지 않는 고통]! 윽…….”

나는 급기야 나를 향해 저주를 내렸다. 

손바닥이 쫙 갈라질 만큼의 고통을 주고 나니, 몽롱한 기운이 가시고 제대로 시야가 보이기 시작했다. 

피 냄새를 맡은 김재호가 뒤를 돌아봤다.

“힘드냐?”

“……괜찮아요.”

김재호는 내 말을 듣고, 내가 붙들고 있는 손바닥을 보더니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유세림을 불렀다.

“유세림!”

유세림은 앞서 걷다가 김재호의 부름을 받고는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이런 일로 유세림의 관심을 받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 없단 것도 안다. 유세림은 찢어진 내 손바닥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품에서 포션을 꺼냈다. 그리고 상처 위에 포션을 부어 주었다.

“……미안합니다.”

“…….”

마지 못한 사과에 유세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과 이후, 그는 내게 불쑥 동그란 목걸이를 내밀었다.

“이건…….”

“마법 저항력을 높여 주는 목걸이입니다. 아까부터 계속 저 티아라에서 눈을 못 떼더군요.”

“……!”

나는 마치 불에 덴 것처럼 놀라 반걸음 물러섰고, 유세림은 그런 나를 보며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오므렸다. 

나는 그에게 황급히 말했다.

“저는, 그냥…….”

“……그냥?”

하지만 곧장 그것에 대해 변명하는 것이 더 어리석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냥 입을 다무는 편을 택했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빼앗듯 그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진주알처럼 생긴 보석이 길게 늘어진 목걸이였는데, 다행히 누가 채워 줄 필요가 없을 만큼 길어서 나 혼자서도 착용할 수 있었다.

[정화의 진주 목걸이

―스킬1: 집중 (현혹형 마법 저항력을 20% 높여 준다 / 패시브)]

목걸이에는 백희도가 준 팔찌와 똑같은 옵션이 붙어 있었다. 

나는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멍한 느낌이 가시는 것을 느끼면서 유세림에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

1